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회 길 가던 시종이라도.
진하령이 비무대를 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그녀의 본선 첫 비무가 열리는 날. 군웅들의 환호가 대단했다. 그들은 무림맹주를 존경하고 좋아했기에 손녀인 진하령 역시 모두가 좋아했다. 게다가 호북일미로 불릴 정도의 미녀였으니, 그녀는 인기는 당연한 것이었다.
“꼭 이기십시오!”
“진하령 최고!”
“예쁘다 진하령!”
“국수 사주세요!”
“우승은 진하령!”
비무대에서 진하령이 흠칫했다.
응원하는 말소리 중에 뭔가 끼어선 안 될 말이 들렸던 것이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껏 비무대에 올라서 군웅들을 바라봐준 적이 없는 그녀였기에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 수많은 사람 중에서 그녀는 찾아야 할 사람을 찾아냈다. 군웅들 사이에 앉아 있던 검무극이 소리쳤다.
“또 그냥 갔어요!”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도 그의 말은 또렷이 날아와 귀에 박혔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그날 또 계산을 안 하고 나와버렸다는 것을.
계산해달라는 부탁까지 들었는데, 또 안 하고 나오다니.
‘아! 이렇게 정신없다니!’
그날도 저 남자에게 말려서 화를 내는 바람에 그냥 나와 버렸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비무장에까지 와서 국수를 사달라고 소리친다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비무 상대가 인상을 굳혔다.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비웃는다고 오해한 것이다.
오해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그의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했지만, 아쉽게도 그녀와의 실력 차이를 좁히지는 못했다. 심지어 싸우는 내내 국수를 떠올린 그녀를 말이다.
박수를 받으며 비무대를 내려오던 그녀가 아까 검무극이 있던 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검무극은 자리에 없었다.
비무를 끝까지 안 보고 가버리다니. 이 자식이! 정말 국숫값 받으러 왔냐?
그때 호위무인인 추호가 와서 보고했다.
“맹주님께서 처소로 드시랍니다.”
“할아버지께서?”
반 시진 후, 진하령은 엄중한 경계를 수도 없이 지나 무림맹주의 거처로 들어서고 있었다.
무림맹 내부 깊숙한 곳에 있는 그곳은 멋지게 깎인 바위들과 천년 고목들이 우아하게 어우러져 있어서 그야말로 신선이 노니는 곳 같았다. 그곳에 한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름다운 배경과 어우러져 그는 마치 그림의 한 부분 같았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왔느냐?”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나이에 비해 이십 년은 젊어 보이는 그는, 젊은이들도 갖추지 못한 완벽한 근육질의 몸을 지니고 있었다.
몸도 몸이지만 그의 인상을 지배하는 것은 눈이었다. 마주 보면 호랑이도 찔끔 오줌을 쌀 것 같은 크고 강렬한 그의 두 눈 때문에 마치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처럼 보였다.
신선이 머무르는 이런 곳 말고, 방금 그녀가 있었던 비무대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
무림맹주 진패천(秦覇天).
정도제일고수인 그는 정파 무림의 기둥이자 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마교가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는 것이 진패천이 건재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정파 무림의 상징이었다.
진하령이 봐도 할아버지는 멋있는 분이었다.
선한 마음에 의지도 강하며 무엇보다 의협심이 높으신 분이었다. 누구에게나 존경받아 마땅할 그런 분이셨다.
다만 그건 무인 진하령의 평가고 손녀 진하령의 평가는 달랐다. 자신을 억압하는 고지식하고 답답한 할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솔직히 그래서 더 화가 난다. 남들에게는 그렇게 잘하고 완벽하면서, 가족에게는 오히려 못한다는 생각에 말이다. 오히려 잘해야 할 사람에게는 못 하고, 생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는 몸 바쳐서 헌신하고 있었으니까.
“얼마 전에 진룡장주(眞龍莊主)를 만났다.”
오늘 비무를 이긴 날인데, 다른 말씀부터 꺼내는 할아버지였다.
뭐가 그리 급하세요? 손녀 비무에서 이긴 이야기부터 하자고요. 하다못해 오늘 날씨 이야기라도 좀 하자고요.
물론 그녀는 그런 불만을 꺼내지 못했다. 무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편하지도 않은 할아버지였으니까.
“장주님은 잘 지내시죠?”
“기력이 없다 엄살을 떨어도 그 늙은이 여전히 꼬장꼬장하더군.”
정말 할아버지가 아니면 평생 떠올릴 일 없는 사람의 이야기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진룡장주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달리 이유가 있었다.
“무공수련 갔던 손자가 돌아왔다고 하더라. 넌지시 너와 짝을 지어주면 어떤가 이야기를 꺼내던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 또 시작이시다.
“우리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이 귀여운 손녀를 시집 못 보내서 안달이실까? 명문가의 사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실 텐데요?”
그녀가 애교를 부렸지만, 진패천은 받아주지 않았다.
