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44화 (144/214)

제144회 가면을 써도 더 잘 생겼소.

“저놈이오! 바로 저놈이오!”

추생이 소리쳤다. 백색 가면을 보자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달아나시오! 아니, 우리 달아나야 하오!”

내가 가만히 있는 모습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추생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당신이라도 저 사람 못 당해! 어서 달아납시다.”

그래도 내가 가만히 있자 추생이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뽑았다.

“젠장! 합공합시다!”

“역시 당신은 정파가 어울리는 사람이오.”

“미쳤소? 지금 상황에 무슨 헛소리요!”

그의 부친이 왜 사람을 믿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달아나지 않고 내 안위를 챙기는 사람이었다.

어느새 백색 가면을 쓴 남자는 우리 자리까지 다가왔다.

백색 가면 남자가 가만히 우릴 쳐다보았다.

추생은 몸을 덜덜 떨었다. 복수를 다짐한 그였지만 막상 상대를 보니까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장내를 흐르는 무거운 침묵을 깬 사람은 나였다.

“왜 전에는 이런 위험한 세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놀랍게도 그는 진짜 극악소마였다.

처음에 그를 딱 봤을 때 나는 당연히 월풍문에 왔던 가짜 극악소마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진짜 극악소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직 극악소마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도였으니까.

“대체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이공자는 왜 여기 있습니까?”

우리 대화에 추생이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진짜가 온 건지, 아니면 내가 가짜와 한패였는지.

내가 추생에게 물었다.

“자세히 보시오. 그때 왔던 그 사람이오?”

추생이 떨면서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소리쳤다.

“아! 다르오. 확실히 다릅니다. 그자보다 얼굴이 더 잘 생겼소!”

“가면을 썼는데요?”

“맞소. 확실히 더 잘 생겼소.”

나는 웃으며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소마님 가면을 꿰뚫어 보나 봅니다.”

“아니면 내 가면이 더 잘 생겼던지요.”

나는 추생이 한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아무나 가면을 쓴다고 극악소마의 이 느낌을 줄 수는 없다.

기도와 느낌, 분위기. 극악소마만의 어떤 독특한 느낌이 있다. 그걸 추생은 잘 생겼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분이 진짜 극악소마시군요.”

“내가 말하지 않았소? 그놈은 가짜라고. 자, 인사하시오. 본교 마존이신 극악소마님이시오.”

추생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충격과 두려움으로 나와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추생이 놀랄 일은 지금부터였다.

“출교하기 전에 악인곡으로 찾아뵈었는데, 먼저 나가셨더군요.”

“나를 흉내 내고 다니는 작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려서요.”

극악소마 성격에 그런 자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한데 여긴 제가 올 줄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이공자가 오는 줄 몰랐습니다.”

극악소마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오늘, 이 자리는 은원전을 받으러 왔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오히려 추생보다 내가 더 놀랐다.

“은원전의 주인이 소마님이시라고요?”

극악소마가 손을 펼치자 손바닥에 반으로 잘린 동전에 놓여 있었다.

그 모습에 추생이 목에 걸린 목걸이를 꺼내는 순간.

“어? 어어?”

목걸이 끝에 달린 동전과 허공에 뜬 추생이 주르륵 끌려갔다. 극악소마가 허공섭물로 그를 잡아당긴 것이다.

극악소마의 손바닥에 있던 동전 역시 떠올라서 목걸이에 매달려 있던 동전과 허공에서 만났다. 동전은 정확히 합쳐졌다.

극악소마 앞까지 끌려간 추생은 충격에 휩싸여 합쳐진 은원전과 극악소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기 아버지가 구한 사람이 극악소마였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툭, 극악소마가 무심한 손길로 목걸이 줄을 끊어 나머지 반쪽의 은원전을 회수했다.

넋이 나간 추생 대신 내가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은원전의 주인이 소마님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극악소마에게 이렇게 은원이 분명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또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었고.

“소마님을 뵌 것은 반갑고 좋은 일인데, 오늘 이 자리는 함정 같습니다.”

과연 극악소마가 나타나기 전부터 손님은 모두 나가고 없었고, 주인장마저 사라지고 난 후였다. 객잔 앞을 지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자가 소마님으로 위장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닌 것 같고요.”

단지 가면을 쓴 인물이라서 극악소마를 행세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극악소마를 노리고 저지른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천명회가 극악소마를 노렸다는 의미인데?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극악소마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한 명만 있겠습니까? 방금 떠올린 사람만 한 오십 명쯤 됩니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극악소마도 따라 웃었다. 추생은 여전히 이 상황이 놀랍고 적응이 안 되는지 말없이 우리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혹시 소마님 말고도 혈앙지를 사용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

순간 극악소마가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가짜가 월풍문의 벽에 남긴 흔적이 소마님의 혈앙지와 흡사했습니다. 거의 소마님이 남겼다고 해도 될 만큼 고절한 수법이었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극악소마가 대답했다.

