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회 오해 좀 받으면 어떻습니까?
소룡전의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본선이 시작되자 무림맹 외전의 작은 비무대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그 중앙에 대형 비무대가 설치되었다.
비무대 주위로 수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층을 지어서 자리를 만들었다. 수천 명이 동시에 비무를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서른두 개 조의 각 일 위들이 우승을 다투는 비무대회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치러진다.
최종 여덟 명 안에만 들어가면 확정적으로 무림맹의 정예조직에 들어가게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본선 진출자들은 무림맹 고수들의 눈에 띄게 되면 입맹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이 본선은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대회였다.
물론, 서대룡은 다른 이유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한 명의 무인으로 그의 마음에서 뭔가가 깨어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서대룡은 그저 무공을 배운 사람이었고, 이번 비무대회를 통해 진짜 무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주위를 꽉 채운 군웅들을 봐도 서대룡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이 싸울 상대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 해야 할 말은 수련을 통해 모두 했으니까. 과연 그 수련에서 서대룡이 깨달은 바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서대룡의 똑똑함을 믿는다.
“복건성 장평검가의 소당(昭唐)!”
내공이 실린 심판의 외침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소당이 천천히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의 표정이나 발걸음에서 여유와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는 이번 대회의 목표가 우승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실력자였다.
“감숙성 서도파의 서룡!”
역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오히려 소당보다 서대룡을 향한 함성이 더 컸다. 소당은 애초에 이름난 후기지수였지만, 서대룡은 이름 없는 문파의 신진 고수가 돌풍을 일으키며 본선에 오른 것이다. 강자를 응원하는 마음만큼이나 새로운 고수의 이변을 바라는 마음도 컸던 것이다.
함성을 듣고 있던 서대룡이 비무대 아래에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가 나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젯밤 그 꿈 개꿈으로 만들고 내려오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말로 하는 응원 대신 믿는다는 눈빛과 함께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심판의 신호와 함께 두 사람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소당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정말 제대로 검술을 익혀온 무인이었다.
공격은 날카로웠고 방어는 탄탄했다. 특히 방어는 완벽할 정도였는데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어떤 공격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나는 서대룡이 느끼는 답답함이 어떤 것일지 잘 알고 있었다. 서대룡에게 다행인 점은 이곳 비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충분히 경험했던 답답함이란 점이었다.
‘말려들면 안 돼!’
보통 이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역습을 당했다. 소당의 검술 요체는 반격에 있었다.
오히려 상대를 답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분명 허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대룡에게 이 해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스스로 찾아내기를 바라서였다.
검과 도가 불꽃을 일으켰다.
지켜보던 이들은 숨을 죽였다. 후기지수의 대결이라 하기에 너무 수준 높은 초식들이 오갔다.
서대룡은 공격적으로 나서되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큰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었다. 그림의 제목은 인내였다. 스스로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렇게 수백 수가 지나고 끝내 상대를 초조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그림은 완성되었다. 이대로 가다가 심판의 판정으로 승부가 난다면, 아무래도 공격적인 서대룡이 더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이다.
역으로 만들어낸 초조함이 아주 작은 허점을 드러냈고 서대룡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푸아악!
서대룡의 도가 소당의 팔을 깊게 베었다. 피가 튀며 소당이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소당이 큰 부상에도 불구하고 더 싸우려 했지만, 심판이 나서서 서대룡의 승리를 선언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환호가 터져 나왔다. 승패를 떠나 본선다운 훌륭한 비무였던 것이다.
비무대에 내려온 서대룡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자신을 주시하는 이가 많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에 주저앉은 넋 나간 모습이 모두에게 더욱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보였는지 지나가던 이들이 모두 포권하면서 존경을 표했고, 멀리서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지켜보는 이들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대룡에게 이 순간의 느낌을 충분히 혼자 만끽하게 해준 것이다.
축하해주는 사람 중에는 일전에 서대룡을 응원했던 여인도 있었다.
“승리하신 것 축하드려요!”
활짝 웃는 그녀를 보자 서대룡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여인이 웃으며 돌아갔고, 서대룡이 다시 내 옆에 앉았다.
