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82화 (182/214)

제182회 질문 있습니다!

불패권마도 그렇겠지만 나도 몰랐다.

내가 권마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하지만 절벽을 일격에 무너뜨리겠다는 권마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뭔가가 불타올랐다.

그건 그의 불가능한 도전에 내 주먹도 내지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었다.

두 눈을 응시하던 권마의 시선이 내 손을 향했다.

“그 아기 손으로?”

아, 내 손이 아기 손이 되는 날도 오는구나.

“권마님에 비하면 아주 작고 귀엽습니다만, 사람들 세상에서는 나름 괜찮게 타고난 손이기도 합니다.”

“허튼소리 말고 돌아가게.”

찬바람 풀풀 풍기며 권마는 그대로 그곳을 떠나버렸다.

나는 다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이걸 한방에 무너뜨릴 수 있는 주먹이 날아든다면 과연 호신강기가 버텨낼 수 있을까?

불끈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 *

그날 오후 아버지를 찾아가서 오랜만에 바둑을 뒀다.

한 수, 한 수 바둑돌이 놓이는 청량한 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쩌면 아버지와 두는 바둑이 이렇게 편안한 건 비무를 닮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비무대에 오르면, 혹은 바둑을 두기 시작하면 상대에게 아무 말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두었던 대국에선 두 집으로 이겼었는데, 오늘 드디어 여섯 집 차이로 졌다. 아버지의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고 참 못 말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둑이든 무공이든 지고는 못 사는 아버지였다.

“시간 날 때 사마군사에게 바둑 좀 배워라.”

“그래야겠습니다.”

“오늘은 왜 온 거냐?”

아버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것을.

“사람을 보면 느낌이 딱 오는 겁니까?”

“오늘따라 유난히 조급한 수를 두더구나. 하수들은 원래 표가 나는 법이지.”

“하수라니요! 오늘 처음 이기셨으면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아버진 바둑을 두면서 내 마음까지 신경 쓰셨다는 의미였으니까.

“아버지께 허락받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뭐냐?”

“권마에게 권법을 배워볼까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마치 예상했다는 듯 아버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네가 배우고 싶으면 배울 일이지, 내 허락이 왜 필요한 거냐?”

“당연히 말씀드리고 배워야죠. 아버지 허락도 받아야 하고요.”

“내가 허락 안 하면?”

“허락받도록 더 노력해야죠.”

나는 아버지에게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처음에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마음이 컸습니다. 권마를 두들기면 형이 어떻게 나오나, 응수타진을 한 거죠. 한데 오늘 권마가 그러더군요. 일격에 절벽을 무너뜨리는 게 자기 목표라고.”

아버지는 그 목표를 알고 계셨던 모양이다. 내 말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 말에, 절벽이 아니라 제 경계심이 무너졌습니다. 멋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절벽을 무너뜨리고 싶어졌습니다.”

“네 고질적인 약점이지. 딱 죽기 좋은 순진한 감성.”

맨 처음 그 말씀을 하셨을 때는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라고 하셨다. 이제 싸구려가 빠지고 순진함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갔다. 딱 그 차이만큼 아버지와 친해진 것이다.

“그 순진함이 장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습니다. 그 덕분에 얻은 마존들도 있고요.”

“얻어? 마존들이 과연 진짜 네 편이라 생각하느냐?”

아버지는 정말 아무도 믿지 않으셨다. 어쩌면 아버지의 저 가치관이 교를 이끄는 교주에게는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을 빼고는 세상에 절대적인 마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존들의 마음이 변할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갑자기 마음이 변할 일은 잘 없다. 사람이 변하는 건 대부분 상황이 변해서니까.

“그건 알고 있느냐? 권마와 무공으로 얽히다 보면 그와 붙어야 할 순간이 반드시 올 거다. 절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그럼 네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권마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친해지려 했다가 더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다는 의미.

“제가 이기면 어떻게 됩니까?”

“그의 목표가 절벽이 아니라 네가 되겠지.”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누군가의 목표가 되는 삶도, 한 번쯤 살아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마에게는 정수정도(正手定道)가 필요할 거다.”

