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회 쉽지 않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곳의 누구도 죽지 않았지만 죽은 것도 있었다. 지금껏 흑권들이 가졌던 허세와 허풍, 자만심은 방금 다 죽은 것이 확실했다.
당연히 나를 향한 눈빛은 완전히 달라졌다. 경외심과 두려움, 분노. 각자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감정이 담겼다.
침묵을 깬 것은 권마였다.
“이제 검 무서운 줄 알았느냐?”
“네!”
흑권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처음 너희에게 권법을 가르칠 때 검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검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때론 무서워하지 말아야 하고, 때론 무서워해야 하고. 이 두 가지 마음을 모두 가져야 한다는 것이 오늘 권마가 수하들에게 주고 싶었던 가르침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 말을 하고는 권마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수하들 앞에서 표를 내진 않았지만, 내가 보여준 신위에 그 역시 격동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은 흑권들은 평소처럼 흩어지지 못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경외심을 담은 눈빛이 곳곳에서 보였다. 태생적으로 마인들은 강자를 귀하게 여기고, 강자가 되기 위한 열망이 유난히 강한 이들이었으니까.
그들을 대표해서 천소희가 물었다.
“이렇게 강한데 왜 권법을 배우려는 거죠? 강자의 유희 같은 건가요?”
굉장히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 그 한 수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동시에 무기력하게 당한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기에 아마도 차기 권마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
나는 차분히 그녀에게 되물었다.
“권법을 배우는 게 어찌 유희가 되겠소?”
“그런데 왜 배우려는 거죠?”
왜냐고? 그 절벽을 이 주먹으로 무너뜨리고 싶은 열망이 생겼기 때문에.
“조금 전 내 검이 그대에게 날아갔을 때 내 두 손은 비어 있었소. 만약 그때 공격을 받게 된다면? 검을 회수할 기회를 주지 않을 정도의 고수라면 어떻게 해야 하오? 그때를 위해서 배우고 싶소. 상대의 방심에 꽂히는 이 주먹이 나를 살리게 될 테니까.”
천소희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심인지 아닌지 궁금하겠지만, 아직 어린 그녀가 내 마음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말을 하고서 나도 수련장을 떠났다.
나와 관련한 이들 모두의 운명이 바뀌고 있듯, 저들의 운명 또한 어떤 식으로든 바뀌게 될 것이다.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바뀌기를 바랄 뿐이다.
* * *
그날 밤, 나는 권법 수련을 하고 있었다.
백권부터 흑권까지 배운 초식을 천천히 빠짐없이 수련했다. 권마의 독문권법도 이 기본 권법이 잘 다져져야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파파파팡!
허공에 주먹이 박히는 이 소리가 너무 좋았다. 권마의 권법을 배워서 어서 대성을 이루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다.
“밤이 늦었는데도 열심히군.”
나를 찾아온 사람은 권마였다. 들을 때마다 저 무서운 얼굴과는 대조되는 차분한 목소리에 놀라게 된다. 그의 본성과 더 닮은 것은 얼굴일까, 목소리일까?
사실 나는 권마가 찾아올 거라 예감하고 있었다. 아까 보여준 내 실력에 그가 반드시 반응할 거로 생각했으니까.
“늦게 시작했으니 두 배로 노력해야지요.”
“두 배가 아니라 열 배라도 자네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권마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 실린 열기가 대답을 대신했다. 나와 싸워보고 싶은 거다. 제자와 싸울 수는 없을 테니까.
“저와 싸우고 싶으신 거군요.”
그가 내 마음에 불을 지폈듯, 나 또한 그의 마음에 불을 붙인 것이다.
“전 싸우지 않을 겁니다.”
내가 그와 싸우는 순간, 나는 권법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권마에게 권법을 배울 방법은 오직 하나다. 후계자 싸움이니, 정치적인 문제니 다 소용없다. 우린 무공으로 엮여야 한다. 나와 싸우고 싶어서 결국 가르쳐주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계획이다.
“싸우지 않겠다는 이유는?”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를 응시하던 권마가 내 거절의 이면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나를 이길까 걱정하고 있군.”
