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40화 (140/214)

제140회 어리석은 짐승의 시절에.

취마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노을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수치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술을 더 마셔야겠군요.”

일어서려던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의 사이가 나빠진 이유에 대해 알고 있다. 두 사람이 한때 남녀로 좋아했다가 좋지 못하게 헤어졌다는 것을. 한데 그 이별에 취마가 끼어있을 줄은 몰랐다.

“예전부터 나는 검존과 가끔 술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던 사이였네. 어느 날 검존이 내게 묻더군. 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고? 왜 묻냐고 했지. 도마가 그림을 그려줬다는 거야. 어떤 그림이냐고 보자고 했네. 그림은 검존을 그린 미인도였네. 실물보다 더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지. 아, 도마가 검존을 좋아하는구나. 딱 감이 왔었네.”

젊은 시절의 그들이다. 여자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혈천도마라니! 정말 상상이 안 되는 모습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이후 도마는 자꾸 검존에게 호감을 표하길 시작했네. 차를 마시자고도 하고, 산책도 하고. 검존은 도마와 만나고 온 이야기를 내게 다 해줬지.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아나?”

“나빴습니까?”

“아주 많이.”

“취마님도 검존을 좋아하고 계셨던 겁니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네. 도마가 검존을 좋아하니까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지. 그때까진 검존이 교주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지. 교주는 순수하게 존경했었던 거였고.”

취마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그는 멍하니 술잔을 응시하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

“어느 날 술을 마시다가 검존에게 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감정을 은근히 내비쳤네. 한데…….”

취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대신 말했다.

“거절당했군요.”

취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마에게 마음이 간다고 하더군.”

갑자기 취마가 버럭 소리쳤다.

“말이 돼? 말이 되냐고? 그 삐쩍 마르고 못생긴 도마를, 심지어 우리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는데! 난 분해서 한숨도 자지 못했네. 좀 더 신중하게 고백하지 못한 내 자신에게 화가 났고, 거절당하는 순간 당황하던 모습을 들킨 것에 더 화가 났지.”

취마는 감추지 않고 당시의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해주었다.

“이런 생각이 나를 괴롭혔네. 사실 검존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도마가 좋다니까 괜히 남 주기 싫은 마음이 발동해서 고백까지 한 것은 아닐까? 병신이 거절당하니까 이런 핑계까지 대는구나!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네.”

지금의 이 음흉한 취마를 생각하면 참 상상이 안 되는 순수한 모습이었다.

“그때 나이는 본능이 이끄는 어리석은 짐승의 시절 아닙니까?”

“자넨 아니잖아?”

저도 그랬습니다.

“젠장! 그때 생각만 하면 죽을 정도로 부끄럽고 짜증이 나!”

취마가 벌떡 일어나서 누각을 왔다 갔다 서성였다. 그러다 난간에 기대어 이제는 어두워진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날부터 내 마음은 삐뚤어졌네.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어떻게든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고 싶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도마에 대한 검존의 호감은 점점 커지고만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네.”

취마가 누각 기둥에 붙어 있는 등불에 불을 붙였다. 화를 내다가, 말을 하다가, 서성이다가, 불을 붙이다가. 취마의 복잡한 마음이 행동에서 전해져 온다. 등불이 켜지자 주위가 밝아졌다.

“기루 복도를 걸어가는데 도마의 목소리를 들었네. 그는 남도종 무인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지. 검존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지, 남도종 무인들이 검존에 대해 묻고 있더군. 얼마나 좋아하냐, 입맞춤은 했냐? 잤냐? 으레 친구들이 모이면 하는 말들인데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네. 이 새끼들이!”

취마가 술을 비웠다. 나도 함께 마셨다. 분위기 때문인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나도 젊은 취마와 함께 그 기루의 복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그때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뒤집었어야 했는데. 개새끼들아! 닥쳐라!”

“하시지 그랬습니까?”

“저 문을 부수는 순간 내 인생도 끝장날 것 같았거든.”

지금의 우린 안다. 그래 봤자 별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나고 보면 싸우고 지랄했던 하루로 기억될 뿐인데.

