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69화 (169/214)

제169회 너보다 더 예쁜 여자가 있다.

비무대회만큼이나 화려한 시상식이다.

우승자에게는 금패와 상금이 주어졌다. 더욱 영광인 것은 무림맹주가 직접 시상을 해준 것이다.

군웅들은 서대룡을 연호했다. 서대룡은 평생 살면서 자기 이름이 이렇게 많이 불려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겠지.

서대룡에게 금패를 전해주면서 무림맹주가 말했다.

“훌륭한 실력이었네. 앞으로 무림의 평화를 위해 헌신해 주게.”

“감사합니다.”

하지만 맹주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전음으로 보냈다.

―그 도법으로 정파의 무인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반드시 내 손에 죽게 될 거네.

서대룡은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얌전히 금패와 상금만 챙겨서 내려왔다. 마인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상을 챙겨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으니까.

준우승한 진하령에게도 역시 상패와 상금이 주어졌다.

“잘했다.”

“죄송해요.”

“이제 느꼈느냐? 이 강호가 얼마나 넓은지?”

“네, 용은 아니더라도 뱀은 될 줄 알았는데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실감했어요.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할아버지.”

그걸로 충분했다. 무림맹주는 흡족한 미소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상을 받고 비무대를 내려오던 진하령이 힐끗 저 멀리 서 있는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그녀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친구 잘했어, 라는 감정이 전해졌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진하령의 눈에 왈칵 눈물이 맺혔다. 지금까지 별생각이 없었는데, 검무극을 보자 괜한 설움이 북받쳐 오른 것이다.

군웅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기에 그녀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진하령이 시상식 자리에서 울었다더라, 분해서 울었다더라. 이런 소문이 나는 것은 정말 끔찍했으니까.

옆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뭐라 했지만 쳐다보지도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곳을 떠났다.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은 바로 조신이었다. 낭패한 얼굴의 그는 그녀를 뒤따라가지 못했다. 그의 품에는 그녀의 우승을 기념하는 선물이 들어 있었다.

우승을 축하한다는 글자를 비수에 새겼기에 그녀에게 줄 수도 없었다. 그녀가 질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우승한 그녀에게 이걸 멋지게 줬어야 했는데.

“젠장! 빌어먹을!”

그의 시선이 서대룡을 향했다. 서대룡은 아직도 축하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촌놈이 우승까지 했다고? 이게 말이 돼?’

주인 놈은 우승하고, 시종 놈은 자기가 혼인할 여자를 유혹하고. 정말 쌍으로 쳐 죽일 놈들이었다. 이 일의 결말이 결코 좋을 수 없었다.

그렇게 조신은 화가 잔뜩 난 상태로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선 조신이 흠칫 놀랐다. 한 남자가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천명회주의 명을 전하는 철곤(鐵坤)이란 자였다.

처음에 조신은 이 철곤이란 자가 심부름꾼을 가장한 천명회주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철곤이 뿜어내는 기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자가 일개 수하라고? 그럼 천명회주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자지?’

아직 천명회주를 직접 보지 못했는데 자신이 이번 일을 무사히 끝내면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어쨌든 자기 방에 허락도 없이 와 있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조신은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오셨소?”

“날 부른 건 조 공자 아니시오?”

“제가 불렀다고요?”

“진하령과의 혼사는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소?”

“물론이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조신은 진룡장의 후계 다툼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 이들 천명회였다. 자신들과 손을 잡으면 후계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천명회의 도움을 받아 후계자가 된 것까지는 좋았다.

후계자로 확정되자 저들이 한 가지를 요구했다. 바로 무림맹주 손녀와 혼인하라는 것. 불가능한 요구는 아니었다. 진룡장이라면 무림맹주와 사돈을 맺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문이었으니까.

조신은 아버지를 설득했고, 막대한 돈을 무림맹에 지원하면서까지 이번 혼사를 성사시키려 했다.

소룡전 시기를 택한 것도 그녀를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가문과 어딜 가도 잘 생겼다는 소릴 듣는 자신이라면, 어렵지 않게 진하령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 빌어먹을 시종이란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시종 뒤에 줄을 서 있다고 들었소.”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들으셨소? 그놈은 내 수하요.”

조신이 자신 있게 말하자 철곤이 빤히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역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주눅이 들었다. 만약 자신을 주눅 들게 하는 이 살기가 의도된 것이었다면, 조신은 결코 기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신은 느꼈다. 이 살기는 저 남자의 타고난 본성에서 나온 살기였다. 사람 죽이는 일에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그런 원초적인 살기. 그에게 함부로 개겼다간 난도질당한 채 더러운 시궁창에 버려질 것만 같은 그런 공포감을 주는 살기.

