제124회 당신이 열어준 문 너머에서.
귀령자는 서재 정리에 분주했다.
책을 일일이 빼서 먼지를 털었고, 여기 꽂았다 저기 꽂았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배치에 심력을 소모했다.
그렇게 책을 정리한 후 천리향을 서재 여기저기 가져다 두고, 차를 탈 물을 끓였을 때 임향이 그곳에 도착했다.
“서 공자님.”
“임 소저. 어서 오시오. 치우지를 않아서 엉망이오.”
누가 봐도 막 치워서 광이 번쩍번쩍 나고 있었지만, 임향은 미소를 지으며 모른 척해주었다.
“책이 참 많네요.”
“원래 더 많았는데, 많이 치웠소.”
“여기 책만 해도 정말 많아요. 이렇게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인 줄 몰랐어요.”
귀령자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여기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쓴 책이오. 이 방에서 직접 받았지요. 그리고 여기 이 책은 서장까지 가서 구해온 책입니다. 혹시 귀신들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 책을 읽으면 되는데, 빌려 드릴까요?”
“아, 아. 네.”
귀령자가 책을 꺼내 건넸다.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아, 이게 재미있으면 이것도 읽어보세요.”
“그건 괜찮아요.”
“여기 이 책은…….”
귀령자는 책들을 설명했다. 임향은 너무 신난 그를 말리지는 못하고 그냥 들어주었다. 하지만 설명이 너무 길어지자 그녀가 말했다.
“우리 차 마실까요?”
“아, 내가 타주겠소.”
귀령자는 끓고 있는 물처럼 열기로 가득했다.
그는 처음 그녀를 본 날을 잊지 못했다.
어디선가 개최한 후기지수들의 연회에 참석한 귀령자는 그날도 겉돌고 있었다.
일부러 따돌리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느낌을 받았다. 귀문에 대한 선입견도 선입견이지만, 결정적으로 귀령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다들 뭐가 그리 할 말들이 많은지. 뭐가 그리 자랑하고 싶은지.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왔을 때, 그곳에 임향이 있었다. 너무 예쁘고 분위기 있는 여인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별로죠?”
귀령자는 당황했다. 오늘 연회에서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여인이었다.
“연회 말이에요. 오늘 악사들도 그렇고, 술맛도 그렇고. 모인 사람들도 그렇고.”
귀령자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다는 것은.
“저는 임씨검가의 임향이에요.”
“나는 귀문의 서공이오.”
“아!”
순간 귀령자는 후회했다. 사문을 밝히지 말걸. 밝혀도 좀 더 대화를 나눈 후에 밝힐걸.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오히려 흥미를 드러낸 것이다.
“많이 들었어요, 귀문에 대해.”
“무슨 말을 들으셨소?”
“너무나 신비로운 문파라고요.”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안에서 누군가 임향을 불렀다.
“저 부르네요. 그럼 나중에 봬요.”
임향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시간을 두고 귀령자도 안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 임향이 여러 무인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인기가 많았다.
임향이 자신을 알아봤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때문에 옆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귀령자는 그날 돌아와서도 한동안 계속 그녀 생각이 났다. 한동안 부지런히 연회에 다녔다.
차를 정성껏 타서 가져오며 귀령자가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은 책 있으면 다 빌려 가시오.”
* * *
창가에서 밤하늘을 쳐다보던 이안이 내게 말했다.
“도련님? 사람들이 유성이 떨어질 때 비는 소원 중에 가장 많은 것이 뭔지 아세요?”
“뭔데?”
“앗! 엇! 젠장! 이런 거래요.”
그녀의 말에 내가 웃으며 말했다.
“난 눈과 입이 빨라서 결코 안 놓치지.”
“과연 그럴까요?”
“두고 봐.”
우리 두 사람은 절대 놓치지 않고 소원을 빌겠다는 태세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이안이 불쑥 말했다.
“부모님 얘기는 그때 처음 꺼낸 거였어요.”
객잔에서 임향과 대화를 나눌 때, 그녀는 부모 이야기를 꺼냈다.
“한 번쯤은 도련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어서 말했었죠.”
“그럴 것 같았다.”
“자, 그럼 위로 부탁드려요.”
