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회 비겁한 술꾼에게 응징을!
취마는 인사불성인 채 자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내가 온 줄도 몰랐다.
“취마님, 취마님!”
내가 몇 번이나 그를 불러도 깨어나지 않았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주정뱅이다.
나는 취마를 번쩍 들어서 호수에다 내던져 버렸다.
풍덩!
물에 빠진 취마는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내가 못 산다, 못 살아!”
나도 호수로 뛰어들었다.
취마가 저 호수 아래에 시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를 데리고 다시 물 위로 올라왔다.
“정신 차리세요!”
눈을 뜬 취마가 그제야 날 알아보았다.
“이공자?”
나는 먼저 배 위로 올라갔다. 취마는 올라오지 않고 물 위에 둥둥 떠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 올라오십니까?”
“여기 있을 거네.”
“반항하는 청춘입니까? 정말 못 봐주겠네요. 얼굴이라도 잘 생겨서 그나마 봐주지.”
“내 잘생긴 얼굴 그만 보고 거기 술이나 좀 주게.”
“이제 물에 누워서 술 마시는 신기도 보여주시게요? 취마의 몇 번째 무공입니까?”
내가 술을 안 주자 취마가 손을 내밀었다. 나룻배에 있던 술이 허공섭물로 날아갔다. 그가 누운 채로 술을 마셨다.
“소문 사실이죠?”
취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대답하기 싫다는 듯, 취마가 누운 채로 헤엄쳐 배에서 멀어졌다.
노를 저어서 그에게 따라붙었다.
“화해하라고 했더니 결투를 한다고요? 이건 저하고 싸우자는 거잖아요? 나오십시오, 저랑 붙읍시다.”
“나 때문이 아니네. 그 늙은이 때문이지. 내가 선물로 준 술, 버렸더군. 그것도 보란 듯이 앞마당에다.”
냄새에 민감한 취마가 술이 버려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그래 놓고 그 늙은이가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취마가 몸을 일으켰다. 다 마신 술병을 눕혀서 그 위에 앉았다. 술병도, 취마도 가라앉지 않았다.
“술 취해서 현실도피하고 사니까 좋냐고 그러더군. 마존들 중에 내가 제일 한심하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술도 안 취했는데 현실도피하고 사는 선배도 있지 않냐고. 누가 더 한심하냐고 했지.”
“애들도 아니고 두 분이 똑같습니다. 어찌나 어른스러우신지.”
“저쪽이 먼저 했다고!”
“그래서요?”
“난 그쯤 끝내려고 했지. 근데 딱 비교질을 하더라고.”
“극악소마와 했군요.”
취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혈천도마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넌 가면쟁이보다 못하다. 가면쟁이는 얼굴만 감추지 마음까지 감추진 않거든.”
흉내도 곧잘 내서 얼핏 눈감고 들으면 정말 혈천도마가 눈앞에서 말한 것처럼 들렸다.
“어디서 비교질이냐고! 그것도 극악소마 따위와! 정말 술 뚜껑 열릴 뻔했지.”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열받아서 받아쳤지. 여자 하나 때문에 평생 마음고생하는 소심한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고.”
나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린을 건드린 것이 아니라 아예 잡아 뜯었군요.”
“그 늙은이는 용 비늘이고, 난 무슨 물고기 비늘인가? 저쪽이 먼저 건드렸다고!”
풍덩, 하고 취마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닥끝까지 내려갔는지 한참 있다가 올라왔다.
물 밖으로 고개만 내민 그에게 내가 물었다.
“그냥 가서 잘못했다고 사과하십시오. 욕하면 꾹 참고 듣고 오십시오. 사과까지 하는데 싸우자고는 안 할 겁니다.”
“싫어. 사과를 해도 그쪽에서 해야지.”
“그럼 싸워야죠.”
“그것도 싫어!”
“그럼 어쩌자고요?”
“나도 몰라.”
다시 취마가 헤엄을 치며 멀어졌다. 나는 그를 쫓지 않고 반대쪽으로 노를 저었다. 그러자 취마가 헤엄쳐 나를 쫓아왔다.
“내가 도마와 싸우지 않으려는 것은 자네 때문이야.”
“저 때문이라고요?”
그러자 그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나와 싸우면 자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도마는 죽으니까.”
진지한 표정의 그를 두고 더 빠르게 노를 저었다.
“술 취한 사람 말은 안 믿습니다.”
뒤에서 취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는다니까!”
“알았으니까 술 깨서 기다리세요, 도마 어르신께 다녀올 테니까. 그때도 술 취해 있으면 저한테 죽습니다!”
대취림에서 나온 나는 곧장 혈천도마를 찾아갔다.
혈천도마는 오늘도 수련 중이었다. 평소보다 더 거칠고 과격한 초식을 구사하고 있었다. 분위기만 봐선 결전전야(決戰前夜)였다.
“주정뱅이 하나 잡으려고 뭘 이렇게 수련 중이십니까?”