꼼수로 요행을 부리지 말고 정수로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었다.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돌아섰을 때, 뒤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내가 백돌이다.”

“세 판 연속해서 이기셔야지요?”

“그 법은 오늘부로 바뀌었다.”

뭐 천마가 바꾸시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럼 전 하루라도 빨리 제 군사에게 바둑을 가르쳐야겠습니다.”

* * *

다음 날에도 권마를 찾아갔다.

며칠 수련에 빠졌던 그가 오늘은 철권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에 대한 반응은 첫날과 똑같았다. 나를 힐끗 쳐다본 후 다시 철권을 향하는 시선. 하지만 우린 첫날과는 분명 다른 관계에 서 있었다.

“철권들 옆에서 함께 배워도 되겠습니까?”

권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험상궂은 얼굴. 다른 사람이 보면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표정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내게 권법을 배우려는 것이냐?

나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네.

권마는 가소로운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어떻게 나오나 보자는 태도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검을 옆에 풀어두고 그대로 철권들의 자세를 따라 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권법을 배우는 순간이었다. 회귀 전에도 권법을 배운 적은 없었다. 손에서 검을 놓고 싸운다?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나를 스치는 철권들의 눈빛들엔 놀람이 가득했다.

천마의 이공자가 자신들과 함께 권법을 배운다고 나섰으니, 오늘 저녁 술자리에 안주는 필요 없으리라.

권마는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철권들의 동작을 따라 취했다. 수십 명이나 배우는 이 무공이 불패권마의 독문권법일 리 없다. 동권문의 무인들이 배우는 기본 권법일 것이다.

오히려 좋다. 태산을 무너뜨리는 권법도 바로 이 기본적인 동작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나는 동작을 정확히 취했다.

며칠간 그들의 수련을 지켜보기도 했고, 무엇보다 눈앞에서 수십 명이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누군가 틀린 자세를 취해도 올바른 자세를 취한 이들이 더 많았다. 덕분에 나는 정확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첫날 수련이 끝나고 모두 조용히 해산했다.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인 듯 그곳을 떠났다.

다음 날에도 수련에 참가했다.

동권문의 철권들은 실력에 따라 모두 네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하얀 무복을 입는 백권(白拳), 푸른 무복을 입은 청권(靑拳), 붉은 무복을 입는 적권(赤拳), 검은 무복을 입는 흑권(黑拳).

지금 내가 함께하는 이들은 흰 무복을 입는 백권이었다. 물론 백권이라고 무시해선 안 된다. 동권문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부터가 무인으로선 하수가 아니란 의미였으니까.

백권들과의 수련이라서 시간 낭비였냐고? 그럴 리가? 오히려 기초부터 다져갈 수 있어 더 좋았다.

내 무공경지는 작은 동작 하나에서 수십 개의 변화를 예상할 수 있는 경지였다.

주먹을 내지르는 기본동작 하나에서 수십 가지의 상황을 떠올렸고, 변화를 예상했다. 풍신사보와 지금 펼치고 있는 초식이 머릿속에서 합쳐졌다. 비천검법과 훌륭하게 합쳐진 풍신사보였으니, 당연히 권법과도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나는 권법 수련에 열중이었지만 권마는 여전히 나를 믿지 않는 듯 보였다.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래봤자지, 네가 한 달을 나오겠느냐? 일 년을 나오겠느냐?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그는 가소로운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나였다. 난 다음 날엔 질문도 했다.

“질문 있습니다!”

내 외침에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수련 중 질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오직 시키는 대로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그래서 아마 질문은 내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놀라기는 권마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내가 질문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이 복호출현(伏虎出現) 초식에서 오른쪽 발을 회전할 때, 왼발의 자유도가 어느 정도까지 허용됩니까?”

모두 왼발을 완전히 고정하고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살짝 움직여 줄 때 더 효과적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주위에서 동요가 느껴졌다. 이래도 되나? 아니, 감히 질문을 한다고? 권마께서 어떻게 나오실까? 괜히 우리까지 날벼락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오만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뜻밖에 권마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마지막 회전을 돌았을 때, 몸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왼발에 제약을 두지 않아도 되네.”

