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32화 (132/214)

제132회 오늘 술값은 내가 낸다.

풍류주점 주인장 조춘배가 나를 반겼다. 마치 죽은 조상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처럼 반가워해서 그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얼마나 뵙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주인장, 그간 돈 많이 버셨소?”

“많이 벌었지요. 각주님 덕분에 잘 벌고 있습니다.”

한동안만 유지되다 사라질 줄 알았던 황천각 소지부 덕분에 마가촌은 많이 정화되었다. 특히 취해서 행패 부리거나 돈을 내지 않고 가버리는 무인들이 거의 사라졌기에, 장사하기 너무나 편해진 것이다.

“오늘 술 많이 준비해둬야 할 겁니다.”

“오랜만의 재회시니까요.”

“그래서가 아니오. 오늘 새 술꾼이 올 겁니다.”

“술꾼요?”

“이따 보시면 압니다.”

나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서대룡과 장호만 있었다. 장호가 벌떡 일어나서 내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냈나?”

나는 그의 두툼한 손을 힘껏 잡아주었다.

“이제 마군도 자리가 잡혀서 예전보다는 일이 수월합니다. 제게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나를 향한 장호의 눈빛은 변함이 없다.

아마 일 년이 지나서 와도, 십 년이 지나서 왔다 하더라도 저 눈빛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를 주면 열로 갚는 사람, 열을 갚고도 아직 다 갚지 않았다고 여기는 사람, 바로 장호같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난 이 고귀한 충성심을 잘 지켜줄 것이다. 나는 그를 거목으로 키우고 그 우거진 나무 그늘에서 쉬고 싶다. 덩그러니 남은 밑동에 앉아 옛일이나 떠올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장호와 인사를 나누자 서대룡이 말했다.

“나중에 누가 오는지 장 군주와 이 무인에게 말해줬습니다. 조금 전에 이 무인은 급한 일이 있다면서 돌아갔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왜 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있어 아무 문제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의 경우까지 걱정했으리라. 아직은 즐기는 마음보다 나를 배려하는 마음이 더 커서다. 아마 지금쯤 수련장에서 땀 흘리고 있겠지.

“그리고 장 군주님께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을 알려드렸습니다.”

아직도 서대룡에게서 식지 않은 열기가 느껴진다. 아까보다 더 뜨겁다. 풀지 못한 감정은 마음속에서 점점 자라기 마련이니까.

“나보고 술 마시고 주사 부리라고 했지? 자네도 오늘 자네의 감정을 다 분출해.”

“그러다 죽으면요?”

“이인자는 여기 장 군주가 되겠지.”

장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서대룡의 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저 말 없는 지지가 서대룡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음을 안다. 서대룡이 장호를 본보기로 삼는 이유도, 장호라는 사람이 가진 이런 모습이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일 거다.

다 같이 재회의 술을 비운 후 서대룡에게 꼭 필요한 한마디는 해줬다.

“겁내는 것은 당연하다. 겁나면 겁내야지. 무서운 걸 무서워해야 본능이 잘 발동하는 거다. 자기가 뭘 무서워하고, 언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자기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해.”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주점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취마와 여빈이었다.

손님이 누군지 알아본 조춘배는 정말 놀랐다. 그리고 어떤 마존들의 방문보다 기뻐했다. 술장사하면서 취마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 그런 의미 이상의 반가움을 표했다.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대취마 어르신!”

그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들어선 손님이 취마라는 사실을 알자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숨을 죽였다.

취마가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말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네들이네. 실컷 마시게! 오늘 술값은 내가 내겠네.”

그의 말에 술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소리쳤다.

“잘 생겼다! 마존들 중에 제일 잘 생겼다!”

취마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저 자린 술과 안주를 두 배로 주게!”

그 말에 사방에서 잘 생겼다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저기도! 저 자리도! 다 주게!”

박수가 터져 나오고 술꾼들이 환호했다. 마존과 풍류주점 술꾼 사이에 존재하는 만장 절벽만큼의 거리감을 취마는 순식간에 좁혔다.

심지어 취마는 이 층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자리에 가서 술도 따라주었다. 술꾼은 손을 덜덜 떨면서 술을 받았지만, 평생 자랑거리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사방에서 부러움의 탄성과 환호가 나왔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술꾼들과 동화되어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취마는 취마구나 싶었다.

한바탕 일 층을 휩쓴 취마가 이 층으로 올라왔다.

“이공자, 나 왔네.”

“어서 오십시오.”

취마는 약소대로 여빈을 데려왔다.