“다음 날 검존을 만났을 때 어제 일을 말했네. 사실 도마를 어제 기루에서 만났다고.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기분이 나빴을 텐데 없던 말까지 전했지. 도마가 했던 말이 아니라 함께 있던 자들이 떠들어 대던 말을 마치 도마가 한 것처럼 말이야. 도마가 너와 입맞춤하던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 그 말을 하면서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던 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 내가 이런 치사한 짓을 한다고? 내가 고작 이런 놈이라고? 심장은 뛰고머릿속은 자책했지만, 내 입은 ‘원래 남자들은 기녀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린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지. 그날 그 방에 기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일세.”

꽈드드득.

취마의 손에 누각의 난간이 뜯겨나갔다. 그의 취한 눈에서 분노와 후회가 느껴졌다. 공허하게 느껴졌던 그 눈빛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좀 지났을 때, 검존이 그러더군. 도마와 크게 싸우고 헤어졌다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싸웠네.”

“이후에도 계속 이간질했습니까?”

취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네. 한번 관계가 비틀리니까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더군. 오히려 요즘은 마음껏 이간질하네. 검존과 같이 도마 욕하는 재미로 술 마시기도 하니까.”

“두 사람에게 사과할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해봤지.”

“한데 왜 안 하셨습니까?”

“차라리 대단한 이유였다면 검존에게 사과했을지도 모르겠네. 한데 질투심에 그랬다는 말, 차마 못 하겠더군. 아니면 여전히 두 사람이 잘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거나.”

취마가 나를 쳐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나는 이렇게 옹졸하고 치사한 놈이라네.”

“알고 있습니다.”

“뭐?”

“그럼 뭐 취마님을 바르고 정직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겠습니까? 음흉하고 못됐고…….”

“그만!”

막상 또 자기 험담을 남에게 들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 모양이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깟 몇 마디 했다고 헤어질 거면 어차피 헤어질 관계잖아? 맞잖아? 기루에 간 것도 맞고, 애초에 검존 이야기를 꺼낸 것도 맞잖아? 누가 가래? 거기서 나 만나래? 젠장!”

나는 느꼈다. 오랜 세월 도마와 검존만이 싸워왔던 것은 아니었음을. 어쩌면 취마가 제일 치열하게 싸웠을지도 모른다고.

“맞습니다. 둘이 정말 사랑했다면 그 정도로 흔들리면 안 되죠. 그냥 뒀어도 다른 이유로 헤어졌을 겁니다.”

“그렇지? 맞지?”

내가 편을 들어주자 취마가 내 옆에 와서 실실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졌다고 했을 때, 하나도 기쁘지 않았네.”

이제 이유를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왜 제게 이 말씀을 해 주신 겁니까?”

“자네가 계속 묻지 않았나? 왜 자네에게 접근했는지. 얼마 전 술자리에서 검존이 그러더군. 자네가 도마와 자신을 좌우 날개로 삼고 싶어 한다고.”

“날개를 자르려고 온 겁니까? 이제는 함께 날 수 있도록 붙여주려고 온 겁니까?”

취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네. 도마와 검존이 자네를 중심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보고, 나도 뛰어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 몰랐지만.”

“다 말하고 나니 후련하십니까?”

“벌써 후회 중이네. 굳이 내 입으로 뭐하러 이딴 한심한 짓을 밝혔을까? 귀신에게 홀린 거지. 절반의 순수 어쩌고 하는 말에 홀딱 말려서는.”

그가 벌러덩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멍하니 누각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넨 날 볼 때마다 이 일이 계속 생각날 거네.”

“생각나겠죠. 어휴, 못난 우리 형.”

내 말에 취마가 웃었다. 작은 웃음이 점점 커졌다. 한바탕 시원하게 웃은 후 그가 물었다.

“두 사람에게 진실을 밝힐 건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요.”

“나는 영원히 그들에게 밝히지 않을 생각인데?”

“그러십시오.”

“정말 그렇게 할 거네.”

“하십시오.”

취마가 벌떡 일어나서 나를 쳐다보았다.

“자넨 두 사람이 화해하길 바라지 않나?”

“과연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그 두 분이 더 행복해질까요?”

“!”

