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회 누가 세 번째인가?
혈천도마는 수련 중이었다. 내가 이번 시험을 치르기 한참 전부터 수련에 돌입했으니, 그는 꽤 오랜 기간 쉬지 않고 수련 삼매경이다.
“정말 전쟁 준비라도 하시는 겁니까?”
내 말에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늙으면 하루하루 사는 게 전쟁이다.”
“저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달려가서 혈천도마에게 와락 안겼다.
“징그럽게 뭐 하는 짓이냐?”
혈천도마가 기겁하며 나를 억지로 떼어냈다. 솔직히 아버지에게 이렇게 안기고 싶은데. 그랬다가 구화마공으로 얻어맞을까 봐 겁나서 시도를 못 하고 있다.
“보고 싶었습니다, 어르신.”
“어디 한 십 년 못 본 사람처럼 구는구나.”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를 땅에 쑥 박았다.
그리고 그 도에 기대섰다. 이럴 때면 저 칼이 그의 친구처럼 보여서 참 보기 좋다.
“천명회주는?”
“죽었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많았을 텐데.”
“이번에 손에 피를 많이 묻혔습니다.”
내 대답에서 씁쓸함을 느꼈는지 혈천도마는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술을 가져와서 따라주었다.
“어쩌겠나? 자네 운명이 그런걸. 마시고 털어버리게.”
나는 그가 준 술을 시원하게 비웠다. 마치 혈천도마가 내 손에 묻은 피를 씻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내려주는 술이었고, 위로였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말로는 갚을 수 없었으니까.
“대공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가 쉽지 않을 거네. 능력이나 자질은 자네에 미치지 못해도 천마가 되겠다는 집념만큼은 자네보다 강한 사람이야.”
그런 형을 살려서 가려니 힘든 일인 것이고.
“참, 제자는 만나보셨습니까?”
“아까 왔다 갔다.”
“후계자로 정하신 건 정말 잘하셨습니다.”
“두고 봐야 알지.”
“녀석은 누구보다 잘할 겁니다. 참, 소룡전 우승했다는 것도 들으셨겠네요.”
“우승했어?”
“지면 죽는다고 적어두셨는데 어떻게 우승을 안 합니까? 소룡전이 아니라 천하제일비무대회가 열려도 우승해야죠. 그리고 누구 무공인데 지겠습니까?”
정말 우승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혈천도마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이럴 때 보면 서대룡에 대한 애정이 분명 있다.
“어휴. 그 수다쟁이가 그걸 자랑 안 할 걸 보면 어르신을 얼마나 어렵게 여기는지 알겠네요. 좀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사제 간에 편하면 결국 탈 나기 마련이다. 암튼 한껏 시건방져져 있겠군. 지옥 수련이 필요하겠어.”
아, 서 조사관. 이건 내가 미처 예상 못 한 거네. 미안.
“그만 가봐. 다른 마존들도 봐야 할 것 아니냐?”
“아뇨. 다른 마존들은 천천히 볼 겁니다. 오늘은 어르신만 뵙고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이렇게 확실하게 좋아해야 한다. 모두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처럼, 그 사람의 본심을 떠나 다들 그렇게 여기게 되니까. 저 사람은 원래 다 좋아하잖아? 적어도 혈천도마에게는 받고 싶지 않은 오해다.
“아부는 여전하군.”
하지만 혈천도마의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피어 있었다. 이런 것 은근히 좋아하면서 말이다.
“마존들에게 인사하러 가. 자넬 위해서 다들 나서줬는데, 인사하는 게 예의다.”
“네, 그럼 그러지요.”
“속으로는 가고 싶었으면서.”
“어르신이 언제나 최우선이란 것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다시 도를 휘두르는 혈천도마를 뒤로 하고 거처를 나섰다.
악인곡에 가기 전에 집에 들러서 백색 가면을 챙겨서 갔다. 악인곡을 갈 때만큼은 가면을 쓰고 가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백색 가면을 쓴 무면객들은 이제 예전처럼 나를 특별히 주시하지 않았다. 나에 대한 눈빛에서 적대감도 사라졌다.
극악소마와 친분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만약 저들이 날 보며 호의적인 눈빛으로 인사까지 건네면, 지금보다도 더 친해진 것이겠지.
그렇게 무면객의 안내를 받아서 악인곡주의 거처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무공수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이 마존들이라 생각해서 이들을 만나는 것도 일이었는데, 이제는 일이 아니라 관계가 되었다. 놀랍게도 정말 보고 싶어서 찾아가는 것이다.
극악소마는 오늘도 하얀 벽을 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저 벽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저리 하는 것일까?
“저 왔습니다.”
가면을 머리 위로 올리며 씩씩하게 그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극악소마가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면 속 그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극악소마와 눈이 마주치며 이렇게 반가운 마음이 드는 날이 올 줄이야.