“또 있습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특별히 나였기에 저 대답을 해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맞을 적이 보통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내 말에 극악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분명 배후가 누군지 짐작하는 눈치였다.

우리 대화가 잠시 멈추자 추생이 내게 물었다.

“한데 당신을 이공자라고 칭하던데, 설마 아니지요?”

나는 그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로 되물었다.

“아니면 세상에 누가 있어 이렇게 젊은 나이에 마존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겠소?”

“정말 당신이 천마의 혈육이시오?”

“그렇소.”

“아! 내가 마교주의 혈육과 마존을 한자리에서 보는 날이 오다니!”

평범한 무인이라면 평생 한 번도 못 볼 사람을 한꺼번에 본 것이다.

“당신이 보통 신분은 아닐 거라 예상은 했었소. 사실 당신은 ‘나는 천마다’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오. 반로환동한 천마라 믿었을 거요.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이지…… 아니, 이제 이공자님이라고 불러야겠지요.”

극악소마는 추생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다 안다는 듯 나직하게 웃었다.

“날 어렵게 여기지 말고 지금까지처럼 편하게 대해주시오.”

“그래도 되겠소?”

“괜찮소. 특별한 대우를 원했다면 애초에 내 신분을 밝혔을 거요.”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소.”

우리 둘의 대화가 끝나자 극악소마가 추생에게 말했다.

“상황이 어떻든 지난 신세는 갚아야지. 자,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신중히 말하게. 은원전은 단 한 번만 쓸 수 있으니까. 자네 아버지를 봐서 들어주는 부탁이니 신중하게 선택하게.”

잠시 고민하던 추생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부탁은 이공자가 대신할 겁니다.”

그가 내게 은원전의 사용을 맡겼다.

“왜 내게 맡기는 거요?”

“두 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이번 일이 우리 가문만의 일이 아닌 것 같소. 이번 일이 그저 복수를 해주시오, 하면 끝나는 일이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소마님께 어떤 부탁을 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소. 그래서 이공자께 맡긴 거요.”

현명한 판단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추생아. 앞으로도 이렇게 명석한 머리를 잘 활용해서 살아가거라.

나는 웃으면서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제가 대신 부탁하는 것 인정하시겠습니까?”

“원래 직계 가족의 부탁만 들어준다고 정했지만, 이공자니까 특별히 받아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잠시 숙고한 후 그에게 말했다.

“저를 본교의 후계자로 만들어 주십시오.”

화들짝 놀란 추생이 따지듯 소리쳤다.

“왜 내 은원전으로 당신 일을 부탁하는 거요?”

“내게 맡겼잖습니까?”

“아니, 그래도 그렇지. 설마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소. 우리 가문의 복수를 부탁해야지요.”

추생이 따지고 들던 그때였다. 극악소마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그가 받아들인 것은 은원전의 부탁이 아니라 내 장난이었다.

반면 추생은 다급했다.

“안 됩니다! 이건 무효예요! 무효!”

극악소마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넨 누군가?”

이제 볼일 끝났다는 극악소마의 태도에 추생은 흠칫 놀랐다.

“누군데 아까부터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극악소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가 탄식하며 자책했다.

“제 성질은 선택적 다혈질인 것 같소. 작은 돌멩이에도 넘치던 그 인내심 통이 이분 앞에서는 넘치지 않습니다. 바다를 들이부어도 넘치지 않을 것 같소.”

자조 섞인 탄식에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은원전은 잃었지만 대신 미래의 천마를 얻지 않았소?”

그 말에 추생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장난쳐서 미안하오. 자, 정식으로 인사하겠소. 난 천마신교 이공자 검무극이오. 내 이름을 걸고 그대 가문의 복수를 해주겠소.”

그제야 장난이었음을 깨닫고 추생이 감격했다. 은원전보다 더 확실한 약속이 맺어진 것이다.

거기에 극악소마까지 나섰다.

“이번 일은 나와 관련된 일이니, 내가 처리할 작정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돌아가거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로 인해 네 가문이 엮인 것은 심히 유감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네 아버지에게 은원전을 주지 않았을 거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가 미안해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게 어찌 소마님 탓이겠습니까?”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니, 어서 돌아가거라.”

“네.”

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혼자 보내도 되겠습니까?”

