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61화 (161/214)

제161회 때론 비극은 가까운 곳에.

두 기도는 서로 달랐다.

아버지의 기도가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몸이 차가워지고 진기가 느려지며 질식의 공포에 사로잡히는 그런 기도였다면, 무림맹주 진패천의 기도는 어두운 바다에서 맞이하는 태풍 같은 기도였다.

나는 맹주의 기도에 꿋꿋하게 맞섰다. 풍랑이 나를 허공으로 밀어 올렸다가 바다 저 밑까지 가라앉혔지만, 나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내 무공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강적을 만났을 때, 풍신사보는 이렇게 나를 자극한다.

―싸우자. 저 기도를 찢어발기자! 태풍을 뚫고 들어가자!

이 최상급 무공의 유혹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끝까지 무림맹주의 기도를 버텼다. 아버지와 주점에서의 비무가 내게 큰 도움을 줬듯, 이 기도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큰 배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도를 버텨내자 무림맹주의 표정에 ‘요놈 봐라?’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동시에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 이제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바다 곳곳에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생겨나며 바닷물을 끌어 올렸다. 그야말로 맹주의 기도는 엄청난 공포를 안겨주었다.

무림맹주가 이렇게 패도적인 사람이었구나. 어쩌면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꿈꾸는 이유가 이 무림맹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강력한 적대자의 존재가 아버지를 자극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버텨내는 것이 한계에 이르렀다. 이제 쓰러지거나 달아나거나 해야 할 때.

바로 그때, 나는 또 보았다.

두 눈.

나를 바라보는 거대한 눈동자.

거대한 어떤 존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예전에 그림 속에서 보았던 그 천마혼임을 알 수 있었다.

아직 구화마공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왜 자꾸 천마혼의 환상을 보는 것일까?

거대한 천마혼이 바다에 우뚝 서서 불어오는 태풍을 막아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나를 가소롭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고,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가엾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또 그 어떤 감정도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천마혼의 환상이 서서히 사라졌다.

죽일 듯 밀려왔던 무림맹주의 기도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저 멀리 서 있는 무림맹주는 끝까지 버텨낸 나에게 놀란 상태였다.

나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마지막 순간 천마혼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것이다. 천마혼 역시 내 정신력이 만들어낸 환상이겠지만, 너무 생생해서 진짜 천마혼이 다녀간 것 같았다.

나는 앞서 했던 말을 맹주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오직 저만이 손녀분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진패천은 무작정 분노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도를 버텨낸 사람이 하는 말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

무림맹주를 만나 정체를 밝히는 일.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선택한 이유는 내가 가진 두 가지 무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내 경험을 믿어서다. 회귀 전의 경험과 회귀 후 마존들을 상대하면서 쌓은 경험까지. 나를 믿어서다.

하지만 두 번째 무기가 아니라면 오직 경험만 믿고 무림맹주를 만나는 무모한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 두 번째 무기는 바로 그의 손녀 진하령이다.

그녀가 이번 일에 깊이 관련된 이상, 무림맹주는 결국 나를 도울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그녀를 전적으로 이용할 작정이다. 어차피 그녀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 이해해 주겠지.

―천명회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본교를 사칭해서 여러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으니, 당연히 무림맹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저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그들을 추적 중이었습니다. 한데 그들이 이번 소룡전과 관련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정보 출처는?

―악인곡주입니다.

진패천은 놀라지 않았다. 천명회와 마찬가지로 최근 악인곡주가 죽은 사실에 대해 정보를 들었을 것이다. 이 두 사건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을 뿐.

―악인곡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들었네.

―그가 살기 위해 밝혔던 내용이니 확실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제 수하를 소룡전에 참가시키고 그들을 잡아내기 위해 온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알렸어야지.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이 뭔가?

―천명회주를 처치하는 일이 제게 내려온 후계자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진패천의 눈빛이 차갑게 깊어지며 다시 기도를 발출했다. 이번 기도는 앞서 보였던 그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와는 다른 기도였다. 봄바람처럼 내 몸을 감싸며 감정의 변화를 읽어내려는 부드러운 기도로, 내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하령이 이야기를 해보게.