“취마님에 대한 미움은 둘째치고, 두 사람은 그런 이유로 자신들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더욱 안타까워할 겁니다. 되돌릴 수 없어서 그 아쉬움은 더욱 클 테고요. 그렇다고 이제와야 두 분이 새롭게 사랑을 시작한다? 그게 될까요? 결국 세 분 모두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겁니다.”

나는 영원히 묻어야 할 진실이라 생각한다. 혈천도마가 욱해서 취마를 죽이려 들 수도 있다. 설령 취마를 죽이더라도 혈천도마 역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 사이에서 검존의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결국 취마도 자기를 좋아해서 생긴 일인데.

“딱 한 번 진실을 밝힐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지금 제게 써버렸다고 생각하십시오.”

내게 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망령처럼 붙어 있는 과거는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었으니까.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다면 오히려 두 사람을 더 잘 화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죠. 지금부터라도 혈천도마와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검존하고 술 마실 때도 험담 대신 칭찬도 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두 사람을 이어줄 계기가 뜻하지 않게 생기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날개를 달아주십시오.”

“자네가 형 해야겠다.”

“싫습니다. 우리 못난 형, 놀리려면 형이어야 재밌죠.”

취마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모든 말을 다 한 그는 속이 후련한 듯 보였다.

“한 가지 약속은 꼭 지키십시오.”

“뭔가?”

“술 줄이시고, 안주 드십시오. 기왕 이렇게 된 것, 우리 못난 형, 오래 살게 해줘야겠습니다.”

오늘을 분기점으로 취마의 운명이 바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해도 결국 술병으로 죽게 될지, 아니면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될지.

어쩌면 운명이 바뀌면서 더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어떤 죽음도 술병으로 죽는 취마의 최후보단 나을 테니까.

“형, 막잔 하자. 나는 더 못 마시겠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날 보는 그의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과연 우린 서로를 향한 이 표정을 끝까지 잘 지켜갈 수 있을까?

“아우야…… 고맙다.”

취마가 내 잔에 건배했다.

* * *

다음 날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천마전으로 들어섰을 때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대군사 사마명도 있었고, 형 검무양도 와 있었다.

아버지와 사마명에게 인사하고 나자 검무양이 내게 말했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아버지를 뵙는 자리에서 술 냄새라니?”

“어제 과음 좀 했어. 본교에서 제일 술 좋아하는 사람하고.”

일부러 취마를 언급했다. 검무양은 애써 담담하게 행동했다.

“그래, 네가 요즘 취마와 자주 어울린다는 소식은 들었다. 술 너무 마시지는 마라.”

검무양은 기분이 안 좋을 것이다. 취마가 내게 와서 문제를 일으켰으면 싶을 텐데, 둘이서 잘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럼에도 검무양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확실히 아버지 앞에서의 형은 다른 사람이 된다.

“형이 더 조심해야 하지 않아?”

“무슨 뜻이냐?”

“요즘 독왕이랑 어울린다면서? 나는 술이지만 그쪽은 독이잖아? 조심해, 형.”

아버지 앞이었지만 팽팽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나는 일부러 감추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형에게도.

취마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 감추고 감추는 감정은 결국 문제를 일으키고 마는 법이니까. 이렇게 대놓고 싸우고 신경전 벌이고. 형을 살리는 싸움을 하려면 이게 맞다. 겉으로 화를 내면 욕을 하지만 속으로 화를 내면 자객을 보내게 되니까.

아버지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사마명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사마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늘 두 분 공자분들에게 각기 다른 임무가 내려갈 겁니다.”

사마명의 손에는 두 장의 붉은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후계자를 결정짓기 위한 본격적인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공평을 기하기 위해서 두 분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십시오.”

그 봉투를 보는 순간 마음이 격동했다.

회귀 전, 오늘이 떠올랐다. 우리에게 주어진 두 개의 임무.

형은 성공했고, 나는 실패했다.

나는 이 임무를 망치면서 후계자 자리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형은 이번에도 내게 먼저 고를 기회를 줬다.

“먼저 골라라. 나중에 잘못 골랐다고 후회하지 말고.”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두 봉투 중 하나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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