“위로는 무슨. 사실 나도 부모, 자식 간의 정에 대해서 잘 몰라서. 너도 알잖아? 내가 어려서 어머니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세상 무뚝뚝한 성격이고. 그래서 네게 뭐라 말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실 저도 그래요. 예전에 도련님이 교주님 때문에 힘들어하실 때, 위로해 드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뭘 알아야 위로하죠. 오히려 부모에게 배워야 할 것, 도련님에게 다 배웠어요.”
“같이 코 흘리면서 컸는데, 뭘 내게 배워?”
“그래도 제 코는 도련님이 닦아주셨어요. 도련님에게 많이 배우고 의지했어요.”
나는 그녀를 위로하려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냥 같이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 작전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고민 중이다.”
“뭔가 자극이 필요해요!”
“어떤 자극?”
“임 소저를 납치한 다음에 서 공자가 구하게 하는 것 어때요?”
“어설픈 짓 하다가 사고 난다.”
“남녀 사이에는 뭔가 짜릿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요!”
“이안아, 네 인생에서 제일 짜릿했던 순간을 떠올려봐라. 거기에 납치, 구출, 뭐 이런 것들이 있었냐?”
“……없었죠.”
“다른 사람도 없을 거다.”
내 인생의 짜릿함은 일상에서 얻었다. 그것도 대부분 누군가 내게 해준 말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해준 말, 이안이 했던 말, 서대룡이 했던 말, 장호가 했던 말, 마존들이 했던 말, 풍천교주나 고월이 했던 말, 그리고 내가 했던 말…….
그 무수한 말들이 쌓이고 쌓여 내 인생은 바뀌고 있다. 나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내 삶은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 말해주려고. 그 사람에게.”
그 순간, 유성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흘러내렸다.
앗! 부디…… 에잇! 젠장!
* * *
며칠 후 나는 운치 좋은 장원을 빌려 귀령자와 서진을 초대했다. 지난번 연회에 초대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을 초대한 것이다.
귀령자는 앞서 나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간 상황이었고, 서진 역시 이안에게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솜씨 좋은 숙수의 맛있는 요리와 우리 넷밖에 없는 조촐한 연회였지만, 귀령자는 이런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
이안과 서진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귀령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초대해주셔서 고맙소.”
“별말씀을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슬쩍 혼인과 관련해서 운을 뗐다.
“혼인 준비는 잘 돼 가시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되고 있소.”
“가끔은 혼인한 부부가 부러울 때가 있소.”
“뭐가 부럽소?”
“서로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잖소? 눈빛만 봐도 아, 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겠구나. 아, 이런 상황이면 저 사람은 이렇게 판단하고 행동하겠구나. 세상 살면서 그런 사람 한 명쯤 있는 것, 너무 좋을 것 같아서요.”
귀령자를 땅으로 끌어 내려야 한다. 지금 그는 둥둥 떠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그가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앞에 있는 여자를 차분히 쳐다보게 해야 한다.
“임 소저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오시오?”
귀령자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잠시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하도록.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혼인 이야기는 거기까지만 하고 귀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호감을 얻었다. 시공이환술을 배우면서 이쪽 비술에 대한 이해도 깊은 나였기에, 귀술에 관해서도 대화가 잘 풀렸다. 거기에 아부신공까지 더해지니 귀령자는 나와의 대화에 푹 빠져들었다.
그날 이후에도 나는 어떻게든 그와 만나려고 노력했다.
귀령자는 바빴지만, 굳이 긴 시간을 만날 필요는 없었다. 잠깐 차 한잔할 시간이면 충분했다.
어떤 날은 그의 집 객청에서 천마호신공을 운기하며 그를 기다리기도 했다.
귀령자를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혼인이나 여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했다.
자꾸 그를 찾아가자 처음에 귀령자는 ‘이놈, 밥 한번 먹었다고 왜 이래? 뭘 노리고?’ 이런 의심이 역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대화하는 것을 은근히 좋아했다. 평생 친구 하나 없던 그였으니까.
의도적으로 시작했지만 나도 그와 대화 나누는 것이 점차 즐거워졌다. 아부신공이 점점 필요 없어졌다.
“제 사매가 그러는데 여자에게 너무 잘해주면 안 된다네요.”
“왜 그렇소?”
“열 번 잘해주다 한 번 못 해주면 섭섭한 게 사람 마음이니 그렇겠지요.”
“열 번 다 잘해주면 되지 않소?”
“세월이 지나면 사람 마음이 변하지 않겠소?”
“나는 안 변할 거요.”
“서 공자도 사람인데 변할 거요.”