극악소마와는 둘이서 합심해서 목숨을 건 싸움을 두 번이나 했다. 첫 번째가 검황 백망기와의 싸움이었고, 극악소마의 사백 양처기와의 싸움이 두 번째였다.
이 두 번의 싸움 모두 목숨을 건 싸움이었고, 그 때문인지 목숨을 지켜준 전장의 동지라는 각별함이 있었다.
“천명회 일은 잘 끝냈다고 들었습니다.”
“누구 복수인데 소홀히 했겠습니까?”
사실 이번 시험은 극악소마와도 관련이 있었다. 극악소마의 사백인 양처기를 그들이 포섭했었으니까.
극악소마가 웃으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은원은 확실하죠.”
월평문의 추생에게 은원전을 주었던 일을 빗댄 말이었다. 극악소마와 은원전,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는데.
극악소마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십시오.”
상자를 열자 안에 하얀색 단약이 하나 들어 있었다.
“본문에서 내려오는 비전 영약인 백령단(白靈丹)입니다.”
알싸하면서도 강렬한 향이 금방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효능이 보통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사문에서 제게 보내온 겁니다. 사백 양처기가 죽고 평화가 찾아온 모양입니다.”
그때 사백의 명령으로 왔던 사문의 무인들을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고 돌려보낸 것이 고마워서 보낸 모양이다.
“이공자께 드리겠습니다.”
“이 귀한 걸 왜 제게 주십니까?”
“이공자 덕분에 받은 거니까요.”
진심으로 날 위해서 주는 선물이었다. 생각지 못한 선물에 나는 당황했다.
“아닙니다. 소마님 드십시오.”
그러자 극악소마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저도 이공자에게 점수를 좀 따고 싶어서 주는 것이니, 그만 거절하고 받으세요.”
“점수는 저도 따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반씩 나눠 먹죠.”
내 말에 극악소마는 깜짝 놀랐다.
“진심입니까?”
“네. 제가 욕심이 많아서 영약을 나눠 먹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두고 싶습니다. 함께 싸워서 살아남은 것을 기념해서, 반씩 드시죠.”
극악소마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그를 만난 이래 가장 맑은 눈빛이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와의 관계에서 우린 또 하나의 분기점을 지나고 있음을.
“좋습니다. 그러시죠.”
나는 흑마검을 뽑아 백령단을 정확히 반으로 나눴다.
마치 술을 마시듯 우린 동시에 그것을 복용했다.
목구멍으로 백령단을 삼켰다. 화한 기운이 입안을 가득 감싸더니 이내 녹아내리며 목으로 넘어갔다.
굉장히 독한 성질의 영약이었지만 기존의 내 내공이 워낙 심후했기에 아무런 문제 없이 약효를 모두 흡수했다. 비록 절반이지만 단전에 더해진 내공의 양이 적지 않았다.
내 두 눈이 맑고 깊은 눈빛이 빛나다가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극악소마 역시 운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있는데요?”
“지금껏 먹었던 그 어떤 영약보다 맛있습니다.”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저 함께 웃었다.
“그건 그렇고, 독이라도 주면 어쩌려고 그렇게 덥석 먹습니까? 저게 가짜 백령단이면요?”
“그래서 나눴잖습니까? 같이 죽자고.”
극악소마가 큰소리로 웃었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의 웃음은 습관적인 웃음에 불과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웃음에서 그의 감정을 느꼈으니까.
“한데 저 벽을 그렇게 보고 계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좋잖습니까? 미친놈처럼 보이고. 원래 미친놈은 함부로 못 건드는 법이지요. 왜요? 걱정되십니까? 제가 미쳐버릴까 봐.”
“조금은요.”
솔직한 대답에 극악소마가 뜻밖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본문의 심법은 하얀 벽을 보고 수련하면 더욱 증진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 그래서였군요.”
극악소마가 벽을 보고 심법수련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또 한 번 실감한다. 내 눈에 불안해 보일 뿐, 다들 각자 삶은 알아서 잘 살아가고 있다고.
“돌아와서 혈천도마를 보고 여기로 온 겁니까?”
“네.”
“일일이 다 챙기려면 힘들겠습니다.”
“아직은 넷뿐이잖아요?”
“여덟 명 다 챙길 생각이군요.”
놀랍게도 그의 예상은 맞다.
“네. 아군이든 적이든 여덟 명을 다 관리하고 챙길 겁니다.”
“버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웃고 좋다가도, 언제 어떻게 틀어질지 모를 관계다. 마존들을 쉽게 생각하면 언젠가 낭패를 당하게 될 테니까.
“예쁜 심장에게 그런 말을 해줬습니다. 무공과 삶은 연결되어 있다고요. 그게 어디 그녀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겠습니까? 제가 팔마존을 모두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면, 나를 막아서는 무공의 벽도 넘어설 수 있겠지요.”
