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회 어지간한 각오가 없다면.
이 바람 소리를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세상 끝 신비 계곡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같았다. 그만큼 시원하면서 경쾌하고 이 세상에는 없을 것 같은 그런 소리였다.
나는 대성의 쾌속보가 내는 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했다. 나는 이 소리에 중독되고 말 것을. 이 미칠 것 같은 속도만큼이나 매력적인 소리였다.
처음에는 내가 빨랐다.
정말 대성에 이른 쾌속보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당연히 구성의 경지보다 훨씬 빨랐다. 처음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을 때, 사실 나무에 부딪치고 바닥을 뒹굴고. 우당탕하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보고 비웃으시고.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벌일 각오도 되어 있었는데.
한데 난 생각보다 잘 달렸다. 그 빠른 속도를 내 시력과 육체가 받쳐주고 있었다. 아마도 본교와 무림맹을 오가면서 구성의 쾌속보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제 막 대성에 올랐지만, 아버지와 비슷한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극도의 집중력과 심력 소모가 필요했다. 달리다가 너무 어지럽고 힘들어서 속도를 줄였다. 속도가 줄어들자, 아버지가 내 옆까지 쇄도해 오셨다.
“제법이구나!”
“누구 아들인데요!”
아버지는 놀라고 감탄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버지의 얼굴에 양보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아들이든 누구든, 불이 붙으면 절대 지지 않으려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아들아, 할 말이 있다.”
“뭡니까?”
심각한 어조였기에 내심 긴장하던 바로 그때였다.
바로 그때였다.
꽝!
난 아버지에게 한눈팔다 나무에 부딪치고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아버지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난 벌떡 일어나서 뒤따라 뛰었다. 다행히 호신강기가 몸을 지켜주었기에 아무런 부상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반칙입니다, 반칙! 아버지!”
내가 한눈팔다 부딪친 거를 반칙이라 우겼다. 물론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 빨리 달렸다.
다시 아버지 뒤를 따라 뛰었다.
달려보니까 알 수 있었다. 이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무공이 어떤 무공이냐가 아니라는 것을. 풍신사보의 쾌속보와 천마비행술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경공이었다.
문제는 시력이었다. 경공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속도를 눈이 받쳐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익숙해지면 내가 무조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난 신안술 덕분에 한계를 넘어선 시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저 멀리 아버지의 등을 보고 달렸다. 처음 사냥 가서 아버지의 등을 봤을 때처럼, 이젠 달리면서 아버지의 등을 본다.
그때도 외로워 보였고, 지금도 외로워 보이지만, 달라진 게 하나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평생 달렸던 그 어떤 순간보다 지금이 좋았다. 아버지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은 점점 커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버지 생각을 하는 순간 한 번 더 넘어졌다. 아주 잠깐 집중력을 잃어도 어김없이 부딪치고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일어나서 뒤를 쫓았지만 결국 아버지를 따라잡지 못했다.
본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먼저 천마전으로 가버리셨다.
나 같으면 기다렸다가 한바탕 놀리고 갔겠지만, 아버지는 놀리는 것도 참을 줄 아시는 분이다. 다음에 만났을 때 놀리시겠지.
나는 천마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또 한 번 감사를 전했다.
풍신사보의 대성을 이룬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덕분이다. 쾌속보만 빨라지기만 한 것이 아니다. 암영보는 더 은밀해졌고, 점멸보는 더 큰 위험에서도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으며 명왕보는 진짜 염왕의 걸음이 되었으니까.
* * *
그날 저녁, 풍류주점에 술모임 삼인방이 모였다.
“오랜만에 오셨으니 오늘 술은 제가 삽니다.”
주인장인 조춘배가 특별히 오늘 술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서대룡의 무사귀환을 축하해서였다. 그러자 서대룡이 호의는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이번에 제가 비무대회에서 우승하는 바람에 상금을 타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건하게 한잔 살 겁니다. 그러니 맛있는 요리 싹 다 부탁드립니다.”
“우승이라니! 축하드립니다, 조사관님.”
“감사합니다.”
“이공자님도 별일 없으시죠?”
“그럼요.”
조춘배가 일 층으로 내려가자 드디어 서대룡의 자랑이 시작되었다.
“아, 이 고독한 조사관의 멋진 모험담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캬! 처음에 무림맹 건물을 봤을 때 말이죠, 전 운명을 느끼며…….”
대서사시를 시작하는 서대룡을 보며 이안과 장호가 마주 보며 웃었다.
