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27화 (127/214)

제127회 그자의 술 냄새는 언제나.

내가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아버지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그에게 옮겨진 것이다.

자기 방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을 줄 알았더니 그는 마당에서 멸천대도를 휘두르며 도법 수련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도를 거둬들였다.

“왔나?”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대수롭지 않게 인사했다. 격정적이지 않았기에 격정이 느껴지는, 혈천도마다운 재회였다.

“책 읽는 모습도 멋지지만, 도를 휘두르는 모습이 더 멋지십니다.”

“웬 아부냐?”

“어르신 덕분에 살았거든요.”

내가 옷 앞자락을 펼쳐서 혈천도마가 준 귀호의를 보였다.

검에 베여서 갈라진 자국이 몇 군데나 있었다. 자그마치 검황 백망기가 남긴 흔적이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물론 극품천잠사도 함께 한몫했다. 겹친 두 기물이 나를 살린 것이다.

혈천도마가 가까이 와서 검이 남긴 흔적을 보았다. 그의 눈빛에 스친 것은 분명 안도감이었다.

“저 걱정하셨죠?”

“걱정은 무슨! 귀한 보의 망쳤을까 봐 본 거지. 됐네, 계속 써도 되겠네.”

안 봐도 알 수 있다. 서대룡에게 절대 내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걱정하고 있었으면서.

“소문이 사실이었군.”

“무슨 소문 말씀입니까?”

“검황 백망기가 죽었다는 소문.”

그의 죽음은 외부에는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정보였다.

“그 사람 검술에 대해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러자 혈천도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데 왜 이 흔적을 백망기의 흔적이라 보십니까?”

“백망기가 아니라면 자네와 극악이 합공했는데 이런 검상을 남길 수가 없었겠지.”

“제가 극악소마와 합공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따라오게.”

그러자 혈천도마가 나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벽장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내게 획 던졌다.

놀랍게도 그건 무면객들이 쓰는 백색 가면이었다.

그것도 일반 가면이 아니라 극악소마가 쓰던 그 극상품이었다. 가벼우면 공기까지 잘 통하고 특히 밖에서는 눈을 볼 수 없는 그것이었다.

“극악소마와 싸워서 그 사람 죽였습니까?”

“죽이고 싶다고 그놈이 어디 쉽게 죽어줄 놈이더냐?”

“한데 이게 왜 어르신 벽장에서 나옵니까?”

“극악소마가 뭐라 않더냐?”

“돌아와서 극악소마는 아직 안 만났습니다. 천마전에 들렀다가 곧장 어르신께 온 겁니다.”

“악인곡부터 안 갔다고?”

“당연히 어르신께 먼저 와야죠. 왜 극악소마에게 먼저 갔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극악소마가 다녀갔네.”

“어르신께요? 와서 뭐라고 하던가요?”

“그걸 내게 맡기고 갔지. 자네가 오면 전해주라고.”

“이걸 어르신께 맡겼다고요? 왜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네. 왜 이 재수 없는 걸 내게 맡긴 거지?”

혈천도마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게 준 것을 이안이 가져갔으니, 다시 만들어 준 모양이다. 교로 돌아와서 만드는 김에, 기왕 주는 것 극상품으로 만들어서 준 것이고.

“대체 무슨 수작이냐고?”

“이 질문은 그때 극악소마에게 했어야죠.”

“했지.”

“하니까요?”

“그냥 그걸 자네에게 주란 말만 남기고 가버렸네. 대체 뭐 하자는 짓이냐?”

“아무에게나 맡겼다가 분실될까 봐 그랬나 보죠.”

“본교에 누가 있어 그자가 맡긴 물건을 잃어버린단 말이냐? 가보를 치우고 그 자리에 이 가면을 놓아둘 거다.”

나는 크게 웃었지만, 혈천도마는 웃지 않았다. 그는 나와 극악소마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긴, 자네와 나갔으니 뭔 일이 있었어도 있었겠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내게 가면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왜?”

“말씀드리자면 긴 이야깁니다. 원하시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됐네. 그깟 이야기 들어서 뭐 하려고.”

“가면을 맡긴 이유는 친분을 과시해서 어르신과 제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겁니다.”

“그러니까 왜?”

눈치 빠른 혈천도마가 어찌 그 의도를 모르겠는가? 혈천도마는 그 이간질의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다.

“저도 모르죠. 그 사람의 속마음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말했다.

“극악소마를 믿었다간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질투 같은 감정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에 극악소마와 동행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경고였다.

“그 사람 믿지 않습니다.”

