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회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염라신군이 살생명부를 펼쳤다.
그리고 피가 든 작은 통을 꺼내 붓으로 찍어 내 이름을 극악소마 이름 옆에 적었다.
앞서 반쯤 정신이 나간 놈 같았던 염라신군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기도 했고, 아예 미친놈 눈빛 같기도 했다.
“나란히 이름이 적혔으니 죽어도 함께 죽겠군요.”
내 말에 극악소마가 웃었다.
우리의 여유에 극락요희의 시체를 살피던 혈로삼군의 첫째가 버럭 소리쳤다.
“이 새끼들아! 웃지 마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나를 노려보았다.
“요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섭혼술을 실패한 적이 없다. 한데 어떻게 된 일이지?”
“누님께서 이 아우의 내공이 부족한 것을 보고 보태주고 싶었던 모양이오.”
“헛소리 집어치워라!”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분노는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을. 혈로삼군의 둘째나 셋째는 극락요희를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했던 것이 맞았던 모양이다.
첫째가 극악소마를 보며 말했다.
“넌 알고 있었구나. 저 이공자가 당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당연히 극악소마는 나를 믿었다.
극악소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전음을 주고받았다.
―이제 그 입으로 자백하십시오. 섭혼마존 내가 죽였다고.
―그런 적 없습니다.
―언젠가는 듣고 말 겁니다.
가면 눈구멍 속 극악소마의 눈이 웃고 있었다. 우리가 여유롭게 서로를 보며 웃고 있는 모습에 혈로삼군의 첫째가 분노를 드러냈다.
“그래, 웃어라. 지옥으로 가면서도 그렇게 웃으면서 가라.”
내가 혈로삼군 첫째에게 말했다.
“그자가 이건 말해주고 당신들을 사지에 몰았소? 소마님과 내가 검황 백망기를 죽였다는 것을.”
“뭐?”
첫째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다른 악인들도 깜짝 놀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합공하더라도 검황 백망기를 죽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극락요희마저 죽은 상황.
“그자는 당신들이 우릴 죽일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았을 거요. 우리에게 부상을 입히거나 내공을 소모시키는 용도로 당신들을 이용했을 뿐이지.”
남은 이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번에는 그들이 전음으로 대책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가 혈랑도에게 말했다.
“혈랑도, 생사결이다.”
앞서 그가 극악소마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줬다.
“강자를 찾아 평생을 헤맸다고 했지? 자, 여기 네가 찾던 사람이 왔다.”
흑마검을 뽑으며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이 비무를 방해하는 자는 죽여주십시오.”
원래라면 극악소마에게 양보해야 할 승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변수도 허용해선 안 될 상황이었다. 최대한 부상 없이 이들을 처리하고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진짜 적은 밖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극악소마 역시 내 의도를 짐작했기에 순순히 이 승부를 내게 양보했다.
“그러겠습니다.”
혈랑도를 제외하고도 넷이나 남아 있지만, 극악소마는 당당히 대답했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혈랑도였다. 내가 극락요희의 내공을 역으로 흡수한 모습을 본 다음이라서 내심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기세는 내 쪽에 유리했다. 나는 그를 더욱 몰아붙였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을 찾아 나섰다면, 당신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진짜 그런 마음이었다면 왜 무림맹주를 찾아가지 않았나? 왜 우리 아버지를 찾아오지 않았지?”
“…….”
“나와 싸우기 싫지? 한데 너는 평생 싸우기 싫다는 사람에게 승부를 강요하고 살았다. 자,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혈랑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혈랑도가 직도를 뽑았다.
비록 싸움을 시작할 때의 기세는 밀렸지만, 혈랑도는 가짜 명성을 지닌 자가 아니었다. 그의 도법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강력했다.
내 검을 부러뜨릴 기세로 도가 날아들었다.
검과 도가 부딪쳤을 때 챙챙 하는 소리가 나지 않고 쾅쾅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과 도에 내공을 실어서 그야말로 내력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정곡을 찔린 수치심이 그의 도에 실렸다.
두들기고, 두들기고, 또 두들기고.
그는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 다른 무인이었다면 벌써 검이 부러졌거나 팔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막고, 막고, 또 막았다.
