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회 나도 그 배에 태울 건가?
“뒤에서 욕하는 건 여전하구나?”
아버지의 말에 난 웃으며 말했다.
“욕이라니요? 오해십니다! 아, 그리고 설령 하더라도 천마 욕을 하는데 어떻게 앞에서 하겠습니까? 그건 무림맹주도 못 할 일이죠. 자, 어서 앉으십시오.”
아버지가 주점에 들어온 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나일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들으라고 이야기했다. 천마전에만 계시지 말고, 놀러 좀 다니시라고.
“교주님!”
이안과 천소희가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려는 것을 아버지가 손을 들어서 제지한 후 자리에 앉았다.
특별한 기도를 발출하지 않으셨음에도 장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 허름한 객잔의 이 층은 어느새 천마전이 되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지나가다 들렀다.”
항상 하시는 말씀이지만 그럴 리가 있겠나? 과연 날 보러 오신 것일까? 아니면 권마를 보러 온 것일까?
이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씀 나누십시오. 저희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잠깐 있다 일어날 거다.”
“네! 그럼 저희는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있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이안을 보며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많이 컸구나.”
생각지도 못한 말이기에 이안은 깜짝 놀랐다. 요즘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그녀뿐만 아니라 나도 놀랐다. 아버지가 이안에게 아는 척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이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인사는 그 한마디뿐이었지만 이안은 감격했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눈빛으로 그녀가 말했다. 도련님 보셨죠? 교주님이 제 어린 시절을 기억해주고 계셨어요. 아! 감동이에요. 교주님이 절 기억해주시다니.
정말이지 이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을 거다.
아버지의 시선이 이번에는 천소희를 향했다.
“동권문에서 제일 잘 싸운다지?”
천소희 역시 기절할 듯 놀랐다. 천마가 자신에 관해서 알고 있다니? 역시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아닙니다.”
“그럼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네? 아닙니다!”
겸손의 표현으로 아니라고 했다가 또 아니라고 했다가. 그녀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구조대로 나섰다.
“맞습니다. 천 소저가 동권문에서 제일 실력이 좋습니다. 저는 차기 권마 후보감으로 생각합니다.”
천소희가 더 당황하는 바람에 구조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차기 권마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녀는 손사래까지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버지의 시선이 권마를 향했다. 자네 생각도 그러한가를 묻는 것처럼 보였다.
권마는 말없이 천소희를 쳐다봤을 뿐, 가타부타 그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이공자께서 괜히 절 놀리시는 것이니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난 그냥 장난으로 넘기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다. 아버지. 본교 권마 중에 여인은 없었잖아요? 멋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일부러 이런 말을 해주었다. 천마 앞에서 차기 권마 후보가 되어 보는 것. 열심히 하란 말 백 번보다 더 그녀에게 자극이 되지 않을까?
내 뜻을 알아주신 아버지가 천소희에게 한마디 해주셨다.
“더욱 증진하도록.”
“네!”
천소희, 오늘 잠은 다 잤다.
그렇게 두 여인부터 챙긴 후 아버지가 권마에게 말을 건넸다.
“잘 지냈나?”
“네, 교주님.”
아무리 무섭게 생기고, 아무리 몸이 좋고, 아무리 주먹이 커도, 천마인 아버지 앞에서는 아기처럼 순해졌다.
“아들놈이 자넬 귀찮게 한다면서?”
“요즘은 제가 귀찮게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오늘 이 자리 신입 환영회 자립니다. 제가 신입이고요.”
거기까진 모르셨는지 아버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셨다. 매번 내가 섭섭해하는 지점이다. 자식에게는 절대 안 보이는 웃음을 마존들 앞에서는 저렇게 지으신다.
아버지가 이안에게 말했다.
“거창한 신입을 받아서 고역이겠구먼.”
“괜찮습니다. 권마님은…….”
순간 그녀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권마를 뭐라 표현하고 소개할지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게다가 천마 앞이었으니.
당황한 이안을 놀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나였다.
“이해해 주세요. 이안이 거짓말을 못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자 이안이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권마님은 너무 멋지시고, 점잖으시고, 부드러우시고, 몸도 좋으시고, 저희도 잘 챙겨주십니다.”
순간 그곳에 정적이 흘렀다.
“몸도 좋으시고?”
설마 이안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권마도 살짝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말한 이안도 당황했다.
“제가 그랬나요?”
“응. 그 말이 네 거짓말 중에서 유일한 진실이었지.”
내 장난에 이안이 날 보며 눈에 힘을 줬다. 그만 좀 놀려요! 교주님 계시는 자리잖아요!
아버지가 권마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짓궂은 아들놈 때문에 자네가 고역이겠군.”
아시면 됐다는 표정으로 권마는 공손히 술을 받았다.
두 사람이 술을 마셨다.
편안한 듯 편하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권마는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불편해했다.
그래도 가만 보면 아버지와 권마는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실제 성격과는 별개로 일단 박살부터 내고 보자는 초강성 느낌도 그렇고.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모습도 그렇고.
“이런 모임에 들어간 것 처음이지?”
“처음입니다.”
“해보니 어떤가?”