“여긴 내 수하이자 대취림의 삼대취객인 여빈이네.”

서대룡과 장호가 취마와 여빈에게 인사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우린 한자리에 앉았다.

“이공자의 호위가 아름다워졌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오늘은 안 보이는군? 안타깝군. 이 잘생긴 얼굴을 보여줘야 했는데!”

취마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서대룡이나 장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취마께선 선입견 그 자체인 것이 맞나 봅니다.”

“무슨 뜻인가?”

“보통 술 좋아하는 사람은 정보에 밝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술 취해 지내는 시간이 많으니 오히려 정보에 밝아야지!”

“맞는 말씀입니다만, 술꾼 대부분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선입견을 한 꺼풀씩 벗겨나가다 보면 비로소 취마란 사람이 보이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는.

“여 무인께서는 술 잘 드십니까?”

“네, 좋아합니다.”

내 물음에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대취림에 갔을 때 나를 맞을 때의 모습보다는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취마 앞이었기에 조심하는 듯 보였다.

나는 슬쩍 서대룡을 살폈다. 그는 긴장한 채 취마와 여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서대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언제 나설 건데?

―술자리 시작부터 흥 깰 일 있습니까?

―하려면 지금 해. 술 취해서 그랬다간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제 무덤에 술은 뿌리지 말아주세요. 그냥 제가 키우는 꽃이나 심어주세요.

서대룡이 참을지, 술김에 말을 꺼내고 말지는 알 수 없다. 참으면 참는 대로, 꺼내면 꺼내는 대로 그에게는 도움이 되는 경험이 될 거라 믿는다.

그때 조춘배가 술을 가지고 올라왔다. 평소 보지 못한 술병이었다.

“언젠가 취마님이 저희 주점을 찾아주시면 드리려고 특별히 아껴둔 술입니다.”

그러자 취마가 냄새를 맡더니 눈을 크게 떴다.

“봉황동주(鳳凰董酒)?”

“오! 냄새만으로도 알아보시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백여 가지 약재로 빚은 희대의 명주를 내 어찌 모르겠나? 이 귀한 술을 어떻게 구했나?”

“한때 귀주의 양조소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님께서 헤어질 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귀한 술을 내게 줘도 되겠나?”

“천마신교 앞마당에서 술장사하는 사람인데, 이 술을 누굴 드리겠습니까? 오늘만 기다렸습니다.”

“고맙네.”

내가 조춘배를 보고 짐짓 삐친 척 소리쳤다.

“주인장! 내가 그렇게 자주 왔는데도 안 줬으면서!”

그러자 조춘배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진짜 술을 아는 분을 위한 술이라서요.”

적어도 이 술만큼은 언제가 한 번은 인연이 될 취마를 위해 남겨두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내게 고마움을 전했다.

“각주님 덕분에 평생의 숙원을 이뤘습니다. 감사합니다.”

취마가 봉황동주를 따서 우리에게 한 잔씩 따라주었다. 한사코 거부하는 조춘배에게도 술을 따라주었다.

“남은 술은 아래층에 가서 모두에게 조금씩 나눠주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취마에게 내심 감동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귀한 술을 흔쾌히 술꾼들에게 나눠주는 저 마음만큼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모두가 좋아할 겁니다.”

과연 잠시 후 아래층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자, 우리도 한잔하세!”

취마가 잔을 들었고 주점에 있던 모두가 함께 건배했다.

명주 때문인지, 아니면 분위기 때문인지 술맛은 끝내줬다.

“덕분에 좋은 술을 마셨습니다.”

“내 덕분이겠나? 이 공자 덕분이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 주점에는 올 일이 없었으니, 결국 자네 덕분이란 뜻이네.”

그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해줄 줄 아는 사람이다. 그에게 아부 신공을 자주 발휘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먼저 내 기분을 좋게 해주기 때문이다.

취마가 연거푸 석 잔의 술을 마셨을 때, 내가 말했다.

“안주 좀 드십시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앞에 놓인 젓가락이 살짝 떠 올랐다. 내가 허공섭물로 젓가락을 띄워 올린 것이다.

그러자 다시 젓가락이 아래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취마가 허공섭물로 그것을 다시 내린 것이다.

젓가락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우리의 내공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대룡과 장호, 여빈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취마의 내공은 생각했던 것보다 강력했다. 물론 내공으로 그를 이길 수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에서 양보하고 물러났다.

젓가락이 탁자에 내려졌다.

“이공자, 내공이 대단하군.”

“술 마시면 삼 할이 더 강해진다고 하셨습니까?”

