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회 이래 봬도 저 일등만 했었다고요.
“무슨 일요?”
아직까지 서대룡은 앞으로 닥쳐올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넨 소룡전에 나가야 한다.”
소룡전이란 말에 서대룡은 화들짝 놀랐다. 내가 미안해질 정도로 깜짝 놀란 서대룡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말씀하신 소룡전이 제가 아는 그 소룡전은 아니겠지요?”
“자네가 아는 소룡전은 뭔데?”
“무림맹에서 정파 후기지수들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무림대회죠. 무림맹과 정파 고수들이 엄청나게 모이니 사파나 본교 사람은 참가는커녕 구경도 해선 안 되는 그 위험천만한 무림대회요. 아니죠?”
“그 대회 맞는 것 같은데?”
가만히 날 쳐다보던 서대룡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객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붙잡지 않고 점소이에게 가벼운 요깃거리와 술을 주문했다. 산에서 수련 삼매경에 빠져있다 보니 술 마신 지가 어언 천만년이다.
그렇게 술을 두어 잔 마시고 있으니까 서대룡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안 잡아요?”
“왜 잡아? 다시 돌아올 건데.”
서대룡이 술을 따르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안 됩니다. 안 돼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너밖에 없다.”
“너밖에 없다는 악덕 수장들이 수하를 부려 먹을 때나 쓰는 말이죠. 너밖에 없긴 뭐가 저밖에 없습니까? 찾아보면 많아요! 잘 찾아보면 이 객잔 안에도 있을걸요?”
서대룡이 자기 대신 내보낼 내 주위 사람들을 떠올려 보더니 이내 내 주위에는 이상한 사람들밖에 없다며 탄식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서대룡이 술잔을 또 비웠다.
“제가 누군지는 아시죠?”
“알지. 권력지향형의 비정한 성격이지만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상남자이고, 다들 침묵할 때…….”
“그만요!”
나는 다 생략하고 새롭게 추가된 내용만 덧붙였다.
“…… 끝내 여빈과는 대결하지 못한 겁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오른팔인 서 조사관이지. 이제 용감하게 소룡전에도 출전한이란 내용도 추가되겠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제가 소룡전에 어떻게 나갑니까?”
“그렇다고 내가 나갈 수는 없잖아?”
“아무도 못 알아볼 겁니다. 지금 수염 때문에 감쪽같아요!”
“하수의 변장이라면서? 더러운 수염이라면서?”
한숨을 내쉬던 그가 다시 빠져나갈 길을 찾아냈다. 서대룡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직 사부님 무공을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다고요.”
“그래서 더 좋아. 표 나면 안 되니까. 어차피 기본기로만 싸워야 해.”
서대룡쯤 되면 마기를 감추는 법은 이미 익히고 있을 테니, 무공 때문에 표가 날 일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둠의 기운을 발산하는 서대룡의 저항에 나는 강수를 썼다.
“그래, 자네가 안 되면 할 수 없지.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내린 시험에 실패하는 거지. 결국 후계자는 형이 될 테고. 아마 나는 암살당해서 이름 모를 들판에 버려져 짐승들의 먹잇감이 되겠지. 아! 그래도 나는 자넬 원망하지 않을 거야. 진심이야.”
“아마 전 비무대 위에서 생전 처음 보는 정파 놈의 검에 찔려서 죽게 될 겁니다. 그럼 제 시체는 가짜 신분을 제공한 본교의 위장 문파로 가게 되겠죠. 이놈 누굽니까? 나도 몰라. 실컷 이용당하고 죽은 놈이겠지. 키도 작고 우울하게 생긴 놈이 불쌍하네요. 어서 가져다 묻어 줘라. 아! 그래도 전 각주님 원망 안 할 겁니다. 진심으로요.”
“언젠가 교주가 되었을 때, 오늘을 회상하겠지. 아, 그때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교주가 될 수 없었을 거네. 고맙네.”
“언젠가 제가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오늘을 회상하겠지요. 그때 끝까지 우겨서 그 대회에 안 나가는 바람에 너희들이 있는 거란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저항해도 이 싸움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어휴, 정말 제가 못 삽니다, 못 살아요. 하긴, 이걸 누굴 탓합니까? 처음 황천각에 오셨을 때 제 선배 복수를 원한 것도 저고, 도법을 배우겠다고 결정한 것도 저인데요.”
나는 그의 술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고맙다.”
“아시면 됐어요. 싫은 일도 하고 사는 게 인생이겠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걸?”
“아니! 그건 제가 해야 할 말이잖아요!”
정말 큰 결정이란 것을 안다. 어디 나서는 것 제일 싫어하는 그였으니까.
