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회 욕망은 옷과 같아서.
나는 전적으로 서대룡에게 이 상황을 맡겼다.
서대룡은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목소리로 휘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얻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편했으면 좋겠습니다. 절뚝거리고 피 흘리지 않는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 길을 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뒤쪽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던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방금 서대룡이 했던 말은 내게 했던 말과 반대로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재치를 발휘하는 서대룡이었다.
휘장 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솔직하군.”
서대룡은 첫 질문을 무사히 넘겼다. 이제 휘장 뒤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저 시종을 자네 오른팔로 삼고 싶다고?”
“눈치도 빠르고 외모도 출중해서 분명 쓸만한 일이 있을 겁니다.”
조이백이 내게 물었다.
“만약 네 주인의 명령과 내 명령이 상충된다면 어찌하겠느냐?”
“저는 오직 도련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무림맹주가 와도 변하지 않을 사실입니다.”
“충성심이 대단한 자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휘장 뒤에서 조이백은 비웃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충성심을, 아니 애초에 사람을 믿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볼 때는 서대룡도 가소로울 텐데, 하물며 시종이었으니. 나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조이백이 다시 서대룡에게 물었다.
“내가 사람을 죽여 달라고 해도 죽일 건가?”
흠칫 놀란 서대룡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누군지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죽어 마땅한 자라면 죽일 수 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죽이라고 한다면?”
서대룡은 대답을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죽이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휘장 뒤에서 조이백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었네, 농담. 이 사람아, 우리가 마교도 아니고 그런 사악한 짓을 저지르겠는가?”
서대룡이 당황함을 애써 감추며 울지도 웃지도 못할 표정을 지었다.
“자네도 농담했다는 것을 아네. 소룡전 우승자인 자네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겠는가?”
“맞습니다.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서대룡이 어색하게 대답하며 식은땀을 닦았다. 서대룡은 연기를 잘하고 있었다. 누구 봐도 촌에서 올라와서 성공에 미친 애송이였다. 이런 자리에 시종까지 거느리고 와서 오른팔로 삼겠다는 정말 우직한 촌놈으로 보일 것이다.
“욕망은 옷과 같은 것이네. 자기 몸에 맞지 않는 것을 입으려 하면 옷이 찢어지거나 몰골이 볼썽사나워지지.”
분수에 맞는 야망을 가지라는 훈계처럼 들렸다. 그러자 서대룡이 고개를 들고 불쑥 물었다.
“그럼 어르신이 입고 있는 옷은 어떤 옷입니까?”
네 야망은 무엇이냐는, 그야말로 당돌하고 건방진 질문이었다.
잘했다, 대룡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려면 자꾸 흔들어대야 한다.
“만약 그런 고약한 일을 맡기지 않으신다면, 저를 도와줘서 어르신이 얻는 이득은 무엇입니까? 촌놈인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이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절대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걸요.”
휘장 뒤 조이백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오히려 서대룡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이런 류의 사람을 이용하기 더 쉽다고 느낄 테니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기를 발출해서 조이백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전면에서 상대하는 사람은 서대룡이었지만, 진짜 싸움은 내가 하고 있었다.
“훗날을 위해 투자하는 거네. 거목이 되려면 묘목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아! 어르신의 큰 뜻을 제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룡아, 죄송할 필요 없다. 내가 경험한 악인 대부분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긴 투자를 하지 않는다.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그들에게 수하들은 언제나 소모품에 불과하다.
만약 그들이 묘목에 투자한다면, 그 나무들을 바람막이 삼아 자신이 거목이 되기 위해서겠지.
서대룡에게 투자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뭔가 시킬 일이 있어서다. 사람을 죽이게 하든, 무림맹 기밀을 빼 오게 하든. 밀어준 만큼 받아내려 할 거다. 아니, 준 것보다 더 받아내려 할 거다. 그게 악당들의 거래 방식이니까.
내가 확인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천명회주냐? 아니면 당신도 포섭당한 것이냐?
조이백이 서대룡에게 말했다.
“자네의 솔직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네. 앞으로 정도 무림을 받쳐 들 거목으로 성장해주게.”
“감사합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린 방을 나왔다.
대문으로 걸어 나가며 서대룡이 풀죽은 목소리로 소옥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대답을 실수한 것 같습니다.”
자책한 표정으로 서대룡이 그녀에게 물었다.
