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회 개구리가 살아남는 방법은.
시종이란 말에 조신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에 대해서 몰랐다면 모를까, 검무극은 볼 수 있었다. 그의 눈빛에 깃든 경멸을. ‘네까짓 게 왜 내 여자가 될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지?’와 같은 그 참을 수 없는 경박한 분노가 전해져 왔다.
‘이자는 이때부터 그랬구나.’
아니, 오히려 젊은 지금은 자신의 본성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 들었을 때의 조신은 정말 자신을 감추는데 탁월했었는데.
“시종과 겸상해서 술을 마시다니, 정말 소문대로 마음이 넓으신 분이군요.”
딴에는 듣기 좋으라고 한 말에 진하령이 되물었다.
“시종과 한자리에 앉으려면 마음까지 넓어야 하나요?”
시종과의 합석 문제는 최근 그녀의 화두가 아니었던가? 합석을 떠나 요 며칠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말은 ‘소룡전’이 아니라 ‘시종’이었다.
“저는 시종과 밥 먹는 것 정도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아, 그러셨군요. 아랫사람도 공평하게 대하는 마음, 훌륭하십니다. 자, 내일 연회야 뻔한 분위기일 테고, 젊은 우리 연회는 여기서 엽시다.”
칭찬까지 곁들인 털털한 제안이었지만 진하령은 일언지하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어요.”
솔직히 조신은 잘 생겼다. 그래서 함께 앉아서 술 한 잔 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보다 앞서는 것이 검연이었다.
함께 술을 마시면 검연을 내보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함께 마시면 조신에게 미운털이 박히게 될 테고.
두 경우 모두 내키지 않았다. 특히 ‘우리 술 마셔야 하니 이제 자리 좀 비켜줘’ 이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처음입니다. 여자에게 술 마시자고 했다가 거절당하는 것.”
“어차피 내일 볼 거잖아요?”
진하령은 보지 못했지만 검무극은 보았다. 그녀가 거절하는 순간, 조신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감히 날 거절해? 그 짜증 이상의 어둡고 싸늘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진하령이 돌아서려고 할 때, 조신은 검무극 앞에 마주 앉았다.
“저는 이 시종하고 한잔하겠습니다.”
흠칫 놀란 그녀에게 조신이 말했다.
“저도 함께 못하는 자리인데, 이 시종은 어떤 매력이 있어서 함께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하령은 짜증이 솟구쳤다. 지금 조신의 저 행동은 대놓고 검연을 괴롭히겠다는 뜻. 자신이 술을 마셔주지 않겠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굴겠다? 잘생겨서 들었던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없나?’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혼사를 거론했다면, 이 조신도 알고 있을 텐데.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검연이 걱정돼서 앉은 것이지만 그게 조신을 더욱 자극했다.
“정말 매력적인 시종이군요. 떠나려던 진 소저를 다시 앉히다니.”
조신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름이 뭔가?”
“검연입니다.”
“시종 주제에 이름이 멋지군.”
“감사합니다.”
“내가 누군지 아나?”
“아까 진룡장의 조 소협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억력도 좋고. 어디서 이런 멋진 종놈을 구했습니까?”
종놈이란 말에 그녀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감출 수 없는 감정을 조신이 들여다보고 있었고, 검무극은 조신의 감정변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 소저 아름답지?”
“아름답습니다.”
“밤에 생각날 정도로? 어때? 그녀하고…….”
뒤에 나올 말이 뻔했기에 진하령은 그의 말을 끊었다.
“말조심하세요! 당신, 자꾸 선을 넘고 있어요.”
“종놈과 함께 술도 마시는 걸 보니 마음이 넓은 줄 알았는데, 그 도량도 사람을 가리는 모양이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진하령의 마음에 하나의 심상이 떠올랐다.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들고 있는 한 마리의 시커먼 독사였다. 사람을 보다가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내심 당황했다.
그때 조신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제 장난이 지나쳤지요?”
장난인 듯 넘어가려 했지만, 진하령은 만정이 뚝 떨어진 상태였다.
‘맹주 손녀를 함부로 대한다는 자부심이라도 내세우려는 건가?’
조신이 다시 검무극에게 물었다.
“나는 도통 모르겠군. 우리 진 소저는 어떤 분이신가?”
“저도 잘 모릅니다.”
“모르다니?”
“제가 시종이긴 하지만, 진 소저의 시종은 아니거든요.”
“아니라고?”
조신이 깜짝 놀랐다.
“그럼 자넨 누구 시종인가?”
“이번 소룡전에 출전한 서도파의 서룡 도련님의 시종입니다.”