―저는 천명회가 진 소저를 노리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확신하는 이유는?

―천명회가 소룡전과 관련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이번 소룡전에 진 소저가 출전했고 심지어 강력한 우승 후보입니다. 우연이 겹친 거라고요? 천만에요. 틀림없이 진 소저를 노릴 겁니다. 아니, 애초에 진 소저가 출전한다는 것을 알고 계획을 꾸민 겁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면 될 일인데. 내가 왜 내 손녀의 일을 자네에게 맡기겠는가?

―지금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개입하면 진 소저가 위험해질 테니까요.

부드럽게 나를 감싸던 기도가 일순간에 차가워졌다. 손녀의 위험이 언급되기만 해도 기도는 살기를 뿜어냈다.

―천명회는 애초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조직입니다. 어쩌면 본교나 무림맹, 사도맹의 수뇌부 중에서도 이미 그들에게 포섭당한 이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전음으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이유기도 하고요.

나는 악인곡주와 극악소마의 사백이 이미 그들에게 포섭되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이 정도 인물이 포섭되었다면 쉽게 볼 일이 아니었으니까.

―알아보시면 제 말이 사실임을 아실 겁니다. 다행히 저들은 아직 제가 이곳까지 와서 자신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를 믿어주시면 놈들을 발본색원하겠습니다.

진패천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원래라면 본교의 음모라 여기고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하령이 연관되어 있자,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지금 당신 손녀를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앞세운 내 설득은 계속되었다.

―저에 대한 여러 정보를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정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점은 확실합니다. 저는 이전과는 다른 마도를 세우려고 노력 중입니다. 적어도 상대 진영의 어린 손녀를 이용해서 일을 꾸미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천마신교와 무림맹, 사도맹은 서로에게 수없이 많은 세작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기본적인 정보는 모두 알고 있다. 내가 황천각주로 활동한 내용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거로 생각한다.

―제가 왜 손녀분을 반드시 구하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아십니까?

―왜인가?

―무림맹주의 손녀인데 한낱 시종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서 혼인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니까요. 정말 훌륭하게 잘 키우셨습니다.

진심이자 아부신공이었다.

진패천이 성큼성큼 내게 걸어왔다.

번쩍! 하는 순간 진패천의 검이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돌아가서 기다리게. 곧 답을 주겠네.”

“네, 기다리겠습니다.”

그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시선은 나를 관통할 것처럼 강력했다.

나에 대한 의심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랄 뿐이다.

* * *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서대룡은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짐을 다 싸둔 상태였다.

“아! 돌아오셨군요!”

“이게 다 뭐야?”

“뭐겠습니까? 여차하면 튀려고 짐을 싸둔 거죠.”

“나는?”

“걱정 마세요. 각주님 짐도 다 싸뒀습니다.”

“아니.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내게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잖아?”

“그렇다고 저까지 당할 수는 없잖습니까?”

“…….”

“…….”

“아! 자네의 이 썰렁한 농담이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모를 거야.”

“농담 아니었는데. 암튼 어땠어요? 무림맹주 만나보셨죠?”

“죽는 줄 알았다.”

“역시 강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서대룡이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에 안도감이 가득했다.

이제 서대룡에 대해서 알 만큼 안다. 농담이 아니라 내가 잘못되면 그는 당장 달아날 것이다. 복수하겠다고 감정적으로 달려들 성격이 아니다.

돌아가서 상황을 다 보고하고 난 후, 비로소 그의 복수는 시작될 거다. 황천각 선배에 대한 복수를 위해 마군들 신상을 다 외운 것처럼, 무림맹 무인 전부를 다 외울지도 모른다. 십 년이든, 백 년이든 죽을 때까지 복수를 꿈꾸는, 그게 서대룡이란 사람이다.

“각주님 정체는요?”

“이제 나인 줄 안다.”

“그럼 저도 알겠네요.”

“그렇지.”

“그런데도 우승해도 됩니까?”