“좀 전까지 죽어가더니 지금은 비무 한 번 더 뛸 수도 있을 기세인데?”
여인이 저 멀리 간 걸 확인한 후 서대룡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아뇨, 죽어도 못 합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다음 상대는 더 강하겠지요?”
“그렇겠지. 왜? 포기하고 싶어?”
“네, 제발 집에 보내주세요!”
“술자리 모임에서 뭐라고 하려고? 마지막 순간 너무 겁도 나고 힘들어서 돌아왔다고 하려고? 하긴 장 군주나 이안이 워낙 착해서 자넬 위로해주겠지. 그만하면 잘했다고. 그래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할걸. 나라면 끝까지 도전했을 텐데. 자넬 볼 때마다 나라면 끝까지…….”
“그만요.”
나는 씩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서대룡이 내 손을 꽉 잡으며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각주님이 비무 상대를 해주지 않으셨으면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연습만 해준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네가 잘했다.”
“이거 정말 사람 미치게 하는데요? 그놈을 이기고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데, 정말 미치도록 좋았습니다.”
“진짜 미치면 미친놈이 되는 거고, 적당히 미치면 아무도 상대할 수 없게 되지. 적당히 미쳐라.”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뜻밖의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하령이 객잔에서 국수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서대룡이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섰다. 서대룡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 소저가 좋아하는 것이 국수만이어야 할 텐데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저런 귀한 신분의 여인이 국수만 먹으러 또 왔다고요?”
“오늘은 치료하기 위해서 왔을 거다.”
“무슨 치료요?”
“자존심에 상처가 났거든.”
“일부러 내셨죠?”
그 질문에 부정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이게 다 천명회 때문이야.”
“그걸 저 소저가 모르는 게 문제죠.”
서대룡은 곧장 객방으로 올라갔고 나는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 * *
진하령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검무극의 손을 보았다. 꿈에서 절벽에 매달린 자신에게 내밀던 그 손보다 매끈하고 하얗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이 자리에 와서 인사했다.
“비무가 사흘 후시죠? 저희 도련님은 오늘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이 시종의 친화력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제 두어 번 본 사이인데 정말 오래 본 사이처럼 편하게 말을 걸어온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꼭 소저 국숫값은 계산하고 가주십시오.”
“무슨 말이죠?”
“처음 만난 날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게 그냥 가버리셔서 술과 음식값을 제가 계산했거든요.”
순간 그녀가 당황했다. 생각해 보니 두 번째는 확실히 그랬던 것 같다. 너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렸으니까. 처음에도 그랬었나?
평생 살면서 그녀가 누구 돈 떼어먹은 적이 있었겠는가? 명백한 실수였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 남자는 이렇게 자꾸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다.
이래서 당신, 꿈에 나온 거야? 돈 갚으라고?
처음부터 확 휘어잡고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오히려 기선제압을 당한 꼴이었다.
“얼마죠? 제가 깜박했어요.”
“아뇨, 앞으로 두 번 국수와 술을 사주십시오.”
그 핑계로 또 보자고? 어쩌면 이 순박해 보이는 놈이 바람둥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 않을 거다. 너 같은 놈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냐고?’
그녀와 혼인해서 인생을 바꾸려는 남자들을 줄 세우면 과장을 좀 보태서 무림맹 담벼락을 두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배경과 외모를 탐하는 그 과정을 듣고 보다 보면 남자에 대한 없던 혐오까지 생길 지경이다.
“오늘 다 갚죠. 국수 말고 드시고 싶은 요리 드세요.”
“아뇨, 오늘은 제가 싫습니다.”
이렇게 단호한 시종의 거절이라니! 정말 자신이 시녀가 된 기분을 느끼며 그녀가 술을 시켰다.
“전 한잔 마셔야겠어요.”
그녀가 술을 시켰다. 연거푸 두 잔의 술을 마신 후에야 그날 일을 말했다.
“솔직히 그날 화가 났어요. 친구에게 당신이 시종이라고 솔직하게 소개하려던 순간에 당신이 사제라고 먼저 말했거든요. 그래서 친구를 속인 기분이 들었고, 화가 났었죠.”
이렇게 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걸 알면서도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지랄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그녀가 검무극과 시선을 마주쳤다.