나는 앞에 놓인 술을 마신 후 다시 젓가락을 띄웠다.

이번에는 취마가 내공으로 그것을 막지 않았다. 졌다는 듯 젓가락을 들고 안주를 먹었다.

“이제 됐나?”

“됐습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사내대장부가 왜 이렇게 안주에 집착하나?”

“남자 여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대장부냐 소인배냐 하는 문제도 아니고요. 그냥 건강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안주를 먹으면 술을 덜 먹게 되네.”

“그러라고 드시라는 겁니다. 적어도 술 석 잔에 안주 한 번은 꼭 드십시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여빈이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감사 인사였다. 그 모습에서 나는 그녀가 취마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취마가 내게 물었다.

“왜 이렇게 내 건강을 챙겨주는 건가?”

잠시 사이를 두고 그에게 말했다.

“아직은 취마님과 어떤 사이가 될지 모르니까요.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좋은 사이가 되었는데, 취마님이 술병으로 죽으면 어쩝니까?”

“뭐? 내가? 술병으로 죽어?”

그는 나를 만난 이래 가장 크게 웃었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자넨 참 이상한 사람이야.”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평생 내가 술병이 날까 걱정해 준 사람은 자네뿐이라네. 앞으로 만날 그 누구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을 거네.”

“저 말고도 주위에 있을 겁니다. 취마님이 어려워서 말씀을 못 드리고 있을 뿐이겠죠.”

“좋아, 그렇다고 치고. 만약 우리가 원수가 된다면 어쩔 텐가? 술병 나서 일찍 죽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나?”

“그 핑계 대는 꼴 보긴 싫습니다. 죽어도 제 검에 죽어야죠. 원수라면서요?”

다소 과격한 말에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지만, 취마는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보란 듯이 안주를 먹었다. 됐나? 네!

술자리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마시는데 서대룡이 전음을 보냈다.

―앞으로 겁쟁이라 놀려도 인정하겠습니다. 제 소개하는 말에 겁쟁이 추가하십시오.

참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취마가 주도하는 이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며 나서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용기를 내선 안 될 이유만 자꾸 생각나네요. 어차피 죽어 마땅한 놈 죽었는데, 이게 이렇게까지 나설 일인가 싶고. 여 무인도 명령받아서 한 일인데 싶고. 따지려면 취마에게 따져야 하는데, 그랬다간 죽을 것도 같고.

―이봐, 겁쟁이.

술잔을 내려다보던 서대룡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술잔을 내밀었다. 이럴 때 뭔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런 일, 저런 일 겪어가면서 성장하는 거지.

서대룡이 옅게 웃으며 내 잔에 건배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취마가 서대룡에게 말했다.

“자네 혈천도마의 제자지?”

“네, 맞습니다.”

혈천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그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혈천도마를 비꼬거나 서대룡을 조롱할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예상을 깨는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 느낌 좋아.”

“네?”

“무인으로서 느낌 괜찮다고. 앞으로 잘해보게.”

“아, 네.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할까 잔뜩 긴장했던 서대룡은 당황했다. 취마가 자기에게 이런 칭찬을 해줄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도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지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헤벌쭉 웃으며 술을 마시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무안한 전음이 날아들었다.

―그래요, 저 이런 놈입니다! 이제부터 사부님 다음으로 좋은 마존은 취마입니다. 저 이런 놈이라고요! 좋은 걸 어쩌라고요?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우린 또 술을 마셨다. 역시 취마와 술을 마시면 마음이 풀어진다. 서대룡은 물론이고 장호도 여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잊어선 안 된다. 취마는 농담 한마디, 손동작 하나로도 술자리 분위기를 바꿀 줄 아는 사람이고, 우린 그 술자리에 있음을. 그는 술로 자신의 역사를 이뤄온 사람임을 잊어선 안 된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가장 분위기가 좋았을 때, 취마가 내게 물었다.

“자, 어떤가? 우리 이제 호형호제 할 텐가?”

그의 말에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나와 취마를 향했다. 마존이 천마의 혈육에게 호형호제하자는 제안은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취마,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내게 이러는 거요. 술이 깨면 사라질 허망한 술꾼의 진심이오? 아니면 철저하게 계산된 계획이오?

그때 흥청거리던 주점이 조용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누군가 주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올지는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사람, 차가운 기운을 풀풀 풍기며 대도를 차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혈천도마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 층으로 올라온 혈천도마가 나와 취마 사이에 앉으며 말했다.

“나도 술 한 잔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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