“그런데 왜 자네가 진 소저와 술을 마시고 있었지? 그게 더 이상하잖아?”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검무극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 왜 이렇게 흥분해 있지?’
아직 한창 젊은 시절이라 하더라도, 조신이란 자는 신중한 자였다. 단지 질투심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오늘의 행동은 과했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날뛰게 하느냐?’
학당 스승에게 칭찬을 받은 꼬마처럼, 큰돈을 벌게 된 상인처럼, 무공의 대성을 이룬 무인처럼,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열기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탁.
그때 진하령이 술잔을 소리 내서 내려놓았다. 이제 그만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러자 조신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녀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진 소저는 이상하지 않소?”
“뭐가 말이죠?”
“무림맹주 손녀가 이번 비무 대회에 참석한 무인의 종과 합석해서 술을 마시고 있소. 모두가 놀라워할 그 일을 정작 당사자인 손녀는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고. 어떻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에 넣고 서서히 끓이면 자신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죽는다지요?”
진하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가 뭐라 화를 내기 전에 조신이 말을 이었다.
“만약 이 자가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진 소저에게 접근한 거라면요? 결승전을 앞두고 진 소저의 술에 산공독이라도 타려고 접근한 거면 어쩔 거요? 그때 가서 속았다고 할 거요?”
조신이 검무극의 얼굴에 그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네 목적이 뭐냐?”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에 일장을 날릴 것 같은 조신의 사나운 기세에 진하령이 나섰다.
“조 소협.”
차갑게 가라앉은 어조가 그녀의 기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일 연회장에서 봐요. 아직 물이 끓으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하령은 고개를 쳐든 뱀을 당당히 노려보았다. 지금 그녀는 그 뱀이 두렵지 않았다.
조신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초면에 실수한 것 같소. 미안하오, 진 소저. 내일 연회장에서 뵙겠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검무극은 물론이고 진하령도 느꼈다. 그 웃음에 담긴 짙은 살의를.
조신이 객잔을 나가자 진하령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마치 앞서 조신이 말한 것을 곱씹는 듯 보였다.
검무극은 말없이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서 조신에게 보였던 차가운 느낌이 아니라 평소의 그녀로 돌아왔다.
“어렵네, 어려워. 뭐가 이렇게 어렵죠?”
“원래 사는 거 어렵다고 했습니다. 백 년 전 사람에게 물어봐도 어렵고, 오백 년 전 사람에게 물어봐도 어렵다고 대답할 겁니다. 맹주님도 어렵고, 저기 저 점소이도 어렵다고 대답할 겁니다. 내일 태어나는 애도 철들면 어렵다고 할 겁니다.”
“이래서예요. 시종 주제에 이런 말이나 하고 있으니 어떻게 의심을 안 받겠어요?”
“진 소저도 제가 의심스럽습니까?”
그녀는 솔직히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구리 이야기 듣는 순간 흠칫했어요.”
“그 말에 넘어가면 따뜻한 온천에서 진짜 물을 끓이는 솥으로 옮겨질 겁니다.”
진하령이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말을 너무 잘해요. 당신이 이겼어요.”
“무슨 뜻입니까?”
“저 사람은 죽어도 믿기 싫으니 당신을 믿어야죠.”
“이럴 때는 둘 다 믿지 않아야죠. 왜 둘 중 하나를 고릅니까?”
진하령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 사람이 악인이라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뱀처럼 무서운 조신보다 이 사람을 막는 것이 더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믿기로 했다.
“내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당신 큰일 났어요. 이쪽 개구리는 아직 따뜻한 물에서 헤엄치고 있다지만, 그쪽 개구리는 방금 용암 가운데 바위에 덩그러니 올려졌거든요.”
사람을 알아보는 감각만큼은 타고난 그녀였다. 그녀는 알아차렸다. 조신이란 자는 자기가 혼인하고 싶은 여자와 앉아서 술을 마신 시종을 살려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더군다나 그 여인이 편까지 들었던 시종이라면 더욱더.
“도련님이 절 지켜줄 겁니다.”
“안 돼요, 당신 도련님이 본선에 진출한 실력자라고 해도 당신까진 못 지켜줘요. 저 사람 가문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이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세요.”
“도련님 두고는 못 갑니다. 만약 소저 말씀대로 저자가 저를 해코지하려 들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피할 수 있을까? 오히려 도련님 사문에 피해를 입히게 될 겁니다.”
“맞는 말이에요.”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요. 그 용암에서 나올 장대라도 구해올 테니까.”
그녀가 객잔을 나갔다.
