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회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하령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렇게 빠른 경공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주변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그 어떤 경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대체 어떻게 부딪치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거지?’
놀랍고도 경이로웠다. 한편으로 묘한 기쁨도 느껴졌다.
‘이 사람이 이렇게 고수였다고?’
이 정도 경공술을 발휘할 수 있는 무공 수준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경지.
‘평범한 시종이 아니다.’
이 사실이 이렇게 좋아할 일인지 모를 일이지만, 그녀는 기뻤다. 그와 자신 사이에 그어져 있던 넘을 수 없던 선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미친 듯한 속도로 내달리던 검무극이 잠시 멈춰 서자,
“……나 잠깐만 내릴게.”
그의 등에서 내린 진하령이 휘청거리다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몇 번이나 심호흡하고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뭐야, 당신? 걸음마를 경공으로 배운 거야?”
검무극은 미소를 지은 채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다. 그 순간 진하령은 깜짝 놀랐다.
자신을 쉬게 해주려고 멈춘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 멀리 달려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놀랍게도 앞서 달려간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를 따라잡았어!’
잠시 멈춰선 이유는 할아버지를 추월하지 않으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보다 더 빨라?’
그녀는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천하제일고수라 생각했다. 천마가 더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할아버지가 천마를 이길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할아버지를 따라잡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습격했던 자를 옆구리에 끼고 달렸고, 이 사람은 자신을 업고 달렸다. 비슷한 조건에서도 할아버지를 따라잡다니?
정말 이 상황에서 이런 상투적인 물음을 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생각나는 것은 이 말밖에 없었다.
“당신 진짜 정체가 뭐야?”
그러자 검무극이 대답했다.
“검연. 일이 끝나면 연기처럼 사라질 사람이다.”
“그래, 연기처럼 사라질 거면 적어도 진실은 말해주고 가. 진짜 당신 누구냐고? 이렇게 실력을 밝혔으니, 정체도 밝힐 생각이었던 것 아니야?”
검무극이 드디어 자신의 기도를 드러냈다. 지금껏 보여줬던 존재감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에 한 가지 심상이 떠올랐다.
창창한 하늘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은 너무나 넓고 푸르렀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퐁당!
이내 그것이 물에 비친 하늘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물에 손을 담갔고, 서서히 몸이 잠겨 들었다.
얕은 줄 알았는데 깊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저 심해에는 무엇이 있을까? 순간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의 마음에 떠오른 심상이 사라졌고 그녀가 현실로 돌아왔다.
그때, 들려온 한 마디.
“검무극. 천마신교 교주의 둘째 아들이다.”
진하령은 잠시 멍하게 있었다.
‘뭐? 천마신교? 교주? 아들?’
처음에는 뭔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한데 대체 저 말의 어느 부분을 잘못 들은 것일까? 천마신교를? 교주를? 아들을?
“잘못 들었어. 사문이 어디라고?”
“천마신교.”
“또 잘못 들었어. 어디라고?”
“너희들이 마교라 부르는 거기. 천마신교.”
마치 비몽사몽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진하령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 여자 눈이 이렇게 컸나? 싶을 때쯤 그녀가 검을 뽑아 들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검이 검무극을 겨눴다. 날카로운 검 너머에서 그녀가 말했다.
“다른 농담은 다 받아줘도 마교로 농담하는 건 안 돼!”
무림맹의 후기지수들에게 본교가 어떻게 여겨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마교는 어려서부터 심어진 근원적 공포였으며 악의 무리였고 자신들이 무공을 익히는 이유기도 했다.
그런데 천마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그녀의 놀람이 얼마나 컸겠는가?
겨눠진 그녀의 검이 덜덜 떨렸다. 태어나 이렇게 놀라고 두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에 비해 검 끝에 서 있는 검무극은 너무나 차분했다. 마치 그 하늘처럼 맑고 조용했으며 그 바다처럼 깊은 기도였다.
그때 문득 드는 한 가지 의문.
“할아버지도 당신 정체를 아셔?”
“아신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마교의 이공자라면 할아버지가 그와 단둘이 있게 할 리가 없는데?
“적어도 내가 널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으시는 거지. 그러니까 그 검 이제 내려라.”
