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회 당신은 취해서 어떤 꿈을 꾸고 있나?
다음 날 황천각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나를 조사관들과 집행무인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특히 대취마의 수하를 붙잡아온 일로 다시 황천각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내 집무실은 떠날 때와 똑같이 잘 정리되어 있었는데, 창가에 놓인 화분의 꽃이 잘 자라는 것처럼 서대룡이 집무실도 잘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밀린 일들 다 가져오게.”
“그러실 줄 알고 가져왔습니다. 여긴 각주님이 직접 처리하셔야 할 것들입니다.”
일이 많이 밀렸을 거로 생각했는데, 서대룡이 내민 서류를 보니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살펴보니 반드시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을 제외하곤, 그가 다 꼼꼼하게 끝낸 것이다. 황천각 일 만큼은 나보다 더 잘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무공 역시 혈천도마에게 배우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고.
‘잘 크고 있네, 우리 차기 황천각주.’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서대룡은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때 다른 조사관이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각주님 앞으로 온 물건입니다.”
“누가 보낸 건가?”
“취마존께서 보낸 겁니다.”
취마의 수하를 잡아 오자 뭔가를 보냈다? 마존들에게 취마에 관해 물었는데, 내가 움직이기 전 그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조사관이 상자를 내려놓고 나갔다.
내가 상자를 열려고 하자 갑자기 서대룡이 소리쳤다.
“조심하십시오!”
“깜짝이야! 왜?”
“독연이라도 터지면 어쩌려고요? 라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아니겠네요. 고작 술 마시고 마차 몰다가 사람 죽인 놈 때문에 각주님을 죽일 리는 없으니까요.”
“당연하지. 오히려 자네 때문에 놀라서 죽을 뻔했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술병이 하나 들어 있었다.
“술을 보냈네.”
술병을 드는 순간, 나는 흠칫 놀랐다.
“술이 아니라 술병을 보냈네.”
병은 비어 있었다.
“혹시 귀한 도자기 아닙니까?”
“그냥 저자에 파는 흔한 술병인데?”
“왜 싸구려 술병을 각주님께 보낸 겁니까? 이거 싸우자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반응할 게 뻔한데. 왜 빈 병을 보냈을까?
“이건 취마의 경고입니다. 자기 사람 풀어주라는.”
“그랬다면 깨진 술병을 보냈겠지. 칼을 보냈거나.”
“그럼 왜 보냈을까요?”
“고민할 필요 있나?”
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취마와 할 게 뭐 있겠어?”
나는 술병을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술이나 마셔야지.”
* * *
나는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취마가 기거하는 대취림으로 들어섰다. 미리 방문하겠다고 기별했기에 나를 안내할 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하는 무인의 안내를 받으며 대취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 곳곳에 집들이 지어져 있었는데, 움막부터 커다란 장원까지. 온갖 종류의 집들이 지어져 있었는데 아름다우면서도 자유분방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대취림 곳곳에 술을 만드는 크고 작은 양조소들이 있었고, 취객들은 평상에 앉아 술을 마시거나 아예 술에 취해서 누워 있는 이도 있었다. 좋게 보면 자유로웠고, 나쁘게 보면 엉망진창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곳은 다른 마존들의 수하와 비교하면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래서 술 취한 듯 보이는 이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취림 가운데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 가운데 작은 섬이 있었고, 그곳에 취마가 기거하는 전각이 지어져 있었다.
작은 나룻배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나를 데려온 무인은 섬에 나를 내려놓고 다시 돌아갔다.
나는 천천히 전각을 향해 걸어갔다. 입구에서 여인이 문을 열어둔 채 나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공자님. 저는 여빈(呂彬)이라고 합니다.”
단아한 인상의 그녀는 지난번에 만났던 삼대 취객 구마영과 마찬가지로 삼대 취객에 속해 있는 고수였다.
“마존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리로 가시지요.”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취몽루(醉夢樓)라고 이름 붙은 누각이었다.
누각으로 올라가자 그곳에 취마가 있었다.
그는 푹신한 털이 덮인 좌식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은 엉망이었다. 사방에 수십 개의 술병이 널려 있었다. 쓰러져 있는 술병도 있었고, 세워져 있는 술병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술병들이 그냥 널브러져 있는 술병이 아니라는 것을. 만약 여기서 그와 싸움이 벌어지면, 이것들이 모두 그의 무기가 되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진법으로 발동할 수도 있었고. 난장판이지만 난장판이 아니었다.
