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36화 (136/214)

제136회 제가 보기보다 정 없는 사람이라서.

다음 날 십 일간의 기한을 두고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황천각 업무는 서대룡에게 맡겼고, 마존들 일은 잊었다.

이번 수련은 긴급 수련이었다.

모든 일에는 계기가 있고 시기가 있다. 비무를 할 때도 이때다 싶으면 승부를 걸어야 하듯, 수련에도 때가 있다.

나의 계기는 아직은 생생한 아버지와의 비무였다. 이 비무가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전에 내 것으로 녹여내야 했다.

마존들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날 취마가 날 찾아왔을 수도 있고, 마존들끼리 싸움이 날 수도 있다. 어차피 내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에만 몰두했다.

무아지경으로 싸웠던 풍류주점에서의 비무를 나는 그대로 복기했다.

나는 아버지와의 비무를 작은 동작 하나까지 그대로 재현했다. 내가 이렇게 움직였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움직이셨고. 또 내가 저렇게 공격했을 때 아버지는 저렇게 막으셨고. 아버지의 움직임과 나의 움직임을 비교하고 분석했다.

이번 비무는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내 스스로 한계를 짓지 않고 싸웠던 점이나, 그 긴박한 와중에도 사물을 건드리지 않아야 하는 큰 제약도 그랬다.

그래서 느낀 바가 컸고, 배울 점이 많았다.

몸을 고되게 하는 수련이 아니라 깊은 사색과 성찰을 하는 수련이었다. 오직 무공에 관해서만 생각했고, 난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빠져들었다.

열흘 후, 난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모습으로 수련장을 나왔다.

그 순간 확 풍겨오는 술 냄새에 설마 했는데, 뒤에서 그 설마가 내게 말했다.

“대체 누굴 죽이려고 그렇게 열심인가? 난가? 아니지?”

놀랍게도 취마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왜 여기 계십니까?”

“왜겠나? 자네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지. 풍류주점에서 술 마신 다음 날 찾아갔더니 자네가 열흘간 폐관 수련에 들었다더군. 그 말 듣고 당장에 달려왔지.”

“설마 여기서 계속 기다리셨단 말씀입니까?”

“그럼! 첫날부터 기다렸다네.”

그를 빤히 쳐다본 후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이시네요. 여 무인에게 말했겠죠. 열흘 후, 이공자 폐관 끝나면 알려줘. 그래 놓고 신나게 술 마시고 노셨죠? 오늘은 언제 오셨습니까? 좀 전에 오셨죠?”

“음. 여빈이 자네 쪽으로 돌아섰나?”

그의 솔직한 고백에 나는 웃고 말았다.

취마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한데 나 귀찮아서 폐관에 든 건 아니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취마님과 술 마시고 노는 것 즐겁습니다. 오히려 너무 즐거워서 문제죠.”

“자네가 폐관에 들었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네. 백 일 폐관에 들었으면 나는 망부석이 되고 말았을 거네.”

“다른 술친구 없으십니까?”

“누구?”

“검존님하고 마시면 되죠.”

“그날 소마 그자에게 그런 수모를 겪었는데, 누굴 만나서 술 마시고 싶겠는가? 화를 삭일 시간은 줘야지.”

어디 그래서겠는가? 이렇게 수련장 앞까지 와서 기다리는 사람인데. 지금은 검존보다는 내게 흥미가 동해있어서 그녀가 눈에 안 들어오는 걸 거다.

“이럴 때일수록 친구가 필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친구니까 피해 주는 거지.”

그 또한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는 없었다.

“자, 우리 술 마시러 가세.”

“저와 술 마시는 것이 그렇게 좋습니까?”

“두 번 술 마신 정도로는 호형호제하지 않는다면서?”

풍류주점에서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게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다.

“한 이백 번 정도 마시면 해주지 않겠나?”

“이백 번이나 함께 술잔을 기울인 사이라면 어차피 호칭은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니, 중요하네. 이백 번이나 술을 마셨는데 호형호제도 못 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관계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내가 같이 차 마시자면 다섯 번도 못 채우겠지만, 술 마시는 일이라면 이백 번 채울 수 있네.”

“이렇게까지 해서 저와 호형호제하려는 이유는 뭡니까?”

그러자 뜻밖의 이유가 나왔다.

“간단하지. 자네가 천마가 될 가능성이 지금으로선 반반이지? 절반의 확률로 천마를 동생으로 둘 기회 아닌가?”

“한 가지 큰 착각을 하시는군요.”

“무슨 착각?”

“제가 천마가 되면 형 대접 안 하죠. 이백 번 술자리도 그 순간 다 사라지는 겁니다.”