이미 적들이 인접해온 것이 확실한데 혼자 돌아가다가 변이라도 당할까 걱정이 되었다.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이번 일을 꾸민 배후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추생이 나와 극악소마에게 포권한 후 돌아섰다. 객잔을 나가려던 그가 문 앞에서 돌아섰다.

“다시 못 뵐 것 같아 말씀드리겠소. 어쩌면 이번 일이 끝나면 본문은 정파에 속할지도 모르겠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라도 나중에 정마대전이라도 벌어지면…… 우리 가문은 좀 봐주시오.”

그의 농담에 나도 농담으로 받았다.

“그럼 날 한 번 구해주셔야 하오. 동전 잘라 드릴 테니.”

추생이 활짝 웃었다.

“나는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귀한 분을 내게 보내주셨다는 것을. 이공자님, 부디 정마대전 같은 것은 일으키지 않는 천마가 되어주십시오. 그럼 언젠가 또 뵙게 되길 고대하겠습니다.”

추생은 마지막 인사를 아주 정중하게 하고 떠났다.

객잔에 둘만 남자 극악소마가 말했다.

“이공자는 천마 포기하십시오.”

“은원전까지 썼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중원을 돌아다니면서 사십시오. 추생 같은 사람들 만나면서, 이렇게 웃으면서 사십시오. 이게 더 어울립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극악소마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혹시 형에게 뇌물이라도 받으셨습니까? 못 본 사이에 그쪽에 붙은 겁니까?”

극악소마가 큰소리로 웃었다.

추생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씩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오늘 이 자리는 극악소마를 불러내기 위한 자리가 틀림없었다.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은 세 명의 노인이었다.

그들은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붉은색 갑옷을 맞춰 입고 있었다. 그 옷차림만으로도 그들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혈로삼군(血路三軍).

한때 무림을 공포로 물들이던 낭인들로 어떤 청부도 돈만 주면 받아주던 자들이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죽였고, 돈만 주면 자기 부모도 죽일 자들이라 알려져 있었다.

결국 악행이 지나쳐 무림공적으로 몰린 후 무림에서 자취를 감췄는데, 오늘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악명을 떨쳤는데, 이제 그들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줄어든 근육만큼 산전수전 다 겪은 사악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또다시 객잔으로 중년 여인 하나가 살랑살랑 분홍빛 부채를 흔들며 등장했다. 여인은 화려한 궁장에 화장을 짙게 하고 있었는데, 몸매는 터질 듯 육감적이었다.

극락요희(極樂妖姬).

수많은 남자의 정기를 빨아서 내공으로 만든 희대의 악녀였다. 나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 피부와 몸매는 수많은 남자의 정기와 목숨을 뺏어서 만든 것이었다. 그녀 역시 한때 무림공적 일 순위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희대의 색마에게 걸려 역으로 내공이 빨려 죽었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버젓이 살아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가 흰 다리를 드러내며 탁자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았다.

다음으로 한 중년 사내가 들어섰다.

한 자루의 직도(直刀)를 허리에 차고 마치 황야를 떠도는 야수와 같은 기도를 드러냈다.

혈랑도(血狼刀).

오직 강해지기 위해 중원의 고수를 찾아다녔던 무인이 바로 그였다. 그는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했고, 싸우기 싫어하는 상대와도 억지로 싸웠다. 그래서 그에게 억울하게 죽은 고수가 너무 많았다.

결국 그 역시 무림공적으로 몰렸는데 그의 최후에 대해 여러 소문이 있었다. 무림맹 원로와 싸우다 죽었다, 마존에게 도전하다 죽었다, 이름 모를 은거 고수에게 죽었다. 그 온갖 소문들을 무색하게 만들면서 그는 입구에 놓인 주전자를 벌컥벌컥 마셨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사람은 정말 온통 검은색 옷과 신발에 시커먼 장포까지 두른 남자였다.

염라신군(閻邏神君).

지금은 멀쩡해 보이지만 한때 미쳐서 무림인들을 학살하고 다녔던 미치광이 무인이었다. 자신이 염왕이 보낸 사자라고 믿으면서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라 여겼던 자였다. 그 역시 무림공적으로 몰려서 한바탕 피바람을 일으키다가 사라졌던 인물이었다.

한때 무림을 진동시키던 악인들이 한꺼번에 등장했기에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가짜 행세를 했던 배후는 나타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지만 극악소마에게 이 한마디를 안 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던 겁니까?”

자신을 향해 살기를 내뿜는 악인들을 쳐다보며 극악소마가 멋쩍게 대답했다.

“다 아는 사람들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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