잠시 나를 응시하던 극악소마가 평소 느꼈던 바를 전했다.
“이공자는 뭘 보고 있는 겁니까? 한 번씩 보면 이공자가 바라보는 것은 단지 후계자가 아니라, 단지 천마가 아니라, 그 너머 다른 어떤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직 서로의 눈만 바라보는 사이라서 그럴까? 내가 바라보는 저 너머를 그도 보고 있다. 더 친한 사람들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극악소마만은 느끼는 것이다.
언젠가 그에게 말해주는 날도 오겠지. 나의 거대한 적에 대해서. 그래서 또다시 등을 맞대고 삶과 죽음의 순간을 넘어서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소마님이면, 그 순간이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앞뒤 다 자르고 말했지만, 극악소마는 무슨 뜻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 순간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또 뵙죠.”
그에게 인사하고 악인곡을 떠났다. 하얀 가면만큼이나 그와의 재회는 깔끔했다.
* * *
일화검존과 취마가 술을 마시고 있어서 두 사람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친구인 두 사람은 곧잘 술을 마시곤 했는데, 마침 오늘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서 오게, 이공자!”
일화검존도 취마도 취해 있었다. 일화검존이 이렇게 취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악의 유혹에 빠지셨군요.”
“자네가 와서 어서 건져주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일화검존은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지난번 악인곡 일은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 뭐 있나? 우르르 몰려갔을 뿐이지.”
그때 취마가 불평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혈천도마와 극악소마는 이미 만났지?”
“네.”
“우린 왜 마지막인가? 왜 세 번째, 네 번째지? 왔으면 우리 먼저 보러 올 수도 있잖아?”
일화검존도 그 불평에 합세했다. 벌겋게 취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어느 분이 세 번째죠?”
이 강력한 이간질을 두 사람은 흔쾌히 받아주었다.
“나지.”
일화검존의 자신감에 취마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친구야. 미안한데 이건 나야. 난 이공자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이봐, 친구. 그게 진정한 호형호제라면 세 번째냐, 네 번째냐로 싸우고 있지 않겠지?”
“우린 술 먹고 함께 헤엄치는 사이라고.”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린 달빛 아래에서 비무까지 했어.”
그렇게 다투던 두 사람이 나를 쳐다보았다. 골라 달라는 거다. 누가 세 번째이고, 네 번째인지. 취마가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동생. 내가 마지막 아니지?”
“마지막 아니죠.”
“그렇지?”
그가 활짝 웃던 그때.
“중간은 되죠. 여덟 마존 중에 네 번째인데.”
일화검존이 승자의 술을 마셨다.
“친구야, 형제라고 다 친한 건 아니잖아?”
취마가 입을 삐죽 내밀며 술을 마셨다.
나는 두 사람이 너무나 고마웠다. 이들이 어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들이겠는가? 애초에 세 번째, 네 번째 이런 자리에 있을 사람이겠는가? 나를 위해 참아주는 거다. 기꺼이 삼 등, 사 등 싸움을 해주고 있는 거다.
“두 분께 오늘 딱 말씀드리죠. 앞에 두 사람 아시잖아요? 까다롭고 꼬장꼬장하고 괴팍하고. 반대로 두 분은 어떻습니까? 마존분들 중에 제일 마음 넓으시잖아요?”
“마음 넓어서지? 만만해서 아니지?”
취마의 물음에 내가 짐짓 움찔하는 표정을 짓자 두 사람이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셋이서 건배하고 술을 비웠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취마가 다소 놀라운 소식도 전했다.
“얼마 전에 도마와 나, 여기 검존이랑 셋이 술 한잔했다.”
세 사람이 술을 함께 마시는 모습은 쉽게 연상이 되지 않았다.
“어떠셨어요? 좋으셨어요?”
“좋았겠냐?”
취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칼부림은 안 났죠?”
“거의 날 뻔했지.”
“그럼 됐습니다.”
그러자 일화검존이 말했다.
“되긴 뭐가 돼? 다신 그런 자리에 날 부르지 마!”
그래, 사이가 틀어진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화해하면 세상에 싸움이 왜 있겠는가?
어쨌든 의미는 있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취마가 노력하는 중이었으니까.
내가 술잔을 들며 눈빛으로 말했다.
고생했어, 형.
취마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좋은 말 백 번보다 그 고생, 한 번 알아주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는 법이다.
“복귀 인사 드렸으니 저는 이만 갑니다.”
나는 작별을 고하고 일어났다. 더 마시자고 취마가 바짓가랑이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것, 억지로 일어났다.
마존들과 노는 것은 다음에도 할 수 있지만, 아버지와의 사냥은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다음 날 새벽, 나는 예전보다 더 큰 혁낭을 짊어지고 아버지와의 두 번째 사냥을 위해 천마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