“나는 다르오! 절대 안 변하오!”
이렇게 고집부릴 때면 확 달려들어서 이렇게 소리치고 싶다.
변했다고! 당신 정말 변한다고! 어휴, 말자, 말아. 그냥 뜯자, 뜯어.
“너무 잘해주지 마시오. 저잣거리에 가면 나쁜 남자들이 인기 많소.”
“아! 그건 나도 느꼈소. 연회에서 보면 왜 저런 놈을 좋아하지 싶을 때가 많았거든.”
“그러니까 너무 잘해주지 마시오. 좀 못 해주다가 한 번씩 잘해주면 감동이지 않겠소? 사람이 매번 잘할 수는 없을 테니.”
“일리 있는 말이오.”
늙은 시절의 귀령자는 나와 대화를 나누기를 그토록 바랐는데. 그때는 술 한 잔만 마시고 다시 재료를 구하러 떠났었다.
그때 못한 이야기, 우리 정말 실컷 합시다.
계속 시간이 흘러갔지만 나는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그를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
“귀술 수련에 필요한 중요한 재료를 구하러 가는 날짜와 임 소저 생일이 겹쳤다는 거요?”
“맞소. 그럼 어딜 선택할 거요?”
“당연히 임 소저 생일을 챙겨야지요.”
“중요한 재료인데도요? 이번에 놓치면 삼 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래도 비교할 가치도 없소.”
언젠가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귀령자야. 오늘 네가 했던 말을 꼭 기억해라! 한 번도 안 한 말과 한 번이라도 내뱉은 말은 분명 차이가 있을 테니까.
나는 노력했다.
모른 척 이야기도 했고, 설득도 했고, 그를 부추기기도 했다. 용기도 줬고 암시도 줬고, 정보도 줬다.
평생 대법 재료를 모은 나를 배신하고 자신이 과거로 가버리려 했던 귀령자였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이렇게 왔음을 고맙게 여기고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드디어 혼례를 하루 앞두고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다.
“당신을 오늘까지 만날 줄이야.”
그렇게 운을 뗀 귀령자가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안 되오. 그대가 내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지.”
참고 참았던 질문이고, 그만큼 우리가 친해졌다는 증거기도 했다.
“처음 임 소저 봤을 때부터 좋았다고 하지 않았소? 나도 마찬가지였소. 서 공자 보면서 왠지 형 같고, 친구 같고, 좋은 감정이 들었소. 다른 의도는 없소. 지나치게 자주 본 것은 내일 혼례가 끝나면 나도 다시 떠날 작정이라 그대를 언제 볼지 모르기 때문이오.”
귀령자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하늘에 맹세합니다. 만약 제 말이 거짓이면 저는 천마에게 끌려갈 겁니다!”
귀령자가 손사래를 쳤다.
“그만두시오! 그런 끔찍한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소! 믿겠소. 이런 맹세라면 믿어야지.”
그가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혼인 축하하오.”
우린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후를 통틀어 처음으로 그의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혼례가 열렸다.
이안은 혼례 구경이 처음이라며 신이 났다. 명문가의 혼례답게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았는데, 이안은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 보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예식을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오늘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면 안 되니, 면사가 달린 죽립을 착용하고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었다.
혼례가 끝날 무렵 이안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도 교로 돌아가자.”
“네, 도련님.”
“이번 여행 즐거웠냐?”
“제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책에 기록까지 남기면서 다녔으니 그녀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안과 서진이 아쉬운 작별을 했다. 두 사람은 꽤 친해진 듯 보였다. 내가 귀령자를 만났을 때, 이안은 서진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난 아예 서진의 운명을 이안에게 맡겨 두었던 것이다.
저 멀리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던 귀령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와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일지, 우리가 또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나눴던 대화들이 그의 삶에 변화를 주고, 그 변화들이 모여 결과를 바꿔내기만을 바랄 뿐이다.
당신이 오늘 연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소. 모두가 말하는 후회만이 있을지, 눈빛만 봐도 서로를 알 수 있는 동반자가 있을지. 다만 한 가지만 당부하겠소.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마시오. 날 평생 기다려줬던 것처럼, 당신 인생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오. 당신이 내게 열어준 문 너머에서 나 역시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나아가고 있으니까 당신도 그러길 바라겠소. 귀령자, 부디 행복하시오.
나는 이안과 함께 귀문을 나섰다.
“자, 이제 돌아가자, 이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