“소 조장님도 그 질문을 받았습니까? 모르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요.”
“저도 받았어요.”
“뭐라 대답하셨습니까?”
“저는 죽일 수 없다고 했어요.”
“아! 나도 그렇게 대답했어야 했는데. 제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눈에 뭐가 쓰였었나 봅니다.”
내가 넌지시 대화에 끼어들며 소옥에게 물었다.
“정말 그런 일 안 시킵니까?”
소옥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만난 이후 지금까지 그녀는 내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의 여인이라면 나를 보면 이성적인 관심을 보이기 마련인데, 소옥은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여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안다. 오직 자기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나에게 이렇게 관심이 없는데, 서대룡에게 저렇게 잘 대하는 것만 봐도, 그녀의 야망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그녀는 너무 큰 옷을 입으려 하고 있었다.
“당연히 안 시키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녀의 차가운 반응은 얼핏 감히 시종 따위가 그런 질문을 하느냐란 분노처럼 보였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불쑥 튀어나온 저 날이 바짝 선 반응은 다른 종류의 죄책감임을.
‘저질렀구나.’
조이백의 명령을 받고 누군가를 죽였던 것이 틀림없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궁금해서.”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서대룡이 나서서 나를 야단쳤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네.”
그렇게 우린 장원의 대문 앞에서 그녀와 헤어졌다.
“어르신을 소개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우리끼리라도 뭉쳐야죠.”
소옥은 서대룡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뒤에 있는 나를 차갑게 노려보고 가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서대룡이 내게 말했다.
“세상 여자들이 다 그녀처럼 나와 각주님을 대했으면 좋겠어요.”
“내게 너무 가혹한 말이잖아?”
“저는 평생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는데요.”
서대룡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이것도 연기야?”
“이건 제 현실이죠.”
“자네란 사람이 바뀌었으니 현실도 바뀔 거다.”
서대룡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차마 기대에 찬 저 얼굴 보면서 ‘그래도 여전히 여자들은 잘생긴 남자를 좋아할 거야’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층 밝아진 얼굴로 서대룡이 물었다.
“이번 만남에서 알아내신 것이 있나요?”
일단 배후에 조신의 아버지인 조이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
서대룡도 눈치챈 것이 있었다.
“소 조장, 저자 밑에서 뭔가 나쁜 짓 하고 있는 것 같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대룡은 분통을 터뜨렸다. 소옥과 조이백 모두를 향한 분노였다.
“젠장! 그런 짓까지 해서 뭘 얼마나 성공하려고? 돈 없고 절박한 사람들 이용이나 해 먹고! 각주님, 이자들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어디 서대룡만 분노했겠는가? 뿌리까지 확실히 뽑으려고 참고 있을 뿐. 그게 아니었다면 진룡장주는 저 장원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그 과정에서 소옥도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당연히 그래야죠.”
서대룡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서대룡은 그녀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돈도 없고, 배경도 없이 본교에 뛰어든 자신이나, 무림맹에 뛰어든 그녀나 결국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나는 잠시 통천각에 전서구를 보내고 갈 테니, 먼저 돌아가 있어.”
“마존들을 부르실 겁니까?”
“돌아가는 상황만 보고할 거다.”
그들의 도움을 더 받아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상태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후계자 시험이다. 되도록 내 손으로 처리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마존들이 보고 싶었지만 좀 참고.
“이번 일은 무림맹주와 처리할 작정이다.”
그와 깊은 인연을 맺어 두는 것은 나중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서대룡을 먼저 보내고 나는 허공에 말했다.
“휘장 뒤에 있던 사람 목소리 들었을 거요.”
은신하고 있는 무인은 휘장 너머를 직접 보진 못했겠지만, 분명 조이백의 목소리는 들었을 것이다.
“긴가민가 고민할 필요 없소.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 맞소. 긴급 상황이니 당장 맹주님을 만나게 해주시오.”
* * *
골목길에 한 대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마차에 올라타니 무림맹주 진패천이 타고 있었다.
“아마 수하에게 보고받으셨을 겁니다. 소룡전 우승자를 포섭하려는 자와 우리가 만났다는 것을요.”
“들었네.”
이제부터 나는 대화를 전음으로 했다.
―수하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으셨을 테니, 본론을 말씀드리지요. 그는 진룡장주였습니다.