혈천도마가 도를 거두고 마당에 있는 바위에 앉았다. 그는 온몸에 땀에 젖어 있었다.
“마존들끼리 싸우지 말자는 불문율을 깨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일도 없네.”
“제재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한데 왜 불문율이 깨지지 않는 겁니까?”
“누군가 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싸우다 죽을 확률도 높고 설령 상대에게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 쪽은 마존으로서 생명이 끝나는 거지. 다른 마존에게 진 사람을 누가 수장으로 따르겠는가?”
“그걸 아시면서 결투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왜? 내가 마존 자리에서 쫓겨날까 봐 걱정되나?”
“평생 마존으로 사셨는데, 평범한 마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내가 그 음흉한 놈 때문에 마존 자리를 걸 만큼 어리석은 사람 같나?”
“그런데 왜 싸우려는 겁니까?”
“자네를 위해서라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나를 위해서란 말을 하고 있었다. 한쪽은 나를 위해서 안 싸운다고 하고, 한쪽은 나를 위해서 싸운다고 하고.
“그자가 갑자기 내게 친절하게 구는 거야 당연히 자네 때문에 그런 걸 테고. 자네가 화해하라고 시켰겠지? 알고서 일부러 그자를 자극했네.”
“취마가 검존 선배를 입에 담았다고 하던데요?”
“그게 뭐 대수라고. 다들 검존이 내 대단한 약점이라도 되는 줄 아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네. 오히려 이 나이쯤 되면 약점을 이용하기도 하지.”
“화나서 붙자고 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붙자고 하셨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이 대결을 자네가 이용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네. 이렇게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자네가 개입할 테고. 아무래도 자네가 그를 이용하기 쉽지 않겠나?”
“거기까지 생각하신 겁니까?”
“내가 잘못 판단했나?”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이번 일 만큼은 자네 뜻을 따르겠네. 자네가 싸우라면 싸우고. 싸우지 말라면 말고. 이 싸움은 내 싸움이 아니라 자네 싸움이니까.”
혈천도마는 이번 일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애초에 화해를 시키려 한 것도 나고, 지금 중재를 하려는 사람도 나다. 결국 이번 문제는 나와 취마의 문제임을 도마는 애초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내가 이렇게 찾아올 것까지 예상했으리라.
“내가 그자와 화해하길 바라진 말게. 대신 자네에게 그자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하겠네. 다른 사람이었다면 끝까지 말렸겠지만, 자네라면 그 음흉한 놈까지도 안고 갈 수도 있겠지. 취마가 아니라 자넬 믿기로 했네. 그러니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놈을 휘어잡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싸움도 져서는 안 되겠구나. 이런 사람이 날 위해 옆에 있는데 어찌 진단 말인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이 떠올라, 그냥 다 삼켰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뒤에서 혈천도마가 나직이 말했다.
“지어준 보약값은 해야지.”
보약이 아니라 영약값을 하고 계십니다.
* * *
“죽기는 싫으셨나 보네요.”
취마는 그 사이 술도 깼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채 취몽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늙은이가 뭐라던가? 자네야 그 늙은이 편을 들겠지만.”
“도마 어르신이 뭐라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 왜? 또 나 욕했어? 그랬지?”
“이 일은 저와 취마님과의 일이니까요. 제가 도마 어르신과 화해하란 부탁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습니까?”
“나는 노력했네.”
“이번 일을 계기로 확실히 느꼈습니다. 두 분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요. 어디까지나 이 문제는 저와 취마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우리 둘이 풀어야죠.”
“자네와는 어떻게 풀자고?”
나는 가져온 술병을 앞에 내려놓았다.
취마가 놀라서 물었다.
“술로 풀자고?”
“죽을 때까지 마셔봅시다. 안주는 무슨 안줍니까?”
멍하니 날 바라보던 취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만난 이후 가장 호탕한 웃음이었다.
“좋아, 이거지. 내가 이래서 이공자를 좋아한다니까!”
취마가 여빈을 불렀다.
“술 가져와라. 내가 아껴둔 술 전부 다 가져와라!”
나는 취마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일전에 처음으로 아버지와의 비무에서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고 싸웠다.
지금 이 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술을 마셨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마셨다. 낭인 시절 술에 빠져 지내던 그때로 돌아갔다.
“이렇게 잘 마시는데. 그동안 어찌 참았나?”
“본교에 취마가 둘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 말에 취마가 껄껄 웃었다. 내가 작정하고 술을 마시자 취마는 기분이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이 누각에서 마시는 술은 나룻배에서와는 또 다른 흥취가 있었다.
취마는 젊은 시절 여자들 만나고 다닌 이야기부터 다른 마존들 험담까지, 온갖 이야기를 다 했다.
나도 어린 시절 형이 괴롭혔던 이야기부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우린 점점 취해갔다.
호기롭게 마시긴 했지만 내 주량이 취마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심지어 취마는 나보다 술을 두 배는 더 마셨다.
“아, 이제 알겠군요. 왜 취마님이 저길 뛰어드는지.”