“네 생각을 묻고 있다.”
“싫어요. 할아버지, 싫습니다.”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진패천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싫으냐?”
“할아버지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혼인하고 싶겠어요?”
“믿을만한 사람이다.”
“누가요? 할아버지도 안 보셨잖아요?”
“진룡장주를 보면 알지.”
“대체 어떻게요? 세상 사람들이 다 존경하는 할아버지 손녀인 저를 보자고요. 제가 바깥에서 보는 모습과 같나요? 고상하고 도도하고 예의 바르고. 아니잖아요? 저, 이렇게 반항하잖아요? 근데 어떻게 진룡장주를 보시고 그 손자를 안다는 거죠?”
진패천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진하령은 물러나지 않았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혼인만큼은 때 되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할 거예요.”
“철없는 소리다! 이 무림이 얼마나 험악한 곳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별의별 괴이하고 이상한 놈이 다 돌아다니는 곳이다.”
이상한 놈이란 말에 문득 건방진 시종이 떠올랐다. 그건 맞아요, 맞는데.
“진룡장은 대대로 훌륭한 무인들을 배출한 곳이니, 믿어도 되는 곳이다.”
“그 믿음은 할아버지에게만 통용되는 믿음이에요.”
“무슨 뜻이냐?”
“감히 할아버지의 믿음을 배신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지금껏 할아버지가 사람 보는 눈이 다 정확했던 거였죠. 하지만 저는 다르다고요.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대하는 것과 저를 대하는 것이 다르듯이요.”
불경한 말이었다. 할아버지의 노기가 담긴 기운 때문에 주위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래도 진하령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 노기에 꺾이면 정말 원하지 않는 혼인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만약 이렇게 자꾸 강요하시면 저 아무나하고 혼인할 거예요.”
“아무나? 대체 누구와 하겠다는 거냐?”
“길 가던 사람 아무나요. 설령 그가 시종이라도 상관없어요.”
무심코 말을 해놓고서도 그녀는 내심 흠칫했다. 시종이라니?
“할 수 있음 해라.”
“할아버지!”
“너는 절대 그렇게 못 한다. 내가 널 모르냐? 너는 네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렇게 못 해. 가서 시종이든 길거리 장사치든 누구든 데려와라. 내가 성대하게 혼례식 올려주마.”
진하령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게 원래의 자신이었으니까.
“할아버지가 정말 훌륭한 분이시란 것,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이 무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실 숭고한 분이란 것도 알아요. 저도 할아버지 제일 존경해요. 그런데 저 때문에 이런 멋진 할아버지를 손녀 강제로 혼인이나 시키는 그런 멋 없는 무림맹주로 만들기 싫어요.”
그녀는 안다.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혼인에 개입하는 이유를. 그건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가 잘못 혼인했기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있어서다. 부인을 잘못 만나서, 인생을 망쳤다고.
아버지는 엄마 쪽 가문의 은원에 휩싸였다가 결국 적들의 암습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엄마도 함께 돌아가셨다.
이후 모든 복수가 끝이 났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에는 한이 남았다.
할아버지, 그렇다고 그게 어떻게 엄마 때문이겠어요? 아버지가 선택한 인생이었는데요.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엄마를 사랑했었는데요.
이런 이유로 할아버지가 정한 가문에 자신을 보내려는 것임을 알았기에, 그래서 더 싫었다.
“너는 아직 세상을 모른다. 이 무림이 얼마나 험악하고 위험한 곳인지 몰라.”
“제가 직접 배울게요.”
“나중에 후회할 거다.”
“후회할게요.”
하지만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진패천에게 통하지 않았다. 세상 호탕하고 마음 넓다고 소문난 할아버지지만, 손녀의 혼사 부분만큼은 그 마음이 적용되지 않았다.
“내일 저녁 만찬에 진룡장주의 손자가 올 거다. 그때 꼭 참석하거라.”
문득 검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배려가 자신을 위한 것인지, 상대를 위한 것인지. 어쩌면 할아버지도 같은 실수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저를 혼인시키고 싶으신 것이 저를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할아버지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선가요?”
할아버지는 자신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진패천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둘 다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진패천의 의지에 일단 진하령이 물러났다.
“내일 뵐게요.”
할아버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건 절대 절 위한 마음이 아니라고요.
* * *
“후우, 후우.”
수련 후에 숨을 고르는 서대룡은 확실히 이전과 다른 사람이었다.
혈천도마에게 배울 때는 무작정 성실하게 수련했다면, 지금의 수련은 그때와 달랐다. 싸워야 할 적이 있었고, 그 적을 어떻게 이길까 하는 수련이었다. 이 실전 수련에서 서대룡은 진짜 무인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각주님, 저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이런 순간이 온다. 그냥 놀면서 막연히 강해지고 싶다가 아니라, 죽도록 노력해서 숨도 쉬기 어려울 이럴 때, 진짜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진짜 각오다.