부딪치는 검과 도 너머로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았다. 처음 공세를 가할 때 기세를 잡았다고 여겼을 때의 여유는 점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아마 팔목은 그가 아파져 오고 있었으리라.
이제 서서히 입장이 바뀌기 시작했다.
두드리는 쪽이 내가 되었다. 흑마검이 그의 도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화려한 초식 싸움이 아니라, 그가 의도한 내력 싸움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너무 빠르게 검을 내리쳤기에 피할 수도, 다른 초식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꽝! 꽝! 꽝! 꽝!
묵직한 타격음이 이어지던 그때, 처참한 비명이 타격음 속에 뒤섞였다.
“끄아아악!”
내력에서 밀린 그의 팔목이 부러진 것이다.
하지만 내 검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 수에 내력이 주입되지 못한 그의 도가 부러졌고, 다음 수에 그의 몸이 수직으로 길게 베어졌다.
“이게 당신이 원하는 삶 아니었나? 더 강한 사람과 싸우다 죽는 것.”
하지만 나는 보았다. 마지막 순간 그의 눈에 비친 원망과 아쉬움을. 그래, 말은 쉽지만 진정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리라.
혈랑도는 정수리에서 배꼽까지 일직선으로 피를 뿜어내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는 평생 남에게 승부를 강요하다가 결국 자기가 해왔던 방식을 돌려받으면서 죽었다.
염라신군과 혈로삼군은 말없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극악소마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우악스러운 힘 싸움에 끼어들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혈랑도가 내게 질 줄 몰랐을 것이다.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이는 내공 싸움은 혈랑도의 장기였으니까.
난 다시 염라신군에게 말했다.
“적었소? 혈랑도의 이름도?”
혈랑도가 눈앞에서 죽었지만 그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네 이름을 적으니 자리가 부족해서 못 적었다.”
그가 나에게 나섰을 때, 혈로삼군의 첫째가 말렸다.
“미치광이. 당신 상대는 저쪽이다.”
혈로삼군 첫째가 나를 죽여서 극락요희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내린 채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극악소마는 염라신군을 상대했다.
“네 이름은 미리 적어두었나?”
극악소마의 물음에 염라신군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염왕이 보낸 사신이다. 염왕이 널 찾으신다!”
푸아앙! 꽈앙!
염라신군이 일장과 극악소마의 마극광폭장이 충돌했다.
그 여파로 세찬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닥치면서 나와 혈로삼군과의 싸움도 시작되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나를 향해 쇄도했다.
첫째의 검은 나의 얼굴을 노렸고, 둘째는 가슴을, 셋째는 다리를 노렸다.
챙! 챙! 채앵!
날아든 검을 거의 동시에 쳐냈다. 나는 빨랐다. 아니, 빨라야 했다. 저들의 공격은 빠르지 않으면 어디 한 군데는 반드시 찔리게 되는 그런 속도였다.
찔러 오는 방향이 계속 바뀌었다. 이번에는 첫째는 가슴을, 둘째는 배를, 셋째는 얼굴을 노렸다. 다음에는 또 달라졌다.
이미 수십, 수백 번의 연습과 경험으로 공격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이 합격술은 상대의 심리를 잘 연구한 완벽한 합공이었다. 정말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찔려도 몇 번은 찔렸을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챙챙챙챙챙!
연신 뒤로 밀려나며 그들의 공격을 쳐냈다.
그러다 기회를 틈타 공격을 가했다.
흑마검이 첫째를 찌르자 둘째가 함께 방어했고 셋째는 나를 찔러왔다.
그들은 평생 함께 싸웠던 이들이었기에 몸은 셋이지만 마음은 하나인 것처럼 싸웠다. 머리가 셋이고 팔이 여섯인 괴물과 싸움이었다. 앞서 싸웠던 혈랑도보다 훨씬 어려운 상대였다. 나는 확신했다. 오늘 왔던 네 악인 중에 이들이 가장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것을.
네 자루의 검이 아래위를 오가며 얽혔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공방이 이어졌다.
나는 이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껏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그들이 나를 몰아붙이던 그 순간.
스스슷.
놀란 둘째가 허둥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첫째와 셋째가 사라졌고, 나와 단둘이 들판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난 시공이환술로 둘째만 데리고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했다.