“무인으로서 네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이름만 봐도 이건 운명이잖아? 소룡전과 서대룡. 소룡전에서 대룡이 승천하는 거지. 대회 이름이 소호전이었으면 장호를 불렀을 거다.”
내 실없는 농담에 결국 서대룡은 웃고 말았다.
“그럼 이게 후계자 시험이네요.”
“그렇지.”
“정확히는 우리가 뭘 해야 합니까?”
“천명회주란 놈이 있어. 그놈이 이번 대회를 이용해서 음모를 꾸밀 거다. 참가자들에게 접근할 수도 있으니 네가 출전하는 거고. 그놈 잡는 게 우리 목적이다.”
“잡아야죠, 나쁜 놈 잡는 게 우리 일인데.”
“내 오른팔답다.”
한번 결정을 내리자 서대룡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마 이런 성격 때문일 것이다. 내가 서대룡을 좋아하는 이유가. 저 작고 우울해 보이는 모습 뒤에는 꺾이지 않는 강단이 있다.
내가 품에서 서류를 꺼내 전했다.
“자, 여기 네 새 신분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싹 다 외워. 외우는 건 잘하니까 걱정 안 해도 될 테고.”
“각주님은요?”
“나는 네 시종 겸 호위 역할을 할 거다.”
그러자 서대룡의 표정에 기쁨이 스쳤다. 그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왜 좋아하는데?”
“제가요? 그럴 리가요.”
“방금 웃었어.”
“잘못 본 겁니다.”
“웃었다고.”
“어허, 이놈아. 어르신이 아니라는데 왜 잔망을 떠느냐? 아, 연습 한번 해봤습니다.”
서대룡의 장난에 나는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오늘은 일단 그거 외우고, 소룡전 신청은 내일 하러 가자.”
우린 침상이 두 개인 큰 객방을 잡았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서대룡이 내 침구의 먼지부터 털려는 것을 말렸다.
“나는 신경 쓰지 마. 오직 너만 생각해.”
“그게 됩니까?”
“나는 네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명령을 막 내리는데, 너는 그 정도는 해도 돼. 내 이불에 오줌도 싸도 돼.”
“그 명령을 받는 게 제 인생입니다.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작 받아들이는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특히 각주님 만나 뵙고 나서는 더욱요.”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대충 짐을 풀고 창가에 앉은 서대룡이 바깥 풍경을 쳐다보다 걱정스럽게 말했다.
“최대한 높이 올라가야 천명회주 놈이 어떤 일을 꾸미는지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제가 너무 일찍 탈락할까 봐 걱정됩니다.”
나도 소룡전 수준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어서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걱정 마. 도마 어르신이 자넬 위해 남긴 계책이 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내가 품에서 작은 복주머니를 꺼냈다.
“자네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꺼내 보라고 주신 계략주머니다.”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내가 그에게 소룡전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정말 이걸 사부님이 주셨다고요?”
사실 나도 놀랐다. 정말이지 혈천도마가 이런 걸 주고 갈 줄이야.
“혹시 뭐라 적혔는지 보셨어요?”
“아니. 왜? 미리 열어볼까?”
“절대 안 됩니다! 사부님이 위기 때 열라고 하셨으면 위기 때 열어야지요!”
안에 든 내용이 궁금하겠지만, 서대룡은 지금 혈천도마가 자신을 위해 이걸 줬다는 사실에 감개무량이었다. 정말이지 창밖을 보며 멀리 있을 혈천도마에게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 느껴졌다.
그날 서대룡은 이런저런 상념에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다음 날 아침, 우린 아침을 챙겨 먹고 무림맹으로 향했다.
저 멀리 무림맹 본단의 웅장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협객을 본떠 만든 거대한 무인 석상이 보였다.
무림맹이 가까워질수록 묘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무림맹도 화무기에게 휩쓸린다.
과연 내가 회귀를 했기에 이들의 운명도 바뀌게 될까? 아니면 본교의 운명만 바뀌게 될까? 거기까진 아직 알 수 없었다.
서대룡이 지나가는 여협들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정파 여자들이 예쁘지?”
“확실히 그렇네요. 소문만 그런 줄 알았는데.”
“온 김에 여자 한 명 사귀어 봐. 정파 여협과 마인과의 운명적인 사랑!”
“구경하는 사람은 재미있겠죠.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겠어요?”
말은 그러했지만 서대룡의 시선은 지나가는 여인들로 자꾸 향했다.
이번 소룡전의 신청을 받는 곳은 무림맹 외전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거의 닷새에 걸쳐 지원을 받는데도 줄이 길었다. 중원 각지에서 수많은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몰려든 탓이다.
우리도 신청하는 곳에 줄을 섰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앞줄에 선 무인들이 이번 대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대화를 정리해 보자면 우승한 사람만 뽑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팔강에 속한 이들까지 모두 뽑아서 무림맹의 정예조직에 넣는다는 말이었다.