“오냐, 강해져라. 내가 지켜봐 주마.”
“꼭 봐주셔야 합니다.”
“그래, 꼭 봐주마.”
지금 서대룡은 작은 거인이었다. 너는 내게 고마워하고 있겠지만, 나야말로 고맙다. 본교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 그 순간의 네가 있었기에, 내 회귀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서대룡과 무공수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객잔에 진하령이 와 있었다.
“이제 저 모습이 낯설지 않네요.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겁니까?”
평소보다는 조금 어두운 표정의 그녀였다.
“고민 상담이 필요한 얼굴인데?”
“무림맹주의 손녀가 마교주의 아들에게 받는 상담이라. 결국 다 밝혀내는 거죠. 무림맹의 금지(禁地)는 어디에 있지? 비밀금고를 열려면…….”
“거기까지!”
“네!”
서대룡이 객방으로 올라갔고 나는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나를 보자 진하령이 대뜸 물었다.
“응원할 때 국수 사달라고 소리쳤죠?”
“들으셨습니까?”
“당신 말이 그냥 귀에 와서 꽂히던데.”
“제가 목청이 원래 큽니다.”
“앉아요.”
나는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녀가 내 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술 잘 마셔요?”
“어떤 자리냐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자리에서 잘 마시죠? 좋은 사람과 있을 때?”
“아뇨, 좋은 사람과 있을 때는 오히려 금방 취하더군요.”
“그럼요?”
“화가 났을 때 잘 마십니다. 흥분해서 말을 많이 하니까 술도 금방 깨고. 감정이 격해져 있을 땐 술이 물 같고. 물론 다음날 숙취로 후회하긴 하지만요.”
“내가 다시 술 마시면 개다! 하면서요.”
“그렇죠. 잘 아시네요.”
우린 함께 술을 비웠다. 진하령이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도 오늘 술이 잘 들어가네요.”
“오늘도 화나셨습니까?”
“오늘도?”
“대부분 화나서 오시잖아요?”
“화나서 오는 게 아니라 화나서 가죠. 누구 때문에.”
그녀의 말에 내가 웃었다.
“시종이 따라주는 술도 마십니까?”
“어떤 시종이냐에 따라 다르지요.”
나는 그녀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불쑥 물었다.
“그 수염 자를 생각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그럼 저를 위해 이용당해줄 생각 있나요? 딱 하루만.”
“있습니다.”
그녀가 의외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수염은 못 잘라도 이용은 당해주겠다?”
“하루잖아요? 수염은 기르려면 오래 걸리거든요.”
“무슨 일인지 안 물어요?”
“소저에게 아주 곤란한 일이겠지요.”
“당신이 곤란해질 수도 있어요. 누군가 앙심을 품을 수도 있어요. 모욕을 당할 수도 있고.”
“앙심 품고, 모욕당하고. 그런 인생이 시종들 인생입니다. 더 곤란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럼 내일 저와 무림맹 연회에 참석해 주세요. 우리 할아버지도 뵙게 될 거예요. 할 수 있겠어요?”
난 잠시 눈을 껌벅이다가 대답했다.
“그건 좀 곤란하네요.”
“겁쟁이군요.”
“시종이 다 그렇죠, 뭐.”
진하령이 날 보며 웃었다.
“애초에 도와달라고 할 생각도 없었어요. 내 일에 휩쓸려서 좋은 꼴 못 봐요. 말이라도 고마웠어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세 번 중에 한 번 깠어요.”
바로 그때였다. 우리 쪽으로 한 젊은 남자가 걸어왔다.
“진 소저.”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내심 놀랐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회귀 전 나와 직접적인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진룡장의 조신(曺信)입니다. 예전에 뵌 적이 있었는데. 더 아름다워지셨네요.”
조신.
내가 아는 조신은 진룡장의 조신이 아니다.
화무기가 은거하고 난 이후, 정파 무림에 새롭게 부상한 가문 신룡가의 가주 조신이었다. 지금의 진룡장은 저 조신이 가주가 되면서 신룡가로 이름을 바꾸고 승승장구하게 된다. 무림맹 봉문 이후, 정파를 대표하는 문파까지 성장한다.
회귀대법의 두 번째 재료인 신오향로를 가지러 갔던 바로 그 가문으로 말이다.
‘이 무렵 젊은 시절의 당신은 진하령에게 접근을 했었구나.’
나는 조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그는 전형적인 위군자(僞君子)였다. 잔혹하고 비정한 본성을 깊이 숨겨둔 채 대협의 삶을 살아갔던 그였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만약 당시의 조신과 지금의 조신이 같은 성품이라면?
내 시선이 진하령을 향했다.
이 여자, 지금 위험하다.
설마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되었던 것이 천명회 때문이 아니라 이자 때문이었나?
조신이 나를 보며 물었다.
“여기 이분은 누구죠?”
그녀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시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