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30화 (130/214)

제130회 선입견 그 자체십니다.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감당하기에는 꽤 길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내가 사 온 술은 그가 죽기 직전에 찾았던 술이었다. 천마신교 부근 한 양조소에서 파는 술이었는데, 왜 하필 이 술이 마시고 싶다고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취마는 이 술을 마시고 죽었다.

“왜 그 술을 사 온 것인가?”

눈동자만큼이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의 반응으로 볼 때, 분명 이 술에 얽힌 어떤 사연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모른 척 그에게 변명했다.

“기분이 나빠서입니다. 대단한 명주를 기대하셨나 본데, 그냥 아무 곳에 들러서 사 왔습니다. 저를 시험하려고 빈 술병을 보냈다면, 인근의 흔한 술을 각오하셨어야죠. 빈 술병을 받았을 때 제 심정이 어땠는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별 뜻 없이 사 왔다는 대답에 취마는 잠시 나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이 술을 사 오면 안 되었습니까?”

의심을 줄이려면 오히려 되물어야 한다. 오히려 피하지 않고 파고들어야 한다. 오히려 대놓고 물어야 한다.

“이 술에 어떤 의미라도 있습니까?”

내가 오히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취마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자네 성질 있군.”

“누군들 없겠습니까? 다들 참고 사는 거죠.”

취마는 벌떡 일으켜 세웠던 자세를 풀고 다시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술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했나? 어떻게?”

“저도 한때 빠져본 적이 있어서요.”

그러자 그는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또 젊은 주정뱅이는 주정뱅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겁니까?”

앞서 그에게 말했던 젊은 사연은 사연이 아니냐는 반문의 연속이었다.

“이해하네. 뭐든 강렬한 나이니.”

“비웃지 마십시오.”

“비웃는 게 아니라네. 나이는 어쩔 수 없다는 거지. 나도 제 잘난 척이나 하며 가르치려 드는 재수 없는 선배처럼 굴고 싶지 않은데.”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시면서요.”

“그래서 나이는 어쩔 수 없다잖아? 화나면 그 술 마시게.”

그래 놓고 자기가 화나는지 술을 벌컥 마셨다.

“젠장!”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잔이 깨어졌다. 그가 손을 들자 깨어진 잔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한구석으로 날아갔다. 그곳에 깨진 잔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취마가 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자네도 한잔하라니까.”

“화는 나지만 술은 마시지 않겠습니다.”

“왜?”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왔으니까요. 취마를 상대하는데 술을 마셨다간,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럴듯한 생각이네만, 반대로 이 생각은 안 해봤나? 취마를 상대하는데 술도 안 마시고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나?”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오늘은 그냥 술만 마시기로.”

“그건 내가 할 소리 아닌가? 술에 취해서 나에게 도와달란 부탁은 제발 말게.”

“좋습니다.”

나는 가져온 술을 병째 마셨다. 조금 마셨음에도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독하네요. 이 술 드셔보시겠습니까?”

취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술병을 들고 취마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술상에 그와 마주 앉았다.

“저는 술 마시면서 안주를 먹어야 해서요.”

“술꾼이 멋대가리 없이.”

“멋보단 건강이죠. 제가 술꾼도 아니고요.”

은침을 꺼내 독이 들었는지 요리를 확인했다. 그 모습에 취마가 버럭했다.

“내가 손님에게 독이 든 음식이나 먹이는 그런 사람처럼 보였나?”

“그래서 확인해 보는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은침으로 확인하려는 요리를 취마가 덥석 손으로 집어 먹었다.

“날 뭐로 보고. 그딴 것 없다! 그냥 먹어!”

“싫습니다. 어떻게 믿고요?”

다시 다른 요리에 은침을 꼽자 그것도 먼저 집어먹었다.

“날 믿으라고. 난 술이나 안주에 독이나 약물 타는 것들 증오해! 산 채로 씹어먹는 사람이라고.”

화가 잔뜩 난 그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안주 잘 드시네요. 앞으로도 그렇게 좀 드십시오. 만든 사람 성의도 생각하고. 안주가 꽃입니까? 쳐다보기만 하게.”

솔직히 이 말을 해주려고 일부러 와서 안주를 먹었다. 주위 사람 중 감히 취마에게 안주 먹으라는 말을 해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 사람아, 이대로 가면 술병으로 죽는다. 당신은 이렇게 술을 좋아하고 술에 관해서는 자부심이 높은 사람인데, 그 술 때문에 죽을 수는 없잖아?

이건 그가 내 편이 될지, 형 편이 될지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가 악행을 저질러 내 손에 죽더라도, 차라리 검에 찔려 죽기를 바라서다.