권마의 명쾌한 대답에 나는 그가 시킨 대로 초식을 발휘해 보았다.

왼쪽 발이 살짝 들릴 정도로 움직였지만, 그것은 다음 초식을 가장 빠르게 연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한 동작, 한 동작을 끊어서 연마하고 있지만, 실전에서는 연속동작이 중요했으니까.

처음으로 철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초식의 변화가 아님을. 바로 오랫동안 굳어졌던 동권문 수련의 변화라는 것을.

난 다음 날에도 수련장을 찾았고 그 다음 날에도 찾아갔다.

일부러 질문을 위한 질문은 하진 않았다. 그냥 정말 궁금한 내용을 질문했고, 내가 질문을 하면 철권들은 귀를 기울였다. 자신들도 궁금했지만, 감히 묻지 못했던 질문을 내가 대신 하는 셈이기도 했다. 수련을 마치고 내게 인사하는 철권들이 생겼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을 때, 나는 그곳에서 무공을 배우는 철권 중 가장 제대로 된 자세로 초식을 구사했다. 심지어 수련을 마쳤을 때, 내게 동작을 물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칠 일째 되는 날이었다.

정식 수련이 끝났지만 혼자 남아서 수련을 계속했다. 나는 권법이 이끄는 새로운 세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 처한 상황을 다 떠나서, 권법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권마가 나를 지켜본다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초식에 몰두했다. 오직 내뻗은 주먹에만 집중했다.

이 주먹에 무엇이 실려야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이윽고 지켜보던 권마가 입을 열었다.

“뭐 하자는 건가?”

“권마님께 권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말 내 제자라도 되겠다는 건가?”

“받아주신다면요.”

권마가 흠칫 놀랐다. 천마의 아들이 마존의 제자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심인가?”

“네, 진심입니다. 이미 아버지 허락도 받았습니다.”

“교주께서 허락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내 각오가 장난이 아님을 권마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이러는가?”

“잘 모릅니다. 다만 절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권마님에게 빠져든 것 같습니다.”

진심 반, 아부 반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깟 개수작이 통할 줄 아나? 이러면 내가 자넬 후계자로 지지할 것 같나?”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하지 마십시오. 제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형제간에 피를 보지 않고 이번 후계자 선정을 끝내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래서 형에게 권마님께서 계셔 주셔서 오히려 든든합니다. 형이 선을 넘는 것을 권마님께서 막아주실 테니까요.”

“왜 내가 막는다고 생각하지?”

“맨주먹으로 절벽을 무너뜨리려는 분이시니까요. 추잡스러운 음모나 계략이 그 주먹에 쥐어지는 순간, 영원히 절벽은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테니까요.”

“!”

“후계자 다툼에 미쳐서 날뛰는 형이나 저를 두들겨 패줄 수 있는 사람은 권마님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형도 선을 넘으려 하면 막아주십시오. 그 주먹으로 사정없이 때려주십시오.”

나를 향한 그 못마땅하고 험악한 시선을 나는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 무공에 미친 사람이라고? 뭔가에 미쳐 한 길만 파는 건 나도 당신 못지않을 거야.

다음 순간!

권마의 그 큰 주먹이 내 얼굴 앞에 와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주먹을 내질렀는데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애초에 주먹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처럼, 주먹이 얼굴 앞에 있었다.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바람 소리가 뒤쪽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꽈아아앙!

저 멀리 내 뒤쪽에 있던 담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놀랍게도 주먹이 멈춘 내 얼굴은 그대로 둔 채 뒤쪽을 완전히 날려버린 것이다. 실로 대단하고 고절한 수법이었다.

권마는 날아든 주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나를 차갑게 응시하더니 말없이 돌아서 가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저 멀리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럴수록 내 마음의 불꽃은 더욱 거세게 타오를 거야.

길의 끝에서 권마가 멈춰 섰다.

“내일부터는 청권 수련장으로 나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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