나도 호수로 뛰어들었다. 한 바퀴 헤엄을 치고 나오니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저 호수가 내 안주라네.”
“저는 이제부터 천천히 마시겠습니다.”
“그만 마시게. 지금도 많이 마셨네.”
“그거 아십니까? 취마님은 억지로 술 권하지 않는 것이 제일 멋있습니다.”
“겨우 그게 제일 멋 있으면 어쩌나?”
“겨우라니요? 그게 얼마나 멋있는 건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취마가 그래서 진짜 멋진 거죠. 아, 취한다.”
나는 벌러덩 누웠다.
취마는 나의 무례에도 야단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술을 마셨고, 나는 누워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누군가는 못 견딜 수도 있는 자리였다. 취마는 자기 자랑을 엄청나게 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 자랑이 그렇게 거슬리지 않았다. 솔직히 재미있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 내가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 팔씨름 한 번 할까요?”
“팔씨름을? 내공 쓰고?”
“당연히 안 쓰고지요. 남자대 남자의 대결, 어떻습니까?”
“좋네. 대신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내기하세.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고작 팔씨름에 소원씩이나요?”
“이런 게 진짜 승부지. 우리 교주와 무림맹주, 사도맹주 셋이 모여 승부를 겨루는 거지. 무림의 운명을 건 팔씨름 한판! 무림인들은 이런 걸 더 재미있어할걸?”
“좋습니다. 그럼 물에 한 번 들어갔다 오십시오, 나중에 취해서 졌다, 핑계 대지 마시고요.”
“괜찮아. 자네쯤이야!”
그렇게 술상 위를 치우고 우린 팔씨름을 했다. 그가 젊은 내 힘을 어찌 이기겠는가? 그렇게 팔을 넘기는데, 취마가 은밀히 내력을 쓰는 것이 느껴졌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요 술꾼놈!”
나도 내공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취마가 본격적으로 내공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껏 그가 마셨던 모든 술이 내공이라도 된 것일까? 생각 밖으로 그의 내공은 강맹했다. 혈천도마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 허풍만은 아님을 알 수 있는 내공이었다.
하지만 내 내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오늘 난 주량도 감추지 않았고, 내공도 감추지 않았다.
꽝!
술상이 부서지며 승부가 났다.
“비겁한 술꾼에게 응징을! 제가 이겼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아이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이건 무효네. 시작할 때 자네가 먼저 힘을 줬어! 나는 술을 더 많이 마셨잖아? 내 물에 들어갔다 나올 테니, 정식으로 한 판 하세!”
내공을 먼저 사용한 그의 억지가 통할 리 없었다.
나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난간에 기대섰다.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노을은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잠시 그 광경을 쳐다보다 취마에게 내 속마음을 전했다. 그를 보면서는 못 할 말이었기에 붉게 물든 호수를 보며 말했다.
“다들 취마님이 음흉하고 수상하다고 하지만 저는 취마님과의 술자리가 좋았습니다.”
“!”
“왜 그런 사람 있잖습니까? 남들은 다 별로라고 하는데 나는 좋은 사람요. 취마님이 제게 그런 사람입니다. 잘난 척하는 것도 좋고, 허풍 떠는 것도 좋고, 한 번씩 보이는 공허한 눈빛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초조하기도 했죠. 내게 접근한 의도가 대체 뭘까? 솔직히 말하자면 불순한 의도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들 비밀이 없고, 누군들 이기적인 계획이 없을까? 다 괜찮다고 생각했죠. 다만 이것만은 바랐습니다. 제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어라. 제발 술친구가 될 수 없는 일은 아니어라.”
내가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느낀 취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 이공자 주사가 심각해. 취하니까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네.”
비로소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
내 말에 취마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정말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오늘부터 호형호제하시죠. 이게 제 소원입니다.”
“자네가 이겼는데 왜?”
“저도 원하는 바였으니까요.”
생각지 못했던 감동이 주는 놀람과 격정이 있다. 취마의 표정에 그 모든 것이 담겼다.
“자넨…… 정말 미친놈이 틀림없네.”
“그 소리 취마님에게, 아니 형님에게도 듣는군요. 마존들에게 다 듣는 걸 보니 그럼 정말 미친놈이 맞나 봅니다.”
“그 광기가 은근해서 더 무서워.”
취마가 자세를 고쳐 앉더니 술잔을 가져와서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아우님, 한잔 받으시게.”
“네, 형님.”
나는 그가 준 술을 마셨다.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도 술을 마셨다.
“너무 감동하진 마십시오. 마음이 끌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제가 후계자가 되기 위해 형님이 꼭 필요해서 이러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절반만 순수한 마음입니다. 나머지 반은 뭐, 술로 채우지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괜히 어색한 마음에 먼저 일어나려 하던 그 순간 취마가 불쑥 말했다.
“나 때문이네.”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도마와 검존의 사이가 나빠진 것은 나 때문이네.”
깜짝 놀란 나를 바라보며 취마가 더 놀라운 사실을 고백했다.
“내가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