“그자가 수하라고요?”

“내가 진하령과의 혼인을 위해 포섭했소. 그를 이용해서 혼사를 성공시킬 거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시종 놈에게 십만 냥을 주기로 약속하고 한편으로 만들었으니까.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철곤은 또다시 조신을 응시했다.

만약 이 시선이 자신을 파악하려는 어떤 똑똑한 자의 시선이라면 오히려 괜찮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시선은 무심함 쪽에 가까웠다. 진실 따윈 중요하지 않은, 그래서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살귀의 무뚝뚝한 시선.

눈앞의 철곤만 봐도 알 수 있듯, 이자들은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배후가 누구였다더라. 이런 흔한 소문 속의 그저 그런 배후가 아니다.

이들은 특별했다. 이쪽에서 약속을 지키면 상대도 반드시 보상을 안겨줄 그런 자들이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악인들이지만, 그렇기에 얻어낼 것도 확실히 얻어낼 수 있는 그런 자들이었다. 그랬기에 이자들과 손을 잡았던 것이고.

철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갔다.

“이리 와서 저걸 보시오.”

조신이 조심스럽게 걸어가서 그의 옆에 섰다.

“저기 부러진 묘목이 오다가 내가 밟아서 꺾어버린 묘목이오. 누가 심었는지 너무 촘촘히 심었소. 저러면 두 나무 모두 거목으로 자랄 수 없지.”

철곤이 천천히 조신을 쳐다보았다.

“우린 당신이 거목으로 자라주길 바라고 있소.”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임을 조신은 안다.

철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거목이 되든, 안 되든. 천명회주가 죽이라면 자신을 죽일 거고, 살려두라면 살려둘 것이다. 그에게 자신은 저기 꺾인 묘목조차 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거목 같은 소린 네 자식에게나 가서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참견과 압박을 받는 것은 딱 질색인 그였으니까. 악당들에게 예의를 차려봤자 더 만만하게 보기나 할 뿐이니까.

하지만 조신은 감히 그러지 못했다.

“당신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요.”

“축의금 준비하고 기다리겠소.”

철곤이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조신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과 공포, 짜증과 분노가 모두 뒤섞인 한숨이었다.

혼사 문제도 그렇고, 시종도 그렇고, 천명회도 그렇고. 모든 문제가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여태껏 편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이 새로운 난이도의 국면으로 접어든 그런 느낌. 물론 그렇다고 조신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제대로 되돌려주지.’

그 말을 아직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자신의 가문을 무림에서 가장 강한 곳으로 키워낸 다음의 일이었으니까.

* * *

“상금이 자그마치 만 냥이나 돼요!”

갑자기 생긴 공돈에 서대룡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서대룡이 오천 냥을 내게 주었다.

“자, 같이 딴 우승이니, 반씩 나눠요.”

“나중에 후회하려고?”

“전 오천 냥만 해도 충분합니다. 이걸로 장 군주랑 이 무인에게 한턱내고. 또…….”

“또?”

“저 응원해준 여인에게도 맛있는 것도 사주고요.”

“만나기로 했어?”

“아뇨, 아직 이름도 모르는걸요.”

곧 알게 될 거다. 그녀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서대룡에게 접근해 올 테니까. 과연 어떤 방법으로 올까?

“그녀는 제가 우승하기 훨씬 전부터 저를 응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특별하죠.”

벌써 그 여인에게 푹 빠진 서대룡이었다.

“참, 연회는 함께 가실 거죠?”

무림맹에서 우승자와 본선 진출자들을 모두 초대해서 축하연회를 열었다.

“가야지.”

“저는 잠시 연회에 갈 때 입을 옷 좀 사오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제가 옷 한 벌 사드리겠습니다.”

“나는 됐어. 너나 좋은 옷 사 입어.”

“그럼요, 정말 이번 기회에 비싼 옷 한 벌 사 입을 겁니다!”

신난 서대룡이 자리를 비우자 나는 허공에다 말했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했소. 당시 상황이 너무 급해서.”

내 주위에 은신하고 있는 맹주가 보낸 무인에게 한 말이었다. 서대룡을 데리고 충의에게 갈 때, 쾌속보로 내달렸기에 그는 나를 쫓아오지 못했다.

무림맹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가 내 주위에 다시 은신한 것을 느꼈지만, 서대룡과 수련한다고 그에게 따로 말을 걸 여유가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기분이 나빴겠지.