대화를 나누던 이들 중 하나가 서대룡과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촌에서 막 올라온 행색에 우릴 보자 절로 무시하는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가 들으라고 서대룡에게 물었다.
“도련님, 우승할 자신 있으십니까?”
서대룡의 눈빛에서 ‘우승요? 갑자기요?’라는 강력한 항의가 있었지만 대답은 힘찼다.
“자신 있다.”
앞에 있던 녀석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비웃었다. 그래도 대놓고 시비를 걸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한참을 기다려서 우리 차례가 되었다.
“이름, 서룡(徐龍). 문파는 감숙의 서도파(西刀派)입니다.”
실제로 감숙에 있는 문파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통천각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이었다. 가서 조사해 보면 아들 서룡이 있고, 이번에 소룡전에 참가를 위해 떠난 것으로 처리되어 있을 것이다.
“열흘 후에 무림맹 앞에 대진표가 붙을 겁니다. 그때 날짜와 비무대를 확인하십시오. 시합 시간에 늦으면 무조건 탈락이니, 일찍 가서 기다리시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신청을 마친 후에 무림맹을 나왔다.
“아까 그놈들 무시하는 것 봤죠? 정말 말 나온 김에 확 우승해 버릴까 보다.”
“못할 것도 없지.”
“정말 해도 됩니까? 이래 봬도 어려서부터 저 일등만 하고 살아왔다고요. 무시하지 말라고요!”
“무시 안 합니다. 하세요. 우승해도 됩니다.”
“정말 해요!”
정말 그날부터 서대룡은 대회가 열릴 때까지 산속을 오가며 수련했다. 나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혈천도마에게 배우고 있는데 내가 끼어들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냥 도마의 가르침을 믿었다.
서대룡이 수련하러 나갈 때, 나도 수련했다. 물론 수련에 방해가 되지 않게 다른 곳에 가서 수련했다.
서대룡이 오기 전에도 산속에서 정말 열심히 수련했지만, 이번에는 더 열심히 수련했다. 그리고 이 수련은 내게 최고의 결과로 응답했다.
“해냈다!”
드디어 풍신사보가 구성에 올라선 것이다.
솔직히 비천검법 십이성 대성을 이뤘을 때보다 더 기뻤다.
이제 나의 점멸보는 더욱 위험한 순간을 더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고, 암영보는 환상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게 되었으며 명왕보는 강력함 앞에 극도로 치명적이란 말을 확실히 붙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쾌속보는 무섭도록 빨라졌다. 내공 소모는 줄었지만, 심력 소모는 두 배로 늘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심지어 처음에는 나무에 충돌하기까지 했다. 정말 신안술이 아니었다면 너른 평야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속도였다.
이 구성의 경지가 익숙해지면, 마지막 한고비를 남긴 풍신사보는 내게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끝내주지? 구성이 이런데 대성을 이루면 어떻겠어? 자, 조금만 더 노력해서 가보자!
저 말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대성을 이룬 후 풍신사보에게 이 말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너도 고생했다!
이 한마디를 꼭 해줄 것이다.
그다음에는 구화마공을 전수받아 그 역시 대성을 이룰 것이다.
두 무공의 대성을 이루고도 쉬지 않고 노력할 거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화무기를 감당할 수 없다면……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땐 내 기꺼이 웃으면서 죽어주마.
* * *
대진표가 발표되었다.
첫 비무는 내일 열리는 황자조 시합 중 열세 번째 대결이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려서 무림맹 외원 수십 군데서 동시에 진행된다고 했다.
“본교가 똑같은 대회를 열면 이렇게 모여들까?”
“안 오겠죠.”
“이게 정파의 힘이다. 일단 숫자가 열 배는 더 많을 거다.”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은거하고 있는 고수들의 숫자 역시 정파 고수들이 월등히 많다.
지금 당장 무림맹보다 강하다고 덜컥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되는 이유다. 몰아붙여서 이 무림맹 본단까지 다 밀어붙여도, 진짜 전쟁은 그날부터 시작될 테니까.
그렇게 서대룡과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점소이가 급히 우리에게로 왔다.
“죄송하지만, 합석 좀 부탁드립니다. 소룡전 때문에 손님들이 몰려서요.”
“그러시게.”
“감사합니다.”
곧이어 죽립을 쓰고 있던 여인이 우리와 합석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 죽립을 벗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평생 가도 객잔에서 합석할 일은 없을 것 같은 신분에, 차갑고도 이지적인 아름다움으로 호북일미(湖北一美)라 불리며, 탁월한 무공실력까지 지닌 그녀.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무림맹주의 손녀 진하령(秦夏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