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회 강해져서 뭐 하려고?
우린 정말 놀랐다.
권마의 입에서 ‘심야수련모임’이란 말이 나온 것도 놀라웠는데, 그 모임에 넣어달란 말을 한 것은 거의 충격적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소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고개를 들었다가 권마와 눈을 마주치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권마는 나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제가 이 모임의 장이 아니라서요.”
내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날 보는 그녀의 눈빛이 딱 이랬다. 아니, 도련님! 이걸 제게 떠넘긴다고요? 그 다급한 눈빛과는 달리 이안은 차분히 권마에게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이안이라고 합니다.”
권마는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안의 아름다움도 권마의 무서운 표정을 풀지는 못했다.
“제가 만든 모임이긴 합니다만, 제가 독단적인 성격은 아니라서요.”
이안이 천소희를 쳐다보았다. 천소희의 표정은 이랬다. 그렇다고 이걸 내게 넘긴다고요?
이안이 못 본 척 그녀에게 물었다.
“천 소저 생각은 어때요?”
천소희는 망설이지 않고 소리쳤다.
“전 무조건 찬성입니다!”
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에게 물었다.
“자네는?”
저 얼굴을 보고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아버지 정도일 거다.
“저도 찬성입니다.”
이안까지 찬성하자 그제야 권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자네는?”
“저야 당연히 반대죠.”
순간 권마의 얼굴이 꿈틀했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유는?”
“불편하니까요. 저야 괜찮다지만, 저 두 사람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특히 천 소저는 낮에도 보고, 밤에도 권마님을 봐야 하니 죽을 맛일 겁니다.”
천소희가 나의 쾌검식인 창천식보다 빠르게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또 뵐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러자 권마가 내게 말했다.
“기쁘다는데?”
“그럴 리가요? 쉽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내일부터 권마님이 우리 아버지와 무공수련을 해야 합니다.”
벌써부터 권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감추고 싶지만 감출 수 없는 불편함. 역시 우리 아버지시다.
“그렇게 낮에 같이 무공수련한다고 실컷 봤는데 밤에 또 아버지를 봐야 합니다. 자, 심정이 어떠십니까?”
반박 불가의 예였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
원래라면 권마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이런 말까지 하는데 당연히 문을 열어줘야지. 대신 입장료가 좀 비쌀 뿐이다.
“제게 독문권법의 제일권을 알려주십시오.”
권마의 독문권법은 벽력수라권(霹靂修羅拳)이었다.
거칠고 강력한 패도적인 권법으로 경지에 이른 벽력수라권이 발출되면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난다고 알려진 권마의 독문무공이었다.
벽력수라권은 총 여섯 개의 권으로 이뤄져 있는데 나는 그중 첫 번째 초식인 제일권을 알려달라고 한 것이다.
“불편한 건 저 아이들인데 왜 자네가 무공을 배우려고 하나?”
“그 정도는 이해할 겁니다. 그만큼 제가 주고 있거든요.”
지켜보던 이안과 천소희는 절대 권마가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녀들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일단 질러보았다. 어떻게든 내 목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물론 이렇게 내지른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두 번이나 몰래 이곳에 다녀갔고, 또 이렇게 모임에 들어오고 싶다는 말을 직접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역시 이 모임에 들어오고 싶은 열망이 있는 것이다.
“내가 바보인 줄 아는가?”
“그럴 리가요. 대신에 딱 그 정도 바보인 척은 해주실 것 같습니다.”
권마와 눈빛으로 대화했다. 이런 미친놈이! 네, 맞습니다. 미친놈 소리 자주 듣습니다.
잠시 나를 노려보던 권마는 그대로 돌아서 가버렸다.
사실 그는 우길 수도 있었다. 강압적으로 넣어달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넣어줘야 했을 것이다. 천소희가 나를 사형이라 부른 점을 약점으로 삼아 몰아붙이면, 무조건 그의 뜻대로 해줘야 했다.
하지만 권마는 내가 반대하자 그냥 물러났다. 그는 쪼잔하지 않은 남자다. 그는 권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긴장이 풀린 천소희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아까는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요.”