일화검존에겐 수더분하다는 평을 받았고, 극악소마에게는 기분 나쁘다는 평을 받은 그다. 그는 지금 내게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술에 취해서 잠든 모습을.
취마, 당신은 취해서 어떤 꿈을 꾸고 있나?
나는 잠시 서서 취마 너머로 햇살이 반짝이는 호수를 쳐다보다가 그에게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았다. 가져온 술병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인기척에 취마가 서서히 눈을 떴다.
대취마 송사혁(宋思赫).
그는 젊고 잘 생겼다. 본교에서도 손에 꼽는 미남이었고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동안이기도 했다. 한 며칠 수염을 깎지 않은 듯 보였는데 지저분해 보이기보단 남자답게 보이는 이유도 그가 잘 생겼기 때문이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앞에 놓인 술을 마시며 내게 물었다.
“한잔할 텐가?”
그의 얼굴 위로 회귀 전 보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졌다. 뼈만 남은 채 쇠약해진 그의 모습이.
내가 회귀대법 재료를 구하기 위해 본교로 돌아왔을 때, 취마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목숨만 붙어 있었을 뿐, 살아 있는 삶이 아니었다.
그는 병석에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마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생긴 병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취마가 술병으로 죽다니?
이것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를 싫어하던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한잔할 텐가?
병상에 누워있던 그가 내게 했던 첫마디였다. 그때도 지금도 그가 내게 한 첫마디가 같다.
그 말이 마음속으로 울려 퍼지며, 병든 그의 얼굴 위로 지금의 생기가 도는 지금 취마의 모습이 겹쳐졌다.
“자네가 좋아할 술인데?”
“괜찮습니다.”
그는 억지로 권하지 않겠다는 듯 들고 있던 술을 홀로 마셨다.
“왜 이제 찾아왔나? 팔마존 중 내 인기가 그렇게 없나?”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죠.”
“내가 자네 이야기의 주인공인가?”
“제 이야기의 주인공은 저죠. 취마님은 조력자이거나 대적자가 되겠지요. 취마님의 이야기에선 어떻습니까? 제가 어떤 역할입니까? 형이 조력자입니까? 아님 저입니까?”
취마가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대답 대신 물었다.
“술 좋아하나?”
“좋아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술자리 분위기를 맞출 정도는 마십시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데 사연이 있듯이 말하는군.”
가소롭다는 그의 반응에 당당히 되물었다.
“젊은 사연은 사연이 아니랍니까?”
취마가 웃었다. 잘생긴 그가 웃으니 여인깨나 울리고 다녔겠구나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떤 술을 좋아하나?”
“아직 취향이 생길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독주보단 마시기 편한 술이 좋습니다.”
술에 대한 질문으로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앞에 놓인 술병을 향했다.
“어떤 술을 채워왔나?”
“왜 술이라고 단정하십니까? 물일지도 모르고, 독일지도 모르는데.”
내 대답에 그가 싱긋 웃으며 잔에 술을 부었다. 따라 달라고 하지 않았고, 나는 따라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왜 빈 술병을 보낸 것 같나?”
“모르죠. 그거 물어보러 오라고 보냈나 싶기도 하고.”
“그거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솔직히 말해보게.”
“솔직히요? 기분 나쁘실 텐데요.”
“괜찮네.”
“됐습니다. 분명 화내실 겁니다.”
“화 안 내겠다고 약속하네. 화나면 술 마시면 되지. 우리에겐 술이 있지 않나? 자, 하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새끼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순간 취마가 움찔하더니 이내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좋구나!”
술병을 내려놓을 때는 기분이 좋아진 표정을 지었다.
“술이 이래서 좋아. 술 마시면 다 잊고 기분이 좋아지거든.”
그는 한 잔을 마셨으면서 한 병을 마신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 짜증났다면 왜 온 건가?”
“취마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 기회니까요. 내가 받아들여도 될 사람인가 아닌가, 함께 대업을 이뤄갈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주정뱅이에 불과한가?”
은근히 흘러나온 취마의 마기는 생전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마치 주기가 섞여 있기라도 한 듯 그의 마기가 내 몸을 감싸는 순간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천마호신공을 발동했다. 어지러운 기운이 사라지며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내 눈빛이 흔들림이 없자 취마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취마님은 술 좋아하십니까?”
그의 기세를 견디며 질문까지 던지자 취마는 마기를 거둬들였다.
“술 좋아하냐고? 그게 취마에게 물을 소린가?”