남아 있던 첫째와 셋째 눈에는 순식간에 우리의 신형이 사라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둘째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환술이냐? 비겁하다!”
“하긴 너희 기준에서 일대일은 비겁하지?”
그를 향해 쇄도했다. 셋이서도 나를 죽이지 못했는데, 혼자서 나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외부에서 첫째와 셋째가 놀라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상대 혼자 사라졌으면 모를까, 둘째까지 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때 둘째의 시체가 뚝 떨어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둘째의 시체에 셋째가 당황하던 그 순간.
쉭! 푸욱!
시체의 겨드랑이 사이로 뚫고 나온 흑마검이 셋째의 심장을 찔렀다. 그들의 실력으로 볼 때는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지만, 상대는 시공이환술을 실전에 접목한 바로 나였다.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셋째도 쓰러졌다.
난 첫째가 이성을 잃고 미친놈처럼 달려들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도주였다. 한쪽 객잔 벽을 부수고 달아나려 했지만, 번쩍하는 순간 점멸보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놀란 그가 다시 돌아서 달아났다. 바닥에 있던 극락요희의 시체를 내게 던졌다. 그녀의 복수를 위해 날 죽이려던 그였는데.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건 아니잖아?”
“닥쳐라! 이 새끼야!”
이미 기울어진 싸움이라 여겼는지 그는 살기 위해서 지랄발광을 했다. 고함을 지르며 미친놈처럼 검을 휘둘러댔다. 하지만 통할 리 없는 발버둥이었다.
채 다섯 수가 지나기도 전에.
푹!
흑마검이 그의 심장을 찔렀고, 그보다 더 빠르게 그의 손목을 베었다.
툭.
떨어진 손에는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나에게 뿌리려던 독주머니였다. 그는 검에 찔리는 순간 내게 독을 뿌려서 동귀어진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독한 놈들인 것은 애초에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최후가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른 그들이 이렇게 말년이 되어서야 죽다니. 심지어 내가 회귀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죽지도 않았을 거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소? 그러니 다들 하늘도 무심하다고 한탄하지.
내 싸움이 끝났을 때 극악소마의 싸움도 끝나 있었다.
염라신군은 이미 혈앙지에 이마가 뚫린 채 자기 명부에 얼굴을 처박고 죽어 있었다. 흘러나온 피가 그의 살생명부를 적셨다.
“평생 염왕의 사신 흉내를 냈지만, 정작 염왕은 널 보고 그럴 거다. 누구신가? 내가 널 언제 보냈다고?”
내 말에 극악소마가 웃으며 물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소마님은요?”
“저도 괜찮습니다.”
손쉽게 이긴 것 같아도 사실 우리 중 누가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강적들이었다.
하지만 우린 잘 대처했고, 이번에도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 그와는 의도치 않게 이렇게 자꾸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고 있다.
“못 본 사이 실력이 또 늘었군요. 대체 어디까지 강해지려는 겁니까?”
“끝까지 가 볼 생각입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구화마공까지 익히면 천하에 상대가 없을 겁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진심으로, 아무도 내 상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객잔 입구 계산대에 돈을 올려두었다. 망가진 객잔을 수리하고 집기를 다시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어딘가 달아나 있을 객잔 주인을 위한 돈이었다. 오늘 일은 강요에 의해 벌어진 일일 테니까.
“이제 이 모습이 이상해보이지 않는군요.”
“아시다시피 제가 추구하는 마도가 탁자를 부수지 않는 마도라서요.”
“이공자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저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요?”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은 지키려는 겁니다. 최소한 인간은 되고 나서, 그 위에 마도도 있고 정도도 있고 사도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극악소마는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란 사람에게 점점 적응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가시죠.”
“그러시죠.”
우린 함께 객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바깥에는 아무런 행인도 없었다. 그야말로 텅 빈 거리.
그 앞에 백색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다. 검황 백망기 못지않은 존재감이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자가 극악소마 행세를 했던 가짜임과 동시에 이번 함정의 배후자임을.
“마도들과 어울리더니 이제 예의도 잊었느냐?”
극악소마는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사백(師伯)을 뵙습니다.”
그는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극악소마 사부의 사형인 양처기(梁凄己)였다. 회귀 전 극악소마와 관계를 맺었을 때, 그는 이 사백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양처기가 극악소마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가면을 벗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