그녀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아깐 너무 놀랐었는데, 할아버지가 알고 계신다는 말에 진정이 되었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천명회라는 신비 세력이 무림에 등장했다. 그들을 뒤쫓던 중 이번 소룡전에서 널 포섭하려 한다는 정황을 파악했지. 이후에 맹주님께 내 신분을 밝히고 함께 배후를 쫓는 중이다. 아마 손녀 일이 아니었다면 맹주께서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겠지. 그것도 마교 이공자와 함께.”
그녀는 대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맹주님은 끝까지 신분을 알리지 않기를 바라셨다. 한데 내가 그러지 말자고 했어.”
“왜?”
“그건 널 무시하는 일이니까. 내 신분을 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라 믿으니까. 시종이나, 천마의 이공자나.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달라지는 게 왜 없어?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남자란 것 빼곤 천지 차이잖아!”
“그런가?”
검무극이 웃었고, 진하령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 결국 따라 웃었다.
시종이란 신분의 선이 사라지고 마교 후계자란 새로운 선이 생겼다. 앞의 선은 억지로 넘어설 수나 있지, 뒤의 선은 너무나 높고 위험천만해서 잘못하다간 정마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선이었다.
“기분 나빴으면 풀어.”
“못 풀지.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했는데, 어떻게 풀어? 평생 안 풀 거야.”
하지만 말과 달리 그녀는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마교의 이공자란 사실에 묘한 흥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아까 동호에서 나보고 맹주 되란 말 무슨 뜻이었어?”
“말 그대로야. 더 강해지고, 더 많은 경험을 쌓아서 맹주 되라고.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무림맹주의 친구가 천마고?”
“그러면 좋겠지만, 이쪽은 워낙 험악해서. 내가 살아남아서 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왠지 농담만으로는 들리지 않았기에 진하령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 마음을 담아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진짜 신분 알았으니까. 정식으로 악수해.”
검무극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진하령이 그의 손을 꼭 잡더니 이내 어색했는지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마교 이공자와 악수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자, 가자. 우리도 빨리 가야 해.”
검무극이 업히라고 등을 돌렸다.
그녀가 다시 업혔다. 처음 업혔을 때와 지금과는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나중에 사람들에게 자랑해야겠네. 소싯적에 천마 등에 업힌 이야기 푼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
* * *
철곤은 밀실에 갇혔다.
맹주가 직접 제압했기에 다른 사람은 그의 혈도를 풀어주려고 해도 풀어줄 수가 없었다.
방에 혼자 앉아서 그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우연히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우연히 맹주가 그곳에 나타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손녀를 호위했던 것도 아니다. 호위했다면 천룡수호대가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번 기습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밖에 안 된다. 그걸 알고 있었던 사람은 조신밖에 없는데.
그때 한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왔다.
“너는?”
상대를 알아본 철곤이 깜짝 놀랐다. 들어온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팔을 자르려고 했던 그 겁쟁이 시종이 아니었다.
“아!”
철곤이 탄식했다. 그는 검무극을 맹주의 수하라 생각했다. 천명회를 뿌리 뽑기 위해 맹주가 직접 움직였다? 그러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다 맞아떨어졌다.
검무극이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네가 천명회 소속이란 것 알고 있다.”
철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명회주가 누군지 밝혀주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여전히 철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무극은 은은한 살기를 드리운 채 말없이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 천명회를 느꼈다. 음습한 살기로 침묵하는, 그들은 바로 이런 조직인 것이다.
“그래, 말하고 싶어도 너도 천명회주가 누군지 모르겠지.”
어차피 철곤의 이용 가치는 맹주에게 붙잡혀 가는 것을 조신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철곤이 입을 열었다.
“마혈을 풀어주고 남자답게 한판 붙자.”
철곤의 눈이 살기로 이글거렸다.
쉬이익! 푸욱!
순식간에 뽑혀 나온 검무극의 검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마혈을 풀어주고 싸워도 어차피 일 초 지적이었겠지만, 검무극은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림맹주 진패천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검무극이 말했다.
“이들에게 어떠한 기회도 주시면 안 됩니다.”
진패천은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철곤의 죽음 따윈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지금 진패천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거침없는 이 젊은 마교후계자였다.
“이제 조신을 잡아들이시죠.”
“겁을 먹고 숨어버렸을 수도 있네.”
그러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제 발로 저를 찾아올 겁니다.”
* * *
과연 검무극의 예상대로였다.