“취마님이니까 물어봐야 하는 말 아닙니까?”
“무슨 뜻인가?”
“무인에게는 무공 좋아하냐고 물어야 하고, 악사에게 음악 좋아하냐고 물어야 하고, 화공에게는 그림 좋아하냐고 물어야겠지요. 풍류주점 주인장에게는 술 파는 일이 어떠하냐고 물어야지요. 그런데 한 번쯤은 그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 아닙니까? 자, 다시 묻겠습니다. 술 좋아하십니까?”
“!”
취마는 노골적으로 표정에 요놈 봐라, 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자넨 소문과는 정말 다른 사람이었군. 인정하네. 내가 겪은 사람 중에서 자넨 소문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네.”
“그 말씀 너무 자주 듣습니다. 제 소문을 내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잡아다가 야단 좀 쳐야 할 것 같습니다. 내려면 제대로 좀 내라고.”
“자넬 상대하려면 술을 마셔야지 맨정신으로는 어렵겠어.”
“그건 마음속으로 하셔야 하는 말씀 아닙니까?”
“술 마시는 일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가 술을 연거푸 마셨다.
“그 술은 어떤 술입니까? 밖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술이겠지요?”
“나에 대한 선입견 중 하나지. 나는 아무 술이나 잘 마신다네.”
그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가 술잔을 내게 날렸다.
천천히 허공을 날아온 술잔이 내 얼굴 앞에 떠 있었다.
나는 술 냄새를 맡았다.
“아, 이 술은?”
“맞네. 자네가 자주 가는 풍류주점에서 받아온 술이네.”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선입견은 버리겠습니다.”
술잔을 회수한 것도 그였다. 되돌아간 술잔이 허공에서 기울어졌고 그가 아래에서 입을 벌려 술을 마셨다.
술을 비운 술잔이 탁자로 툭 떨어졌다. 어찌나 부드럽게 움직이는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허공섭물을 구사하는 모습만 봐도,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술 취한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깔끔한 한 수다.
“자네도 대단하군. 냄새만으로 풍류주점 술인 줄 알다니.”
“요즘 그 집 술만 마셔서 그렇습니다. 취마님이야 말로 냄새로 세상 모든 술맛을 다 아시는 분 아닙니까?”
“세상의 그 많은 술을 어찌 다 알겠는가?”
겸손한 말과는 달리 취마는 술을 냄새로 알아맞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취마가 또 술을 마셨다.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의 얼굴은 발그스레 달아올랐다. 취마쯤 되면 말술을 마셔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얼굴은 표가 날 정도로 붉어졌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네. 자넨 그렇지 않나?”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술은 혼자 마실 때가 제일 맛있지.”
“아직 그 세계는 잘 모릅니다.”
“저런! 이 극락 같은 재미를 모르다니!”
거짓말이었다. 낭인 생활을 할 때, 홀로 술을 많이 마셨다. 당시의 술은 내 친구였고, 도피처였으며 안식처였다. 그리고 나를 파멸로 유혹하는 악마였다.
“술을 내게 배웠어야지! 이 취마에게.”
“맞죠. 우리 아버지가 술을 잘못 가르치셨죠. 내일 뵈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농담임을 알았기에 취마는 웃으며 술을 마셨다.
취할수록 취마의 몸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술에 취한 것처럼 행동했다. 술을 마시다가 술을 쏟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연기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방심 그 자체였지만 나는 그가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이 싸우기에 가장 위험한 순간일 거다. 그와 싸우려면 술부터 깨워야 한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취마라고 술을 무한정 많이 마실 거란 것도 선입견이었군요.”
“취마니까 술을 적당히 마시겠지. 술을 모르는 작자들이나 인사불성 되는 거지.”
“맞는 말씀입니다.”
“이공자, 술 마시고 싸워본 적 있나?”
“없습니다.”
“해보게. 정말 끝내준다네. 긴장도 풀어주고, 겁도 덜 나지. 맞아도 덜 아프고. 자네 전력의 삼 할은 높여줄걸? 아마 내 생각에 무림 역사에 남은 고수들은 다들 술을 마시고 싸웠을 거야.”
그가 내 앞에 놓인 술을 쳐다보았다.
“그러니 마시게. 술이 자네에게 힘을 줄 거네. 술이 자네를 달래줄 거네.”
난 비로소 내가 가져온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술향이 퍼져나가는 그 순간!
눕다시피 비스듬히 앉아 있던 취마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아는 술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다시 내 앞에 내려놓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술에 빠진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는…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