권마의 표정에 격정이 스쳤다. 불패란 이름을 단 후에 자신을 이길까 봐 걱정하는 일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일 것이다. 다들 자신에게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만 봤을 테니까.
“이공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익힌 무공은 교주에게 배운 무공이니 내가 진다 한들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나도 그의 말 이면을 들여다보았다.
“싸워보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이기고 싶은 겁니까?”
순간 권마가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둘이 차이가 있나?”
오만함에서 나온 말이라기보단 이런 쪽에 가까웠다.
“그 차이를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이기는 것에 익숙해져 계시는군요.”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앞에 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무서운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봐야 하는 것은 정말이지 주먹이 날아드는 것보다 더 위력적이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극악소마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권마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졌을 때 알 수 있을 거라는 그 말이.
“권마님이 혈천권마이거나 극악권마라면 모를까, 불패권마인 이상, 패배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내가 패배의 충격으로 약속을 어길 것이다? 날 어떻게 보고!”
불패권마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찌나 무서운지 그의 옆 땅이 열리며 악귀들이 지옥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먼저 권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럼 권마님과 승부를 짓겠습니다.”
어림없는 소리라는 표정으로 권마가 코웃음을 쳤다.
“자넨 나와 먼저 싸워야 할 거네.”
그 말을 남기고 권마가 돌아서 걸어갔다.
미안하지만 그건 당신 패가 아니다. 당신이 무공에 미쳐 있는 한, 당신이 불패의 신화를 쌓아온 이상, 그 패는 내 패였다.
나는 기다릴 수 있지만, 당신은 기다릴 수 없을 테니까.
* * *
천소희는 말없이 검무극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 그 난리 아닌 난리가 났음에도, 검무극은 평소처럼 흑권의 수련에 참여했다. 어제 일은 없었던 것처럼 수련에 몰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권들은 달랐다. 옆구리에 금창약을 바르고 나타난 그들은 전날과는 다른 열기를 드러냈다.
“난 어제 다시 태어났다.”
대놓고 이런 말을 하는 흑권까지 있었다.
이런 변화와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은 홀로 수련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동작은 그곳에 있는 누구보다 정확했고, 초식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교주 아들이니까 누가 몰래 초식을 가르쳐 줬겠지, 하는 의심은 어제 검무극이 보여준 실력으로 모두 사라졌다.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겠소?”
적권의 무인들이 그랬듯, 흑권에서도 검무극에게 초식을 물어보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이오.”
검무극은 성심껏 그가 물어보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단 하루 만에 흑권들의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졌다.
그날 수련이 끝나고 천소희가 검무극에게 갔다.
“내기에 졌으니 약속을 지키겠어요. 내게 부탁할 것이 뭔지 말하세요.”
그러자 검무극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날 권마님의 제자로 만들어 주시오.”
천소희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럼 전 교주님 후계자로 만들어 주세요.”
농담이라 여기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검무극의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가 진담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농담이 아니군요.”
“당연히 농담이 아니오.”
“저도 제자가 못 되었는데 당신을 어떻게 제자로 만들어 준단 말인가요?”
아직 이 시기의 권마는 정식 제자를 뽑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공에 완벽주의자인 권마는 제자를 뽑는 일을 대충 결정하지 않았다.
“그건 내기에 진 당신이 고민해야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할 줄은 몰랐지요.”
“그럼 왜 그때 말하지 않았소? 부탁에 제한을 둬야 한다고.”
“그야……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말이 되는 부탁을 하겠거니 했지요.”
“정말 그래서요? 혹시 당신이 이길 것 같아서 굳이 말하지 않은 것 아니고?”
그녀는 반박하지 못했다. 검무극의 말은 사실이었다. 부탁 들어주기 내기를 했을 때, 상식을 벗어나는 요구는 할 수 없다고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본능이 그녀를 말렸다.
당연히 이길 내기였는데,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으니까.
“좋아요, 인정해요.”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나오지 않았다면 그녀를 좀 더 놀려줬겠지만.
“인정하긴 뭘 인정합니까?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면 따끔하게 거절하고 잊어버려야지.”