이안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원래 무섭게 생기신 줄은 알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그렇게 마음이 좀 안정되자 이안이 내게 물었다.
“한데 권마님은 왜 모임에 들어오려는 거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그녀에게 난 불쑥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외로워서?”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이안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장난치지 마시고요.”
“내가 저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나와 붙으려는 걸 거다.”
“도련님과요?”
“그래. 같이 수련하다가 수련을 빌미로 붙으려는 거겠지.”
이안은 깜짝 놀랐다. 설마 권마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
“싸우려면 낮에 싸워도 되잖아요?”
“그땐 수하들이 보고 있잖아?”
“따로 불러서 싸우자고 하면 되잖아요?”
“내가 절대 안 싸우겠다고 했거든.”
“그래서 이 모임에 들어와서 도련님과 싸울 기회를 보겠다고요?”
“지금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이안이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이 위험천만한 모임, 당장 해체합니다.”
물론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권마가 들어오고 싶다고 했다가 거절당해서 갔는데, 당장 해체했다가는 무슨 일을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한편 옆에 주저앉아 있는 천소희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검무극을 사형으로 삼은 것을 권마에게 들켰으니 그녀의 마음이 지금 어떻겠는가? 권마에게 찍혔으니 이제 차기 권마는 영원히 물 건너갔다는 생각뿐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모임, 저는 탈퇴해야 할까요?”
“탈퇴한다고 봐줄까? 아닐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해요? 기왕 이렇게 된 것, 에잇 모르겠다 해요?”
“해야지.”
“네?”
천소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더 열심히 수련해서 실력으로 실수를 만회해야지.”
그녀는 말이 쉽지,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가 물었다.
“이제 안 오시겠죠?”
“그렇겠지?”
사실 충격을 받은 그녀를 위로하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권마가 이대로 포기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두 배로 더 열심히 할게요.”
천소희가 각오를 다지는가 싶더니 이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 망했어요!”
* * *
다음 날 흑권 수련은 평소처럼 진행되었다.
권마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게 더 신경이 쓰인 천소희는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수련했다.
그 일과는 별개로 흑권들 사이에서 내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 흑권을 내 직속 수하들이라 여겼다. 언젠가 나를 위해, 나와 함께 싸워줄 사람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이 질문하면 성심껏 대답해줬고, 무공과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무림과 중원에 관한 내 해박한 지식에 그들은 깜짝 놀라곤 했다. 듣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내 이야기에 그들은 하나둘씩 빠져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권마는 먼발치에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과연 무슨 생각을 할지는 나도 궁금했다.
그날 밤.
심야수련모임에 세 사람이 먼저 모였다. 나와 이안, 그리고 천소희였다.
천소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권마님이 절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어요.”
“언제는 봐줬고?”
“…….”
“어차피 찍혔으니, 차라리 권마를 편하게 대하는 건 어때?”
“진심으로 해주는 충고인가요? 아니면 절 파멸시키려는 함정인가요?”
“당연히 우리 사매를 위한 조언이지.”
천소희가 화들짝 놀랐다.
“아직도 절 사매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응.”
내가 진심인 것을 알아차린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요. 어쩌려고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네가 권마야. 나중에 권마 자리를 물려주고 싶은 똘똘한 수하가 있어. 한데 이 녀석이 이공자 놈과 붙어서 수작을 부리다 들켰어. 한데 그 뒤로 계속 자기 눈치만 보고 있어. 너라면 어떨 것 같아?”
“싫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당당히 대해.”
“그럼 더 싫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이안이 웃었고, 천소희도 웃었다.
천소희가 마음을 다잡았다.
“좋아요! 사형 말대로 힘내볼게요! 어차피 벌어진 일, 될 대로 돼라죠. 제가 왜 이공자님을 사형으로 삼았는지 당당히 말씀드릴 거예요. 진심으로 말씀드리면 통하겠죠. 권마님 그렇게 무섭게 생겼어도 마음은 다르실 거예요. 고마워요, 사형! 힘내볼게요. 우리 앞으로도 권마님 몰래 사형, 사매 해요. 그런데 왜 표정이 그래요? 왜요? 무섭게 왜 그래요…… 아니죠? 아니라고 해줘요.”