“겉으로야 그렇겠지만?”

“마음으로도 안 합니다. 뒤로도 안 하고요. 오히려 그런 오해 받을까 봐, 더 엄격하게 취마님을 대할지도 모릅니다.”

취마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자네가 천마가 되더라도 허심탄회한 모습을 보일 줄 알았네. 격식을 깨고 마존들과 형제처럼 지낼 줄 알았네.”

“그건 저에 관한 선입견이겠네요. 제가 보기보다 냉정하고 정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거 감추려고 더 정 있는 척하는 걸지도 모르고요. 제가 천마가 되면 공사 구분 칼같이 할 겁니다. 만약 제게서 얼렁뚱땅 호형호제하겠지 기대하셨다면, 남은 백구십여덟 번의 술자리는 형과 하는 게 더 나은 투자일 겁니다.”

그러자 취마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 형은 교주가 되면 안 돼.”

“왜요?”

“한잔하면서 알려주겠네.”

취마는 발걸음을 서둘러 걸어갔다.

나는 취마와 반대쪽으로 걸었다.

저만치 가던 취마가 날 쫓아왔다.

“이 사람, 너무하는구먼. 이공자, 안 궁금한가?”

“전혀요.”

“자네 형이 교주가 되면 안 되는 이유인데?”

“네.”

“대체 왜?”

이번에는 내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왜 안 궁금한지 궁금하시죠?”

“그렇네.”

“취마님 궁금해하라고 안 궁금한 척한 겁니다. 취마님도 마찬가지겠죠. 괜히 궁금하게 해서 저와 술 마시려고 별 이유도 없는데 저를 낚으려 하시는 거 아닙니까?”

“사람이 너무 똑똑해도 인간미가 떨어져!”

“제가 정 없는 사람이라 이미 말씀드렸고요.”

성큼성큼 걸어가는 나를 취마가 집요하게 따라왔다.

“열흘이나 기다렸네. 이공자, 정말 이러긴가?”

그래, 이 정도 노력이라면 인정해야겠지.

“제가 졌습니다. 일단 씻고 좀 쉬었다가 저녁에 대취림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제야 취마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기다리고 있겠네. 꼭 와야 해.”

“대신 꼭 말해줘야 합니다. 형이 교주가 되면 안 되는 이유요.”

“안 궁금하다면서?”

“그럴 리가요? 그럼 이따 뵙죠.”

난 거처로 돌아와 수염을 깎고 몸을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동경 앞에 섰다.

열흘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또 달라져 있었다.

지난 폐관으로 나는 풍신사보를 새 경지로 끌어 올렸다.

풍신사보 팔성.

폐관에 들면서 나는 성과를 예상했었다.

비천검법을 십이성 대성했고, 만사종주가 남긴 글귀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백망기와 대결을 벌였으며, 이후 꿈속에서의 제삼자의 눈으로 그 싸움을 다시 살펴본 특이한 경험도 있었다.

거기에 아버지와의 비무가 결정적이었다. 마치 이런 결과를 예상이라도 하셨는지 아버지는 비무 내내 보법은 풍신사보로 나를 상대하셨다.

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어떻게든 구화마공을 전수받기 전에는 풍신사보의 대성을 이뤄야 한다는 절박함까지.

그 결과 풍신사보 팔성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풍신사보가 팔성의 경지가 오르자 가장 큰 변화는 쾌속보로 어딘가를 달려가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 것이다.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 당장 연무장이라도 달리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제대로 그 욕망을 해소해줘야지, 그 정도로는 안 될 일이다.

우선은 침상에 누워 잤다. 기분이 좋아서였을까?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밀린 잠을 푹 잤다.

* * *

그날 저녁 술을 한 병 사서 대취림을 찾아갔을 때, 취마는 나룻배에 누워 호수를 떠다니고 있었다.

여빈이 내어준 나룻배를 타고 천천히 취마가 타고 있는 나룻배로 다가갔다.

그의 배에는 아무것도 없고 술병들만 있었다.

“역시! 내가 안 보는 곳에서는 안주를 드시지 않으시는군요.”

“매일 나와 마셔주면 매일 안주를 먹겠지. 자, 한잔 받게.”

“저는 제가 가져온 술을 마시겠습니다.”

취마가 좋은 것 중 하나가 술에 관해선 강요가 없다는 점이다. 무슨 술을 마시든, 술을 입만 대고 내려놓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이 취하기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취마야말로 진정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전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이 호수 정말 좋습니다.”

“대취림에는 이보다 더 멋진 곳도 있다네. 다음에 데려가 주지.”

“정말 우리에게 다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없다고 생각하나?”

나는 대답 대신 술을 마셨다.