할 수는 있고? 라고 묻기에 서대룡의 표정은 너무 진지했다.

“이젠 무조건 해야지.”

“왜요?”

“무림맹주가 천명회란 존재를 알았잖아? 그럼 자기 손녀가 우승해서 그들의 목표가 되길 바라겠어?”

“제가 우승해서 대신 그들의 목표가 되어주길 바라겠군요.”

“그렇지.”

“아, 어디 할아버지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할아버지! 보고 계십니까?”

서대룡의 농담에 내가 웃으며 말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자네 인생에서 무림맹주의 응원을 받는 순간이니까.”

“아! 그러네요. 술자리 모임에서 자랑할 일 또 하나 생겼습니다. 한데 무림맹주에게 이렇게 다 밝혀도 됩니까?”

“무림맹주를 속이면서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지. 나는 앞으로도 솔직히 그를 대할 거다. 아흔아홉 개의 진실을 다 보여줄 거야.”

“그럼 나머지 한 개의 거짓은 뭡니까?”

“왜 거짓이라고 생각해?”

“네?”

“아직은 말해주지 않은 진실일 수도 있지.”

“어떤 진실요?”

나는 창밖 저 멀리 보이는 무림맹 건물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게 될 거다.”

* * *

다음 날 새벽, 잠에서 깼다.

천마호신공이 나를 깨운 것이다.

객방을 나와 일 층으로 내려가니 문 닫은 일 층 객잔에서 누군가 혼자 앉아 있었다. 아무런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는 어둠 속의 윤곽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앉아만 있는 모습만으로도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그는 바로 무림맹주 진패천이었다.

“오셨습니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위에 천룡소호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멀지 않고 곳곳에 은신한 채 주위를 철통처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진패천이 불쑥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살면서 자네 부친을 두 번 정도 만난 적이 있네.”

나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만날 때마다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지. 나를 멈추지 않게 한 것은 자네 부친이었네.”

맹주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강해지기를 열망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어제 자네가 꺼져 가고 있던 내 마음의 불씨를 되살렸네.”

자신의 기도를 받아낸 내게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의미였다. 젊은 내가 이 정도면 나중에는 어떻겠는가? 이런 위기감이 들었을 것이다.

“좋아, 이번 일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이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과연 그는 누구와 의논했을까? 그가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이후의 모든 진행 과정을 내가 알아야겠네. 이 시간부터 자네에게 내 사람이 한 명 붙을 거야. 그 사람이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거네.”

지금도 우리 주위에 누군가 은신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의 호위인 휘 만큼이나 은신술의 고수였다. 물론, 나는 그를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림맹주가 이번 일을 내게 맡기는 것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배신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를 시험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차기 교주가 될 수도 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결국 나는 마교주와 무림맹주 모두에게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천명회주는 저희 쪽에서 처리합니다. 대신 최대한 은밀하게 처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 할 일만 하고 가게.”

나는 진패천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진하령의 마음을 흔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함께 온 수하가 저를 놀립니다. 운명적인 사랑의 끝은 항상 비극이라고요. 한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비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저뿐만 아니라 손녀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는 진패천이 왜 이렇게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손녀만큼은 남녀문제로 인한 비극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때론 비극은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손녀분이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저와 사귄다고 말한 것은 단지 저에 대한 호감이나 호의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자넬 죽이려 한다는 그자 때문이란 말인가?”

“진 소저는 맹주님을 닮았습니다. 결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걱정일 때가 있지.”

“그럼 그게 누군지, 어떻게 손녀분을 압박하는지 그에 대해 알아보십시오. 그 한 번의 조사가 백 번의 걱정보다 더 손녀분과의 사이를 좋게 해줄 겁니다.”

잠시 날 노려보듯 응시하던 진패천이 한마디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맡은 일이나 잘하게.”

저 멀리 사라져가는 맹주의 뒷모습을 보다가 난 이 층 객방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허공에다 말했다.

“제가 잘 땐 함께 주무세요. 어디 가면 말씀드릴 테니까.”

괜한 친한 척에도 은신한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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