혈천도마가 그 작고 가느다란 눈으로 내 손에 들린 가면을 응시했다.

“과연…….”

더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과연 그게 네 뜻대로 될까? 극악소마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꺼내면 괜히 자신이 극악소마를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굳이 하지 않았을 뿐이리라.

“어르신은 왜 극악소마를 싫어하십니까?”

“그놈에게 가서 물어보게. 그놈은 날 좋아하는지. 서로 마찬가지지. 대체 본교에는 왜 이렇게 미운 놈들만 있는 거냐?”

나는 다시 웃었다. ‘그건 어르신의 성격 때문 아니겠습니까?’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고 꾹 삼켰다. 그가 어디 자기 성질을 몰라서 저 말을 하겠는가?

“이젠 제 미운 놈 이야기 좀 해야겠네요. 그사이 형이 또 어르신을 찾아왔습니까?”

혈천도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에 찾아온 이후, 내가 답을 하지 않았네. 대공자는 그것을 명백한 거절로 받아들였을 테지.”

“역시 든든합니다.”

“방심하지 말게. 나는 언제든 대공자에게 갈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럼 저도 같이 가겠네요.”

“무슨 뜻인가?”

“제 몸에 붙은 날개가 날아가면 저도 함께 가겠지요?”

혈천도마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재수 없는 가면을 쓰고 다니는 한, 날개는 금방 떨어져 나갈 거다.”

말은 저렇게 해도 혈천도마는 쉽게 가지 않을 사람이다. 극악소마가 이간질해도, 통 넓게 받아주고 있다. 그래서 내가 첫 번째로 찾아온 사람이 이 혈천도마인 것이다.

“설령 어르신이 형에게 가버리셔도 저는 어르신을 찾아뵐 겁니다. 절 없애기 위한 작전이 한창인 방문을 열어젖히고 어르신 찾을 겁니다.”

“왜?”

“그야 뵙고 싶으니까요. 그때도 뵙고 싶어질 테니까요.”

“또 대놓고 아부구나.”

혈천도마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다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이제 그의 마음의 문은 제법 열려서, 그 안에서 그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요, 보기 좋습니다. 그렇게 좀 웃으십시오.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일간 풍류주점에서 한잔하시죠.”

작별을 고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혈천도마가 물었다.

“극악소마에게 가는 거냐?”

“네, 선물을 받았으니 인사는 해야겠지요.”

“선물이 아니었더라도 갔겠지?”

“아마 그랬을 겁니다.”

나는 굳이 혈천도마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정직하게. 아무리 거북하고 내키지 않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정직하게. 나는 이것이 혈천도마를 잃지 않는 가장 큰 힘이라 믿는다.

그랬기에 혈천도마 역시 진심으로 이런 조언을 해주는 것이겠지.

“나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극악소마는 결국 극악소마다. 그걸 절대 잊으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혈천도마의 처소를 나온 후 곧장 극악소마를 만나러 갔다.

나는 극악소마가 준 가면을 쓰고 악인곡으로 들어섰다.

무면객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다 같은 백색 가면 같지만, 극악소마의 가면은 표가 났다. 자신들의 마존이 쓰는 가면을 내가 쓰고 있으니 모두 놀란 것이다.

그렇게 놀란 시선을 받으며 극악소마의 방까지 안내되었다.

그의 방은 예전에 찾아왔을 때와 똑같았다.

사방 벽은 물론이고 바닥까지 온통 하얗게 칠해져 있는 방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탁자도, 장식장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극악소마만 서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은 딱 하나였다.

처음 왔을 때 그는 벽을 보고 있었는데, 오늘은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소마님.”

그러자 극악소마가 돌아섰다.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자, 눈구멍 속 그의 눈이 반가움을 드러냈다.

“가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이전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이걸 왜 도마 어르신에게 맡긴 겁니까?”

“둘이 제일 친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이공자가 나 말고 다른 사람과 친한 꼴을 보기 싫어섭니다. 모르긴 해도 그 옹졸한 늙은이, 신경 좀 쓰고 있을 겁니다.”

나는 가면을 머리 위로 올려 쓰며 물었다.

“친하면 제일 친해야 직성이 풀리십니까?”

“맞습니다. 그게 제 성격입니다. 이제부터 저하고 제일 친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나는 대공자에게 가버릴 겁니다.”

“소마님의 이기심, 접수했습니다.”

극악소마가 큰소리로 웃었다.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팔마존 하나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과 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은 두 배의 노력이 드는 일이 아니다. 세 배, 네 배의 힘이 드는 일이다. 그들은 절대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이다.

“예뻐진 심장과 여행은 어땠습니까?”