―진룡장은 대대로 정파무림을 대표하는 문파 중에서도 명문이었네. 천명회 같은 자들에게 포섭당했을 리 없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휘장이 있었다던데?
―그 휘장을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틀림없었습니다.
여전히 무림맹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진하령과 혼사까지 진행하려던 곳이었으니, 더욱 믿기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나를 의심하면 의심하지 진룡장주를 의심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들인 조신 역시 천명회에 포섭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천명회와 한패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맹주의 놀람은 더욱 커졌다.
―자네 말은 천명회가 그들을 따로 포섭했단 말인가?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아니면 아버지가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자식을 포섭한 것일 수도 있고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천명회주는 대단한 놈이었다. 부자를 따로 포섭해서 따로 이용하는 자였으니까.
조이백이 천명회주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에게조차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포섭한 것이니까.
―상대가 이런 미친놈이기 때문에 이번 일을 완전히 해결하기 전까지 아무도 믿어선 안 됩니다.
무림맹주가 인상을 굳혔다. 저 말을 마교의 이공자에게 듣고 있으니 정말 답답한 마음이 들 것이다.
―만약 다른 자였다면 제가 은밀히 처리했을 겁니다. 한데 맹주님과 혼사까지 오가고 있던 상대이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왜 호의를 베푸는 건가?
―맹주님을 존경해서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진 소저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본교를 위해서죠. 무림맹에서 사고가 터지면 결국 본교에도 영향을 미치니까요. 저는 아버지가 무림맹의 위기를 무림일통의 기회로 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언급하자 진패천의 눈이 강렬해졌다. 게다가 무림일통이라는 자극적인 말까지 나왔다.
―저는 감히 아버지를 입에 담으면서까지 거짓말을 할 정도로 배짱이 큰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니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나는 호랑이처럼 덮쳐오는 맹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였기에 내 말에 담긴 진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으리라 믿었다.
―좋아, 자네 말대로 진룡장주라고 치세. 왜 그가 이런 짓을 저지른다고 생각하는가?
―맹주님과 혼사를 진행하고, 무림맹 무인들을 포섭하고. 그럼 이유는 한 가지지 않겠습니까?
진패천도 답을 알고 있었다.
―내 자리인가?
―미래에 조신을 무림맹주 자리에 앉히기 위한 사전포석일 수도 있습니다. 불경한 말씀이지만 맹주님을 암살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저들이 어떤 속셈인지는 저들 입을 통해서 들어야 정확하겠지만, 그게 뭐든 맹주님이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은 아닐 겁니다.
진패천은 인자한 성격의 군자형 맹주가 아니었다. 그는 역대 어떤 맹주보다 패도적이고 성격 또한 불같은 사람이었다. 손녀 일이 개입되어 있어서 최대한 조심하고 있을 뿐, 봉인이 풀리면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알겠네. 지금부턴 내가 직접 확인하지.
당장이라도 진룡장주를 붙잡아와서 진실을 밝히고 싶은 그였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는 현재로선 드러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무림맹 무인을 후원하는 일은 무림과 관계가 깊은 상단이나, 무림 문파들이 공공연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가 천명회와 관계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아내야 합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 일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저와 둘이서 해결하시죠. 저를 믿어주신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본맹을 무시하지 말게. 자네가 방법이 있다면 우리도 방법이 있다네.
―무림맹을 무시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
―기억나십니까? 처음 제가 목숨을 걸고 제 신분을 밝히던 순간이요.
내가 이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을 파헤칠 수 있었음을 주지시켰다. 진패천은 그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는 남자였고, 진짜 무인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맹주를 이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 손에 이번 일을 맡겨둘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제가 닷새 내로 해결하겠습니다. 그 기한을 넘기면 맹주님이 직접 해결하십시오.
내 말에 진패천은 깜짝 놀랐다.
“정말 닷새 내로 해결할 수 있겠나?”
“대신 맹주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야 합니다.”
“어떻게 할 작정인가?”
“저쪽에서 맹주님 혈육을 이용해서 일을 꾸미려 했습니다. 그럼 그대로 돌려줘야지요.”
진패천이 차갑게 웃었다.
“그것 하난 마음에 드는군.”
잠시 숙고하던 진패천이 결정을 내렸다.
무림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무림맹주와 마교 이공자와의 합동작전 시작을 알리는 말이 진패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진행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