워낙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서 서대룡의 모험담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세요. 비무라고 해도 실전이었잖아요? 실전 경험도 많이 없으신데, 우승까지 하다니.”
장호야 실전 경험이 많았지만 이안은 매일 수련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대룡의 이 성과가 너무 놀랍고 부러웠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운명적이고도 비극적인 만남도 있었지요.”
서대룡은 자신을 응원해준 여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슬픈 결말까지도.
“……그녀는 천명회에서 보낸 여자였어요.”
이안이 펄쩍 뛰며 욕을 퍼부어주었고, 장호가 그것도 다 경험이라고 위로해주었다. 두 사람이 어찌나 열을 내는지 서대룡은 쌓였던 상처가 모두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니 제가 이 술자리가 제일 기다려졌지요.”
“우리가 더 기다렸다고요.”
“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합시다.”
서대룡은 두 사람이 너무나 고마웠다. 천하제일미라 해도 손색없는 여인과 천마신교의 정예조직인 마군의 수장이 자신을 위해 기다려주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있다. 자신이 뭐라고.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도 진짜 무인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건 검무극과 혈천도마지만, 이들 두 사람이 미친 영향도 매우 컸다.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항상 있었던 것이다.
이안과 장호는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황천각 조사관도 무인이라면 무인이지만, 지금 서대룡이 말하는 무인은 다른 의미의 무인임을 이안과 장호는 알고 있었다.
“축하받을 일 맞죠? 저 솔직히 일찍 죽을까 봐 겁납니다. 두 분은 겁 안 나세요?”
그러자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삶과 죽음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 다 정해져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이 무인께서는 운명론자셨군요.”
“그런 것 같아요.”
반면 장호는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저는 항상 죽음을 겁내고 살고 있습니다.”
“정말요? 오히려 장 군주님이야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아뇨. 자다가도 여러 번 깹니다. 죽는 꿈도 자주 꾸고요.”
이안도 서대룡도 몰랐던 일이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서대룡이 흥취가 동했다.
“저도 이번에 죽을 뻔했습니다.”
서대룡이 벌떡 일어나더니 윗옷을 풀어 헤쳤다.
“제 몸에 정파 놈들이 남긴 상처가 네 개가 남아 있습니다. 어깨 이 상처, 팔강전에서 당한 상처입니다. 구멍이 두 개지요? 여긴 결승전에서, 여기 이 상처는…….”
* * *
나는 일 층 계산대 옆에서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마지막 서대룡이 옷을 풀어 헤치는 모습에 나와 조춘배가 함께 웃었다.
정말이지 취마가 보면 당장 가입하겠다고 달려들 술 모임이다.
조춘배가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정말 좋은 분들이십니다. 한 사람이 없으면 남은 두 사람이 와서 그 한 사람을 그리워하더라고요.”
이안이 없을 때도 있었고, 서대룡이 없을 때도 있었으니까.
“저는 이만 돌아가겠소.”
“함께 하시려고 오신 것 아니셨습니까?”
“저렇게 즐거운데 오늘은 셋이 뭉치게 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조춘배가 주방에 가서 술을 한 병 가져왔다.
“제가 아껴둔 술입니다. 가져가셔서 한잔하시고 주무십시오.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조춘배는 정말 가족처럼 나의 귀환을 기뻐했다.
“이번에 무림에서 귀한 분을 보고 왔는데, 다음에 술 마실 일 있으면 소개시켜 드리겠소.”
“그럼 저야 좋지요.”
그 사람이 무림맹주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 일을 어찌 알겠는가? 풍류주점에서 무림맹주가 술 한 잔 기울이는 날이 오게 될지도.
“술 고맙소.”
그렇게 작별을 고하고 주점을 나섰다.
달빛을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보고 싶은 사람은 또 있었다. 고월과 풍천교주. 당장이라도 쾌속보로 달려가고 싶은데, 두 사람은 지금 본교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랫동안 교를 비웠다가 돌아왔기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두 사람을 보는 것은 좀 미뤄야 할 것 같다. 그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함께 있으니까.
거처로 향하다가 대취림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 깨어서 함께 술 마셔 줄 사람을 떠올리니 취마가 먼저 떠올랐다.
과연 취마는 취몽루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취객 여빈이 나를 나룻배에 태우고 호수 가운데 섬으로 향했다.
“요즘도 취마님 술 많이 마십니까?”
“전보다는 많이 줄었습니다. 오늘도 한 병만 마시고 계시네요.”