그녀는 울상이 된 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을 향해 돌아섰다.
어느새 권마가 와서 그녀 등 뒤에 서 있었다.
세상의 모든 고뇌를 다 짊어진 천소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를 그때 권마가 불쑥 물었다.
“너는 무슨 생각으로 이공자를 사형으로 삼았느냐?”
권마는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다 들은 것이다.
천소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우연히 이공자가 우리가 배운 권법으로 이 무인과 비무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순간, 저도 저렇게 강해지고 싶었습니다.”
지금 그녀는 권마가 권법을 가르치는 상황에서 제멋대로 사형을 삼고, 무공을 배우려 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일장에 맞아 죽게 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솔직히 말했다. 머릿속에서 이러면 안 돼! 하고 말렸겠지만, 그녀의 입은 또 가슴을 대변하고 있었다.
“강해져서 뭐 하려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권마님의 뒤를 이어 차기 권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젠…… 다 틀린 것 같지만요.”
목숨을 건 대답이었지만 그건 권마가 원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 그건 네가 되고 싶은 직업 같은 거고. 강해져서 뭐를 하려는 거냐 물었다.”
“!”
순간 천소희는 당황했다.
되고 싶은 것과 하려는 것의 차이를 그녀는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권마가 되는 것만을 목표로 살아온 그녀였기에 더욱 혼란스러웠으리라.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권마에게 감탄했다.
그래, 권마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무식하게 주먹만 쓰는 사람이 아니라 똑똑한 사람이란 것, 이 질문을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나서서 그녀를 구해주었다.
“오늘은 왜 오신 겁니까?”
그러자 놀랄만한 말이 권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네에게 벽력수라권의 제일권을 전수해주겠네.”
나는 깜짝 놀랐다. 권마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은 예상했지만, 정말 모임에 들어오기 위해 제일권을 전수해 줄 줄은 몰랐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말 나와 싸우고 싶어서?
나는 물론이고 이안과 천소희도 깜짝 놀랐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심야수련모임이라는 이 작은 모임에 들어오기 위해서 권마가 벽력수라권 제일권을 전수해주려 한다는 것을.
나와 권마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우린 또 눈빛으로 대화를 나눴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디 자네만 하겠나?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자네야말로 후회하지 않겠나? 나를 이렇게까지 제대로 끌어들인 것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무공을 전수해줬다는 것은 비밀로 해야 하네.”
“물론입니다.”
권마의 시선이 두 여인에게로 향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다른 말이 튀어나오겠는가?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린 이 자리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녀들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겠지만.
앞으로도 없고 싶습니다!
무공 전수는 곧장 이뤄졌다.
권마는 내게 전음으로 벽력수라권 제일권의 구결을 알려주었다.
제일권 흑운수라(黑雲修羅).
여섯 초식 중 첫 번째 초식이지만 그 어떤 권법보다 강력한 위력을 지닌 일 권이었다. 왜 이 무공이 권마의 무공인지는 맞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권마가 내 자세까지 잡아 주며 흑운수라를 제대로 전수해주었다.
적어도 무공만큼은 진심인 그였다. 모르긴 해도 마존들 중에서 무공을 가르치는 일은 권마가 가장 잘할 거다. 이 무서운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이다.
이안과 천소희는 돌아서서 우릴 보지 않았다. 어차피 대화는 전음으로 나눴기에 봐도 상관없었지만, 무공 전수가 이뤄지는 과정을 지켜볼 정도로 예의가 없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벽력수라권 제일권을 전수받았다.
파아아앙!
언젠가 내지르는 이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터져 나올 것이다.
내가 펼치는 제일권을 보며 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위력을 발휘하려면 계속 수련을 해야 할 거네.”
“감사합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권마에게 정식으로 말했다.
“심야수련모임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와 권마, 이안과 천소희. 전혀 생각지 못한 네 사람이 하나의 모임으로 묶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권마는 우리를 놀라게 하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자, 수련해야지.”
그가 윗옷을 벗었다. 동권문에 간 후 한 번도 그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없다. 한데 진짜 제대로 수련하려는 듯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권마의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