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를 좋아하고 즐겼는데,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너무 비참한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가 미래의 자신 모습을 본다면,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그는 자결할 것이다.

“자, 한잔하세.”

“안주 안 드시면 안 먹습니다.”

“됐나? 됐냐고!”

“좋습니다.”

우린 같이 술을 마셨다. 그는 더 마시면 힘들 것 같은데, 힘들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을 주면서도 술을 마셨다. 그는 점점 취해갔다.

그 와중에 어김없이 시도된 나의 아부신공.

“팔마존 중 제일 잘 생기셨습니다.”

“그건 누구라도 인정하는 바지.”

아부의 기술에는 밀고 당기는 기술이 필요하다. 좋은 말 해줬으면 나쁜 말도 해야 좋은 말이 더 빛나는 법, 바로 이렇게 말이다.

“솔직히 너무 조각 같아서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세상 여자들에게 전하게. 제발 나와 거리 좀 두라고.”

“아! 이건 못 참겠네요. 술 좀 마셔야겠습니다.”

세상에 누가 잘생겼다는 말 싫어하겠는가? 취마도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한때는 말이지…… 정말 여자들이 줄을 섰어. 자네 정파 여협과 사파 여고수가 날 두고 싸우는 모습 상상이 가나? 아, 정말 그때가 생각나는군.”

갑자기 흥취가 동했는지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웃통을 벗었다. 그리고는 말릴 사이도 없이 몸을 날려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는 한참을 미친놈처럼 여기저기 헤엄치더니 다시 누각으로 올라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은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였는데, 곳곳에 상처가 많았다.

그러고 보니 마존들의 몸을 본 적이 없다. 아마 다른 마존들의 몸에도 이런 상처들이 있겠지? 대법 재료를 구하던 나의 몸이 만신창이가 됐던 것처럼, 자리가 요구하는 상처들이.

“아, 이제야 술이 좀 깨네. 자, 지금부터 또 마셔보세.”

주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쩡히 돌아왔다. 그가 옷을 대충 걸치더니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술을 마셨다. 그는 쉴 새 없이 술을 마셨지만, 억지로 술을 권하진 않았다. 그거 하나는 정말 좋았다.

“왜 자넬 불렀는지 솔직히 말해줄까?”

“말해주십시오.”

그러자 취마는 정말 뜻밖의 이유를 댔다.

“아무도 날 찾지 않아서라네. 대공자도 자네도 왜 나를 찾지 않나? 다른 마존들은 잘도 만나고 다니면서? 날 무시해? 그래?”

“그랬다면 오늘 찾아뵙지도 않았겠지요.”

“하면 왜? 주인공이 나중에 등장한다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굳이 이유를 대자면 왠지 취마님은 후계 다툼과는 먼 곳에 계신 사람처럼 느껴져서겠지요?”

“내가?”

“아닙니까?”

“전혀. 내가 술 좋아하는 것과 교내 권력다툼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대체 이 둘이 어떤 관계가 있지? 전혀 별개의 일 아닌가? 뭐야? 술 좋아하면 사람 좋아하고, 권력욕 없고, 욕심 없고. 뭐 그래야 해? 누가 정한 거야?”

“이 역시 선입견이었나 봅니다. 정말 취마님은 선입견 그 자체십니다.”

“어휴, 징글징글한 세상.”

취마가 또 술을 마셨다. 기쁘든, 화나든, 어떤 감정을 느끼는 순간 그는 술을 마셨다. 이렇게 마셔대니 술병으로 죽는 것도 당연했다.

몇 잔의 술을 더 마셨을 때 나는 벼르던 질문을 던졌다.

“형에게도 술병을 보냈습니까?”

“보냈지.”

“형이 찾아왔습니까?”

그러자 취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이걸 보냈더군.”

그가 손을 뻗자 구석에 있던 상자가 날아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내게 보낸 것과 똑같은 술병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술병은 깨어져 있었다.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나?”

“알죠.”

“안다고? 내가 무슨 생각 했는데?”

“이 새끼가 뭐 하자는 거지?”

취마가 보낸 빈 술병을 보고 내가 했던 말을 다시 하자, 취마는 웃겨 죽겠다며 술을 마셨다.

“이공자 재밌어. 나랑 호형호제 어때? 이공자처럼 재미있는 동생 있으면 정말 끝내주게 좋을 것 같은데.”

“제발 우리 형도 그랬음 좋겠네요.”

취마가 더 크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

나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마존 셋이 나와 교류를 했기에 형은 마존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다. 한데 취마의 제안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거절했다고?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왜 형이 이런 선택을 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형답지 않은 반응이네요.”