“정말 좋았습니다.”

“역시 여행은 미녀와 가는 것이 좋죠?”

“그 미녀가 어찌나 좋아하는지. 너무 늦은 여행이라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여자에게 빠지지 마십시오. 결국 이공자를 배신할 겁니다.”

“천화루주가 들으면 섭섭해하겠군요.”

“그녀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믿지 않는다는 걸. 믿지 않는 사람을 배신할 수는 없지요.”

“그럼 소마님은 저도 믿지 않으시겠군요.”

“난 인간은 믿지 않습니다. 친한 것은 친한 거고, 믿음은 별개의 문제지요.”

대놓고 나는 이렇다고 말해주는 것이 고맙다. 항상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가 다른 가면을 썼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실망감이었으니까.

“형이 다녀갔습니까?”

극악소마는 대답에 다른 정보까지 얹었다.

“두 번이나 다녀갔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독왕과 권마도 부지런히 만나고 다니는 것 같더군요.”

“아직은 우리가 유리하군요?”

“계산이 왜 그렇게 됩니까?”

“설령 독왕과 권마가 형 손을 잡았다고 치더라도, 마불까지 더해서 셋입니다. 반면 우린 소마님, 혈천도마, 일화검존, 섭혼마존 이렇게 넷이잖습니까? 사 대 삼, 우리가 유리합니다.”

“사 대 삼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일단 나만 해도 대공자의 편도 아니고, 이공자의 편도 아닙니다.”

그가 내 편도 형편도 아니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달성했다. 물론 내 정서적인 감정선은 그보다는 더 친밀했지만.

“그럼 우리가 불리하군요. 우리의 섭혼마존은 아직 한 사람 몫을 하기에는 너무 약하니까요.”

“어디 섭혼뿐이겠습니까?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이공자 편임을 확신합니까? 피로 연판장이라도 작성했습니까? 대공자가 제시하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돈과 권력, 아주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심지어 액수와 직위까지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죠. 그는 자기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지를 수 있는 최대치를 지르고 있습니다.”

내가 허용한 숨구멍이기도 하다. 그래, 형. 형도 최선을 다해라.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말이 있는 법이니까.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면 인간은 결국 가장 단순한 것을 선택하는 법입니다. 적어도 이공자보단 대공자가 단순하게 느껴지지요.”

어쩌면 극악소마는 내게 보여주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인간관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혈천도마에게 가면을 맡긴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 단순한 이유만으로 관계에 실금이 갈 수도 있음을 보여주려고.

물론 그가 생각한 것보다 혈천도마의 마음이 넓었기에 통하진 않았지만.

그는 내게 충고하고 있다. 내가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실패하게 될 것을.

“저도 팍팍 지를 겁니다. 형보다 무조건 두 배! 어떻습니까? 혹 하십니까?”

“돈이 그렇게나 많습니까?”

“지금부터 벌어야지요. 돈 있으면 좀 빌려주십시오.”

그러자 극악소마가 훌쩍 몸을 날려 뒤쪽 벽으로 날아갔다.

“너무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항상 돈 빌리는 쪽이 너무한 겁니다.”

우린 마주 보며 동시에 웃었다.

“한데 형이 독왕과 권마에게 접근하고 있다고 했는데, 왜 대취마는 뺐을까요?”

내가 대취마에 대해 언급하자 극악소마가 웃음기를 거두고 불쑥 물었다.

“술 좋아하십니까?”

“적당히 마십니다.”

“취마는 술에 있어서 끝장을 본 사람입니다. 맨정신인 사람이 술 취한 자를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지요.”

“취마에 대해서 아십니까?”

나도 마존에 대해 알 만큼 알지만, 그 정보는 지금보다는 미래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큼직한 행적들, 대법 재료를 찾으러 왔을 무렵의 그들, 그리고 그들의 최후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기의 취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건 동시대를 사는 극악소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 모릅니다. 다만 그자를 보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극악소마가 봐서 기분이 나쁘면 좋은 사람 아닙니까?”

“그럴 지도요. 아니면…… 더 나쁜 놈이거나요.”

“그건 좀 무섭네요. 극악소마보다 더 나쁘다니.”

“그자의 술 냄새는 언제나 내 기분을 나쁘게 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극악소마는 취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 묘한 이채를 발했다. 마치 내가 그를 어떻게 상대할지 흥미롭다고 여기는 눈빛이었다.

그는 분명 취마에 대해서 뭔가 더 알고 있었다. 고약한 마음이 또 발동해서 말해주지 않고 즐기려 드는 거다.

소마, 당신은 취마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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