“그래, 무슨 말인지 내가 알지. 혈천도마가 나를 원체 싫어하니.”

그도 술을 마셨다.

“하긴. 그가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인가? 정말 혈천도마를 얻고 셋을 잃을 작정인가? 너무 손해 보는 장사 아닌가? 그 사람, 조건만 맞으면 언제라도 대공자에게 갈 사람인데.”

취마가 슬슬 이간질을 시작하며 혈천도마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날 말씀드렸잖습니까? 세 분 다 얻을 거라고요. 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네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결국 대공자가 후계자가 될 거네. 천마가 될 후계자는 단지 무공이 더 뛰어나고, 더 똑똑하고. 이런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네.”

“그럼 무엇으로 결정됩니까?”

“생각해 보게. 후계자를 뽑는 일은 천하제일마검을 뽑는 일이 아니네. 본교를 잘 이끌 사람을 뽑는 거지. 양보할 것 양보하고 팔마존과 잘 화합하는 그런 교주 말이야. 그렇지 못하면 본교는 분열될 테고, 결국 무림맹에게 잡아먹히고 말겠지. 왜 그런 눈으로 보나?”

“저는 취마님이 이렇게 이성적으로 본교의 미래를 생각하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오해와 선입견의 대표적인 희생양이지.”

“그게 싫으시면 술을 끊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술 끊은 취마? 온 무림이 나를 비웃겠군.”

그러면서 취마가 술을 마셨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됩니까? 전부터 여쭤보고 싶었었는데.”

“뭔가?”

잠시 사이를 두고 그에게 물었다.

“취마님은 잊으려고 마시는 겁니까? 잊지 않으려고 마시는 겁니까?”

“……!”

순간 흠칫했던 취마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둘 다 아니라는 대답을 했다.

“즐기려고. 그냥 술이 좋아서 마시는 거라네. 술 자체가 좋아서. 사연이 있어 마시겠거니, 그 또한 선입견이라네.”

그러면서 취마가 또 술을 마셨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둘러댄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술을 마시고 있는 한, 그에게서 진실을 보기는 쉽지 않았으니까.

나도 가져온 술을 마셨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꾸 술을 마시게 된다. 내가 한창 술을 마셔댈 때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잊기 위해서 마셨던 것일까? 잊지 않으려고 마셨을까?

“그렇다면 형을 후계자로 지지하시면 되잖습니까? 형은 저처럼 도마 어르신과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도 안 할 테고.”

그러자 취마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대공자는 후계자가 되어선 안 되네.”

수련장 앞에서 꺼낸 말을 또 꺼냈다. 자신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단지 술자리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이유로 이 사람이 내게 접근한 것일까? 호형호제하자면서.

“대공자는…… 교주를 너무 좋아하거든.”

“……!”

취마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저도 아버지를 좋아합니다만.”

“자네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아하네.”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진짜 마음으로 좋아서인지,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서인지, 아니면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아버지 말이라면 뭐든 할 형이었으니까.

“자네가 대공자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후계자가 될 거라고 확신하진 못하겠네.”

역시 인정한다. 아버지는 오늘 나와 비무를 하고선 내일이 되어서 후계자는 네 형이다, 무뚝뚝하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 분이셨으니까.

“좋습니다. 그렇다고 치고. 형이 아버지를 좋아하는 게 왜 후계자가 되어선 안 될 이유입니까?”

“대공자는 교주의 뜻을 거역하지 못할 테니까.”

“어떤 뜻요?”

또다시 취마에게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무림일통의 의지.”

취마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무림일통의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전에 풍천교주와 관련해서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나는 그때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꿈꾸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아버지의 야망을 취마가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취마 뿐만 아니라 다른 마존들 중 누군가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존들은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일체 언급을 삼갔으니까.

“대공자는 후계자가 되어 아버지의 명을 충실히 따를 것이네. 틀림없이 선봉장이 되어 무림 정벌에 나서겠지. 하지만 자네라면? 교주를 말리겠지. 지금껏 내가 봐온 자네는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맞습니다. 저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후계자가 되어 교주를 말려야 하네.”

취마가 이런 이유로 나를 선택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막기 위해 나를 택한 것이라고? 만날 취해 있는 이 취마가? 팔마존 중 가장 아무 생각 없을 것 같은 이 사람이?

나는 취마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왜 이러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내 말은 다 진실이네.”

“만날 술만 마시는 취마님이 무림의 평화 때문에 저를 선택하셨다고요? 이걸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내 마지막 선입견이라고 하세.”

취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취마는 고백하듯 진실을 밝혔다.

“그것이 바로 대공자에게 깨진 술병을 보낸 이유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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