하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은신 무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 명령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미안한 것은 미안한 거고. 나는 그에게 서대룡에게 접근한 여인이 천명회 사람이란 것을 말하지 않았다. 굳이 미리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 * *

나는 연회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서대룡이 되어야 했으니까. 나는 정말 시종이라도 된 듯, 안쪽 동태를 살피며 연회장 밖에 서 있었다.

한데 어떻게 알았는지 진하령이 내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왜 안 들어오고?”

“그냥 답답해서.”

“잠깐 걸을까?”

“좋지.”

그녀와 함께 내원을 산책했다.

“나 사실 결승 비무 전에 당신 찾아갔었어. 찾아가서 무슨 말 하려 했는지 알아? 당신이 부탁하면 져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놀리려고 했어.”

그녀는 여전히 비무에서 진 것이 부끄럽고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평소보다 말이 많았고 빨랐다.

“이렇게 질 줄도 모르고. 정말 웃기지? 그거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잠이나 오려나 모르겠네. 그나저나 어디 갔다 왔어? 참, 이번에 당신 도련님 어느 조직에 들어가게 되려나? 당신은…….”

난 쏟아져 나오는 그녀 말을 끊었다.

“친구야, 그만.”

그제야 진하령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잠시 마음을 안정한 그녀가 속마음을 밝혔다.

“어제 지고 당신을 보는데 눈물이 나려고 하더라.”

“한 번쯤은 져도 된다.”

사실 여러 번 져도 된다. 계속 나아가려는 의지만 있다면. 나이 들어서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실패인데, 이때는 어찌 그렇게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졌을까?

어쩌면 그래서 젊은 시절이 더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작은 일 하나에도 온몸과 정신이 펄떡펄떡 반응하던 그때 그 시절이.

“벌써 그런 약한 마음 먹고 싶지 않은데.”

“맹주 손녀라는 부담감부터 내려놔. 맹주님은 맹주님이고, 너는 너잖아. 그 부담감 때문에 좋아하질 못하잖아. 이 큰 대회에서 준우승이나 했는데.”

진하령이 싱긋 웃었다.

“뭐야? 벌써 기분이 나아졌어?”

“응. 당신이 날 위로해주려고 애쓰는 모습 보니까 기분이 좋아졌어.”

“쉽네. 기분 좋게 해주기.”

“앞으로도 자주 해줘.”

그녀는 서대룡이 무림맹에 들어올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당연히 나도 함께 살 거라 여기고 있었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그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돌아간다고? 왜?”

잠시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고향에 여자 있어? 좋아하는 여자?”

“있지.”

순간 그녀가 흠칫 놀랐다. 내가 너무 쉽게 대답해서였는지 그녀는 반신반의했다.

“너보다 더 예쁜 여자가 있다.”

“나보다? 그럼 당신 말의 신뢰도가 확 떨어지는데?”

“너는 호북일미잖아? 저쪽은 천하제일미야.”

그녀가 긴장을 풀며 웃었다. 내가 자신을 놀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음에 꼭 보여주세요, 그 천하제일미!”

“기회가 되면.”

과연 이안과 진하령이 만나게 될 날이 올까?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안은 뭐 하고 있으려나? 이 순간에도 무공수련에 빠져 있겠지? 과연 한계를 뛰어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갔을까? 아! 보고 싶다, 이안아!

내원을 산책한 후 진하령과 함께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연회장에 도착해서 창문으로 안을 쳐다보니 서대룡은 후기지수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속마음이 어떤지는 몰라도 다들 웃으면서 서대룡과 친분을 쌓으려는 모습들이었다. 이제부터 서대룡은 무림맹의 핵심 정예조직으로 들어가서 승승장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도련님 행복해 보이네.”

키 작고 우울한 인상의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옷이 날개라고 인물도 평소보다 훤했다.

그래, 오늘 하루는 마음껏 즐겨라.

서대룡을 바라보던 진하령이 내게 말했다.

“난 당신과는 이렇게 대화를 많이 했으면서, 정작 날 이긴 당신 도련님하고는 제대로 말도 못 나눠봤네.”

“가서 이야기 나눠 봐.”

“싫어. 여기 있을래. 들어가봤자 위로밖에 더 받겠어? 당신 위로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해!”

그때 연회장으로 새로운 이가 들어섰다.

상대를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바로 서대룡을 응원하던 여인이었다.

그녀를 본 서대룡도 깜짝 놀랐다. 초대받은 이들만 참석한 연회였는데 그녀가 등장한 것이다.

대체 초대받지 않은 그녀가 어떻게 들어온 것일까?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여인은 서대룡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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