시종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차분하면서도 깊은, 하지만 결코 그 속을 알 수 없는 이 눈빛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눈빛을 닮았고, 또 맹주이신 할아버지의 눈빛을 닮았다.
그 눈빛으로 검무극이 차분히 물었다.
“왜 자꾸 그 일을 신경 쓰는 겁니까?”
이 순간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정말 나도 이 성격이 싫다고.
“오해받기 싫어서요.”
“혹시나 시종을 무시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요?”
“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오해 좀 받으면 어떻습니까?”
“저는 싫어요.”
“혹시 그런 마음이 상대를 더 무시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순간 그녀가 발끈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시종도 사람입니다. 주인과 똑같이 생각하지만 말을 아낄 뿐이지요. 처음부터 시종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저런 사람이구나 하고 이쪽에서도 무시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럼 제 배려가 시종들을 무시하는 그런 사람보다도 못하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한 가지만 묻죠. 그 배려 상대를 위한 배려입니까? 소저를 위한 배려입니까?”
“!”
순간 진하령은 움찔했다.
“아, 소저를 위한 배려라도 좋습니다. 대신 들키지 않으셔야죠. 그걸 들켜버리면 우리도 그만큼 진지해져야 하거든요. 아, 우리와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저렇게까지 고민해야 할 일이구나. 우리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저렇게 노력해야 하는구나. 저렇게까지 신경 쓰는구나. 새삼 안 해도 되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거죠. 소저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요.”
진하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라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아마 집에 돌아간 후에야 ‘그때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면서 이불을 걷어차겠지.
이래서 꿈에 나온 걸까?
이 생각은 다시 자책으로 이어졌다.
‘아! 내가 이기적이긴 이기적이구나.’
이 순간에도 자기 걱정뿐이었다. 시종이 꿈에 나와서 다친 자존심을, 이 시종이 이렇게 생각지 못한 말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애써 붕대로 감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시종 주제에 너무 건방져요. 나와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것 영광인 줄 아세요.”
차갑게 말한 후 그녀가 덧붙였다.
“이렇게 말인가요?”
“네.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소저 신분이면 저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여기서 밥 먹고 있는 대부분이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니 소저도 그렇게 하세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럼 스스로 상처 입습니다.”
잠시 남자를 응시하던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싫어요! 어디다 대고 훈계질이에요? 나이도 새파란 시종 주제에!”
이제 배운 대로 하겠다는 듯 그녀는 거침없이 속마음을 말했다.
“인정합니다. 그리고 잘 어울리십니다. 이번 기회에 가면 벗고 편하게 사세요.”
“닥쳐라! 이 시종 놈아!”
그녀는 버럭 화를 내고는 그대로 그곳을 나가버렸다.
곧이어 서대룡이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와서 마주 앉았다.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끝에서 몰래 훔쳐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남긴 술을 홀짝이며 서대룡이 말했다.
“운명적인 사랑은 언제나 끝이 비극이지요.”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검무극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심각해질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검무극은 슬쩍 그를 놀렸다.
“사랑이 어디 그리 쉽게 이뤄지더냐? 심지어 같은 조직에 붙어 있어도 잘 안 이뤄지는 것, 자네가 제일 잘 알잖아?”
서대룡은 좋아하던 황천각 후배와 밥 한번 먹고 아무런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꼭 그렇게 아픈 곳 찌르셔야 합니까? 저도 절 응원하는 소저들이 있다고요!”
입을 삐죽 내민 서대룡을 보며 검무극은 미소를 지었다.
대룡아, 운명적인 사랑은 하고 싶어도 못 한다. 내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화무기란 운명이 분명 이렇게 말할 거다. 내가 있는데 감히 사랑놀음을 해? 그 운명이 날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이상 저기 술꾼이 부르는 노랫가락처럼 내게 사랑은 사치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은 내 심장조차, 그 심장 박동조차 느낄 시간이 없지 않으냐?
“서 조사관, 무공수련이나 하러 가자.”
“네! 우리 같은 패배 원숭이들은 수련만이 살길입니다!”
“우리라니!”
그리고 일어날 때 알았다. 진하령이 오늘도 또 계산을 안 하고 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