검무극이 객잔으로 들어가려는데 죽립을 눌러 쓴 조신이 다가오더니 팔을 잡아당겨서 골목으로 데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건 제가 물어볼 말씀입니다. 그자가 제 팔을 자르려 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팔을 자르기 전에 내가 등장할 예정이었다. 근데 그 전에 맹주가 등장했지. 왜 맹주가 나타난 거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모른다고?”
“당연하죠. 일개 시종인 제가 무림맹주가 하는 일을 어떻게 아냐고요? 조 공자가 일을 처리하다가 비밀이 새어 나간 것 아닙니까?”
믿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그래, 맞다. 이놈에게 맹주에 관해 묻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
“절 죽이려 했던 사람은 맹주님에게 잡혀갔고, 진 소저와 전 돌아왔죠.”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조신이 차갑게 말했다.
“새끼야,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쉬이익!
진하령에게 선물로 주려던 그 비수로 검무극의 목을 찔렀다.
하지만 그의 손목은 어느새 검무극에게 잡혀 있었다.
“맞아, 나 때문이야.”
탁탁!
검무극이 순식간에 그의 마혈과 아혈을 제압했다.
너무 놀란 조신의 두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잠시 후, 조신은 앞서 철곤이 죽은 밀실에 끌려와 있었다. 시체는 치웠지만, 그가 흘린 피 냄새가 공간에 남아 있었다.
조신은 두려운 얼굴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 시종 놈이 자기보다 고수란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문이 열리고 검무극이 들어왔다.
조신이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당신 누구요?”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그 어쭙잖은 자존심 때문에 병신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종이면 어떻고, 네가 은밀히 손잡은 천명회면 뭐가 달라지나? 중요한 것은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이다.”
조신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적어도 천명회에서 나온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맹주 쪽 사람이다!’
조신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진하령을 기습했던 자가 다 자백했다.”
그 말에 조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살기 가득하고 무서웠던 철곤이 이렇게 쉽게 자백을 해버렸다고? 붙잡혀와서 채 몇 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대체 뭘 자백했다는 거요?”
“네가 시켜서 진하령을 납치하려 했다고.”
조신이 버럭 소리쳤다.
“이건 당신이 계획한 일이잖아!”
“내가 언제?”
“뭐?”
조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맹주님이나 그 가족을 해치려는 일은 가장 엄중한 죄로 취급된다는 것 알아? 만약 죄가 밝혀지면 이유 불문 참형이지.”
참형이란 말에 조신은 공포에 휩싸였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뭐요?”
그를 응시하던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 보이는군. 좀 자 둬.”
피익.
한 줄기 지풍이 그의 수혈을 제압했다.
조신이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었다.
밀실 밖에는 안쪽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패천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계획은?”
“저자의 부친인 조이백을 낚아야지요. 맹주님께서 그를 만나서 조신이 천명회란 조직에 포섭되었고, 그들의 명령을 받아 진 소저를 죽이려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말해주십시오.”
검무극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그럼 조이백은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겁니다. 그가 천명회주인지, 아니면 단지 천명회주에게 포섭된 자인지도 이제 알게 되겠지요. 만약 그가 천명회에 포섭된 것이고 아들까지 포섭된 사실을 몰랐다면, 그는 천명회에 배신감을 느끼고 천명회주를 맹주님에게 넘길지도 모릅니다. 물론 맹주님께서 숨통을 열어주셔야겠지요.”
“만약 그가 천명회주라면?”
“그렇다면 자식이라도 버릴 거라 생각합니다.”
검무극의 말을 듣던 무림맹주는 다시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자가 천마가 되면 정파무림이 쉽지 않겠군.’
이렇게 젊은데도 이 정도 추진력과 통찰력이면, 나이가 들었을 때는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 순간 천명회주보다 검무극이 더 까다로운 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은 무림맹주를 걱정했다.
“미리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뭔가?”
“천명회주를 밝혀내게 된다면, 마무리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 후계자 시험이라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치밀함으로 볼 때 놈을 살려뒀다간 뇌옥에서도 일을 꾸밀 자입니다. 나중에 반드시 후환이 될 겁니다.”
공명정대하게, 혹은 법대로 처리하면 천명회주나 그 일당들을 뇌옥에 가둬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무림맹주의 신분으로 쉽게 대답할 부분은 아니기에 진패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검무극이 나직이 덧붙였다.
“제가 싹 쓸어버리고 조용히 사라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