곧이어 그녀가 떠난 자리에 서대룡이 앉았다.
“비무보다 이쪽이 더 재미있는데요?”
“피곤하다더니?”
“아무리 피곤해도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아까 그놈은 뭡니까? 운명적인 사랑에는 반드시 방해자가 등장한다, 뭐 이런 겁니까?”
“그놈에게는 내가 방해자겠지.”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던데요.”
“그런 놈들이 더 위험하잖아.”
“그러니까요. 저놈이 각주님 수염 깎은 걸 안 봐서 그렇습니다.”
“내가 더 위험하다?”
“비교나 되겠습니까? 생긴 거나, 위험도나.”
자신이 생각해도 재미있는 농담이었다는 듯 서대룡이 혼자 웃었다.
“전 이 운명적인 사랑 구경하면서 우승이나 하겠습니다.”
“그래라. 난 운명적인 비무 구경이나 하면서 이번 일이나 처리하련다.”
과연 진하령이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다음 날 찾아온 그녀의 해결책은 내가 생각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나와 함께 연회에 가요.”
오늘 열리는 연회에 함께 가자는 것이다. 무림맹주가 있고 조신이 있는 연회였다.
“그건 제가 겁쟁이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못 간다고 말씀드렸을 건데요.”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요. 제가 당신 목숨은 책임질 거예요.”
“어떻게요?”
“가보면 알아요.”
무림맹주를 만난다?
과연 그에게 내 존재를 감출 수 있을까? 이미 내 경지는 반박귀진(返璞歸眞)에 이르러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무림맹주에게도 통할까? 나란 사람 자체가 풍겨내는 존재감을 과연 감출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구성의 무공 경지를 팔성으로 속일 수는 있을지언정, 나를 시종으로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무림맹주를 만난다는 것은 곧 내 정체를 드러낼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소저 할아버지께서 나에 대해 알고 난 이후에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 중이오.”
물론, 그녀는 전혀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당신 신분 때문에 당신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거예요. 화를 내도 제게 내실 거고요.”
“훌륭하신 분이니 아랫사람도 인격적으로 대하시겠죠?”
“그럼요.”
‘그럼 천마의 혈육은 어떻게 대하시겠소?’
차마 그녀에게 묻지 못한 말이었다.
물론 내가 천마의 혈육임이 들통난다고 무림맹에서 내가 죽을 일은 없다. 그랬다간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선 본교보다 더 안전한 곳이 무림맹이다.
대신 나는 추방될 테고, 무림맹과 문제를 일으킨 책임을 지면서 이번 후계자 시험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진하령은 그런 나를 이해하고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난 여러 상황에 대해 깊은 고민을 마쳤다.
“좋습니다, 가시죠.”
“아, 잘 생각했어요.”
“반 시진 후에 무림맹 입구에서 보시죠. 연회에 가는데 준비도 좀 해야 하니까.”
“좋아요.”
그녀를 보내고 객방으로 올라와 무림맹주가 개최한 연회에 간다고 서대룡에게 알렸다.
서대룡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겠냐?”
“지금껏 각주님은 온갖 위험한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셨죠. 마군주부터 시작해서 마존들까지. 한데 이제는 무림맹주를 만나러 가시는군요.”
“어때? 이런 수장?”
“예전이라면 싫어 했겠죠.”
마존들에게 간다고 할 때마다 서대룡은 질겁하며 뒷걸음질을 쳤었다.
“지금은?”
“무서워서 뒷걸음질 쳐봤자 비무댑니다.”
우린 함께 웃었다. 적진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그와 나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잘 다녀오십시오. 저는 수련하고 있겠습니다.”
난 동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치렁치렁 헝클어진 머리에 싸구려 옷. 나는 오히려 머리카락을 더 헝클었고, 옷은 갈아입지 않았다.
무림맹 입구에서 내 모습을 본 진하령이 소리쳤다.
“연회에 갈 준비한다면서요? 대체 무슨 준비를 한 거죠?”
“더 나아지지 않았어요?”
“전혀요!”
“갈아입고 올까요?”
“아뇨, 그럼 늦어요. 가요!”
나와 진하령이 연회장에 들어서자 주위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군웅들 속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은 흑백의 그림 속에 홀로 피처럼, 붉은색처럼 보인다.
무림맹주의 존재감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회장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한눈에 무림맹주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모두가 흑백으로 보이는데 무림맹주 혼자만 푸른색으로 보이는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무림 최강의 고수들이 주는 존재감이란 이토록 놀랍다.
저 멀리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무림맹주 진패천이 천천히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