그녀는 잠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돌아섰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어쨌든 내기에 졌는데 이렇게 가버리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가 다시 돌아섰다.
“좋아요, 제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쳐요.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이 제자가 되면 내가 제자가 될 확률이 떨어지는데, 내가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
“그 말은 틀렸소. 내가 제자가 되면 당신이 제자가 될 확률이 높아질 거요.”
“왜 그렇죠?”
“첫 제자를 받는 것이 어렵지, 이후는 물꼬가 트인 것처럼 이제자, 삼제자를 받아들일 거요. 그리고 나는 내 사매로 당신을 강력하게 추천할 거요.”
“나를? 왜죠?”
검무극이 그녀를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당신이 누구보다 잘할 것 같아서요. 차기 권마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 같아서요.”
또 장난인가 싶었는데, 검무극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녀의 가슴에 격정이 일었다. 동권문에 들어와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자신도, 동기들도. 선후배들도 모두 위만 보고 달렸다. 백권에서 흑권까지 탈락하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달렸다.
다들 함께 고생해 온 동기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해준 적이 없다.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오히려 마음속으로 은근히 바랐다. 상대가 자신보다 더 힘들기를. 상대가 경쟁에서 탈락하기를. 그래서 자신이 권마가 되기를.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저 검무극은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데. 그 긴 세월 동안 자신들은 한 번도 그런 말을 주고받지 못했다.
듣지 못해서 씁쓸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아무에게도 해주지 못한 자신의 좁은 속을 확인한 것 같아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는 버럭 화를 내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 * *
그날 밤, 천소희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자꾸 검무극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자신이 권마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검무극의 처소로 향했다.
야심한 시간이라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답답한 마음에 갔던 것인데, 놀랍게도 검무극은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진지한 수련에 자신이 왔다는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혹여라도 방해될까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한차례 초식 수련을 끝낸 검무극이 마당에 놓인 평평한 바위에 앉으며 물었다.
“차 한잔 드시겠소?”
“아뇨, 괜찮아요.”
천소희가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풍겨오는 검무극의 땀 냄새가 싫지만은 않았다.
“밤이 늦었지만 이걸 꼭 확인하고 싶어서 왔어요. 정말 제자가 되면 저를 사매로 추천하실 건가요?”
“그럴 겁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흑권 동료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실 때면 항상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 그게 무림에서 오래 살아남는 첫 번째 원칙.
“전 권마님의 무공을 배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권마 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제 사매가 되겠지요.”
정작 이런 강력한 유혹의 순간이 오니,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천마를 사형으로 둔 제 사매가요.”
그래, 이래서 다들 당하는 거겠지. 뻔히 감언이설인지 알면서도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니 속는 것이겠지.
이렇게 꼬드겨서 나를 이용하려는 거면? 실컷 이용당한 뒤 살인멸구를 당하면? 그녀 마음속에 검무극의 검이 떠올랐다. 검이 얼굴을 뚫고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하겠지. 순진한 년.
바로 그때 검무극이 그녀에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사는 게 쉽지 않죠?”
부드럽게 전해진 그 한마디가 가슴으로 훅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소리치고 싶었다. 대체 자꾸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아는 척이냐고. 쉽다고, 내 인생 잘 꾸려가고 있다고. 어려울 것 뭐가 있냐고?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려가면 되지. 위만 보고 달리면 되지.
하지만 지금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머리보다 가슴의 뜻을 전했다.
“……쉽지 않네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살면서 힘들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꺼낸 적이 없는데.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천소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갑자기 흘러내린 눈물에 그녀가 더 당황했다. 참을 사이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린 것이다.
눈물이란 것이 이렇게 갑자기 흐르기도 하는 것일까? 분명 그녀의 감정은 전혀 슬프지 않은데,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철들고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너무 당황했다.
“아, 아니에요, 이건.”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던 바로 그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역시! 천하에 바람둥이라는 서 조사관의 말이 맞았어요. 운명적인 사랑에 이어 이젠 여자를 울리기까지 하는군요.”
들어선 사람을 보며 검무극은 활짝 웃었고, 천소희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태어나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