“다행이군요.”
“이공자님 덕분입니다.”
“그게 어디 저 때문이겠습니까? 여 무인께서 챙겨주시고 걱정하시는 덕분이죠.”
여빈이 취마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좋게 말해주었다. 이런 여인이 옆에서 취마를 챙겨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발이 제대로 먹히려면 수하가 아니라 아내가 되어야겠지만.
마음 같아서야 나서서 이어주면 좋겠지만 함부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괜히 잘못 끼어들었다간 잘될 관계를 망칠 수도 있었으니까.
취몽루 난간에서 취마가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큰소리를 그를 불렀다.
“형.”
둘만의 자리였기에 나는 편하게 형이라고 불렀다. 사람을 부르는 호칭 한마디가 누군가를 얼마나 기분 좋게 만들 수도 있는지, 취마는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동생 왔어?”
“우리 못난 사 등 형, 혼자서 술 마실 것 같아서 왔지.”
“팔마존 중 사 등이 어디냐? 중간도 쉽지 않아.”
그렇게 배가 섬에 도착했고, 취몽루에 올랐다.
“갑자기 어쩐 일이냐?”
“한잔하고 싶어서.”
“잘 왔다.”
취마와 둘이서 술을 마셨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술만 마셨다.
취마는 술을 잘 알기에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잘 안다. 지금 상대가 대화를 나누면서 마시고 싶은지, 아니면 지금처럼 호수에 뜬 달을 안주 삼아 조용히 마시고 싶어 하는지.
“아버지와 사냥 다녀왔어.”
“이번에는 꽤 길게 다녀온 것 같던데? 대단하다. 교주와 단둘이 그렇게 긴 시간을 어찌 있냐? 나는 미쳐버릴 거다.”
“뜻밖에 미치도록 재미있을 수도 있어.”
취마가 그럴 리는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가 요리하는 모습을 봐야 하는데.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아버지와 이야기하다 알게 된 건데, 아버지가 독왕이나 권마를 높이 사는 것 같던데?”
“교주가 높이 산다면 권마겠지.”
취마는 단정하듯 말했다.
“독왕은 아니고?”
“교주는 원래 독 쓰는 것 안 좋아해. 대놓고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다들 아는 이야기지. 독왕도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는 거고.”
“그럼 권마는 왜 높이 사는 거지?”
마존들에 대해 조사한다고 했었지만, 회귀하고 그들을 만나면서 새삼 느꼈다. 사람을 안다고 말하려면 직접 만나고 대화하고 겪어봐야 한다고. 그래도 잘 모르는 게 사람이라고. 내가 알았던 것은 그들의 행적이었지, 그들이 아니었다. 권마 역시 마찬가지다.
“권마와 딱 한 번 둘이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어땠어?”
취마가 잠시 술잔을 내려다보며 그때를 떠올리더니 홀짝 술을 마셨다.
“어지간한 각오가 없다면 이 사람을 이기기는 쉽지 않겠다. 이런 생각을 들게 하더라.”
취마가 다른 마존을 높이 사는 것을 처음 들었다.
“한데 권마는 왜?”
“형 뒤에 오 등 한 명 만들어 줄까 하고.”
권마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미였기에 취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권마를 건들면 대공자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래서야. 가만있지 말라고.”
“무슨 뜻이야?”
“이제 슬슬 형하고도 승부를 봐야 하잖아?”
본격적인 후계자 싸움이 시작될 거란 의미였기에 취마의 눈빛도 덩달아 강렬해졌다.
“자신 있어?”
“형 믿고 가는 거지.”
형을 상대하기 위해 형을 믿는다는 말에 취마가 웃으며 빈 술병을 흔들었다.
“그 말 들으니까 한 병 더 마시고 싶어지네.”
내 마지막 술을 그의 잔에 부어주었다.
“참아. 이제부턴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야 하니까.”
* * *
다음 날 오후, 나는 불패권마가 있는 동권문으로 향했다.
“권마님을 뵈러 왔네.”
입구를 지키던 철권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수장인 권마가 대공자 편에 섰다는 공공연한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오시지요.”
철권 하나가 나를 안내했다.
동권문을 오가는 철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하얀색 무복, 푸른색 무복, 붉은색 무복, 검은색 무복. 그들은 각각의 지위에 따라 무복 색이 달랐다. 성별과 나이, 신체 능력도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몸에 쇠붙이 하나 없는 맨몸이라는 점.
오직 맨주먹에 인생을 건 철권들 사이로 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