“자네가 대공자를 잘못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저만큼 형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이보게, 이공자.”

“네.”

“그거 아나? 가까운 사람이 제일 못 본다네.”

나름 멋진 말이라고 했는데 그 와중에 취마가 술을 쏟았다. 괜히 무안했는지 그는 또 헤엄을 치려했다.

“술 좀 깨야겠어. 건방진 물고기 새끼들! 그것들도 내게 선입견 많을 거야. 혼내주고 오겠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그를 말렸다.

“그만 드시죠. 전 이제 가야 합니다.”

솔직히 더 마시고 싶었다. 취마와 술을 마셔서일까? 아니면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주충이 깨어나서일까? 이 술자리가 즐거웠다.

하지만 술자리에서만큼은 이 무림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사람과의 자리였기에, 나는 가져온 술만 비우는 거로 끝내려는 것이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취마는 몸을 가누지 못해 등받이에 기댄 채 내게 물었다.

“또 나와 술 마실 텐가?”

“불러주신다면 언제든지요.”

“우리 호형호제해야지?”

대답 대신 그에게 물었다. 이안이 말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취마님은 언제 마셨던 술이 가장 맛있고 즐거웠습니까?”

나는 이 물음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그러자 나온 뜻밖의 대답.

“지금.”

“저와의 술자리 말씀입니까? 이거 영광인데요?”

“우리 이공자가 꿈도 야무지군.”

취마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호수를 쳐다보았다.

“난 언제나 지금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네. 혼자 마시든,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과 마시든. 지금 이 순간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지. 자네가 가고 날 죽이러 자객이 와도 그놈과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을 거네.”

그러면서 취마가 막잔을 비웠다. 이제 너무 취기가 올라오는지 그는 거의 눕듯이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가 어여 가라고 손짓하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이미 오줌으로 나간 지난 술에…… 무슨 추억이 있겠나? 잘 가시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잠이 들었다.

난 조용히 돌아서 나왔다.

앞서 나를 맞았던 삼대취객 여빈이 나룻배 노를 저었다.

그렇게 호수를 반쯤 건넜을 때 뒤돌아보았다.

몸을 가누지 못한 취마는 누각의 난간에 빨래처럼 널려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은 거리였지만, 신안술 덕분에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터질 듯 붉은 얼굴에 그의 두 눈은…… 무심했다.

지금까지 마신 술과 농담과 시간은 대체 뭐였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허한 눈빛이었다.

그는 일화검존이 느낀 것처럼 수더분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극악소마가 느낀 것처럼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주정뱅이 같으면서도 주정뱅이가 아니었고 만만한 듯 보이면서도 만만하지 않았다.

나는 취마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 * *

대취림에서 나온 후 곧장 혈천도마를 찾아갔다.

혈천도마는 오늘도 도법 수련 중이었다.

“요즘 왜 이리 수련 삼매경이십니까?”

혈천도마가 휘두르고 있던 멸천대도를 땅속에 박아넣은 후 도에 몸을 기댔다. 그의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너는 피를 보지 않고 후계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거라 믿겠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한바탕 혈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절 위해 싸워주시게요?”

“날 위해 싸우는 거지.”

“그게 그거죠.”

“술 마셨구나.”

“취마와 마셨습니다.”

“취마와?”

“네. 그가 먼저 접근해왔습니다.”

과연 혈천도마에게 취마는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까?

“취마는 음흉한 자다. 가까이하지 마라.”

음흉한 자. 취마의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왜 이리 나쁜 것들 하고만 어울리는 거냐?”

“어디 안 나쁜 사람이 있어야지요.”

혈천도마는 그저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극악소마와 취마, 둘 중 한 사람만 선택해야 한다면요?”

그는 쉽게 한 사람을 고르지 못했다.

“그 정도로 음흉하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술에 빠진 놈들 싫어한다. 취했을 때 다르고 깨어있을 때 다르고. 주사에 진상에 뻔뻔한 망각에. 그 지랄발광의 극단에 서 있는 자가 취마다.”

하지만 혈천도마가 취마를 싫어하는 이유는 단지 그런 이유만이 아니었다.

“그자가 깨어있을 때를 본 적 있나?”

“아뇨, 없습니다.”

“나도 없다. 아마 아무도 보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다, 그놈이 음흉한 놈이라는 이유가.”

혈천도마가 왜 그를 싫어하는지 결정적인 이유가 나왔다.

“그는 취하지 않은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

과연 취한 모습이 그의 진짜 모습일까? 깨어 있을 때가 진짜일까?

“조심해. 음흉한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그가 어떤 마음으로 내게 술병을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취마야, 드디어 네 인생에서 한 번쯤 술이 깰 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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