오늘 아버지가 오신 이유가 권마가 모임에 들어온 이유가 궁금해서일까?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니 함께 젊어지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벌써 그런 말을 할 나이가 됐나? 한창 젊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자네 기억나나? 정파 놈들과 오태산(五台山)에서 사흘 밤낮을 싸웠던 일?”
“그걸 아직 기억하십니까?”
“그때 자네 정말 멋있었거든.”
“제가 더 멋있는 일로 그 기억을 못 덮어서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권마.
두 사람이 만나면 분위기는 경직되고 대화도 잘 안 나눌 것 같았는데, 뜻밖에 두 사람은 이야기를 곧잘 나눴다.
오히려 아버지는 다른 마존들을 대할 때보다 조금 더 친근하고 편한 느낌이었다.
혈천도마가 그랬다. 아버지가 마존들 중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권마라고.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권마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서 아버지를 어렵게 여겼다. 어쩌면 그래서 이 관계가 더 잘 유지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가 터지는 건 언제나 두 사람이 다 편해졌을 때니까.
그렇게 술잔이 두어 순배 오갔을 때, 기회를 보고 있던 이안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직접 뵐 기회가 있으면 꼭 감사 인사드리려고 했습니다. 지난번 일 감사 드립니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어떤 고마움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나나 아버지는 알 수 있었다. 비천검법을 전수해줘도 괜찮다는 허락을 한 일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아버지가 차분하게 한마디를 해주었다.
“큰 무공에는 큰 운명이 따르는 법이다.”
비천검법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새로운 운명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명심해서 내려주신 큰 은혜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오늘 이 순간이 이안에게 더 큰 의미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이안에게 한 수 전수해주시지요.”
내 말에 아버지의 눈빛이 살짝 가늘어졌다.
“지금 말이냐?”
“그럼 언제 또 이런 자리가 있겠습니까?”
이안이 괜찮다고 나서려는 것을 나는 미리 손을 들어서 말렸다.
“아버지에겐 한 번의 술자리지만, 이안에게는 인생을 바꿀 자리가 될 수도 있잖습니까?”
이후 말은 전음으로 보냈다.
―저 나이에 구 성까지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노력해야 이룰 수 있는지 아시잖아요? 그 어린애가 저렇게 잘 컸잖아요?
마지막 말이 와닿으신 걸까?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안에게 말했다.
“잠시 따라 나오너라.”
아버지가 이안을 데리고 나갔다.
뒤따라 나가면서 이안이 나를 쳐다보았다. 저 이대로 죽는 건가요?
나는 작별인사하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죽진 않겠지만 죽여주는 경험이긴 할 거다.
물론 대성까지 내가 이끌어주면 되겠지만, 아버지에게 한 수 지도받는 경험은 무공 경지를 한 단계 올리는 것과는 별개로, 한 마인의 인생에 큰 변화와 도움이 될 일이었으니까.
나는 권마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분위기를 깨서 죄송합니다.”
“자네와 있다 보면 항상 예상 못 한 일들을 겪게 되는군.”
“다들 그 재미로 절 좋아하시죠.”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권마가 들고 있던 술잔을 비운 후 내게 말했다.
“아까 저 아이에게 말했지. 믿음이 클수록 상처도 큰 법이라고. 그릇된 믿음이 불행을 가져올 거라고. 생각해 보니 그 말을 자네에게는 하지 않았군.”
이렇게 다른 이들을 챙기다가 그들에게 배신당했을 때, 너는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이었다.
“얼핏 보면 제가 오만사람 다 믿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이만큼 믿고, 저 사람은 저만큼 믿고. 제 나름대로 기준도 있고, 선도 있습니다. 모두를 다 믿거나, 아무도 믿지 않거나. 전 오히려 그게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어려운 길을 가려고요. 믿느냐 마느냐 지지고 볶는 길요. 권마님을 얼마나 믿어야 하나? 어떻게 하면 날 더 믿게 할까? 그런 고민의 연속으로 가보려고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권마에게 처음으로 밝히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다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언젠가는 제 배에 아무도 못 태우는 순간도 오겠지요. 제가 지쳐버렸거나 배가 좁아서.”
“왜 그렇게 태우려는 건가? 지금 무공만 해도 자네가 말한 자유를 충분히 누리면서 살 수 있을 텐데.”
“둑이 무너질 것 같아서요.”
“!”
잠시 사이를 두고 권마가 물었다.
“둑이 무너져 홍수가 나면 자네 배에 탄 사람만 살아남는 건가?”
“아뇨.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대라고?”
“제 배는 둑이 무너지지 않게 막으러 떠날 겁니다. 어쩌면 제 배에 탔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듣고 있던 천소희에게 말했다.
“그러니 굳이 내 배에 안 타도 돼.”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저, 이미 탄 것 같은데요?
물론 이번만큼은 그녀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의 뜻을 대변했다.
“당연히 탈 생각이 없습니다. 전 권마님이 모는 배에 탈 겁니다. 아니, 이미 타고 있습니다.”
“사매!”
“사매라니요? 왜 저를 사매라고 부르시죠? 이공자님!”
권마 앞에서 선을 확실히 긋는 그녀였다.
“네, 천 무인님. 부디 꼭 성공하십시오!”
말을 하고선 내가 먼저 웃었다. 천소희도 따라 웃고 싶겠지만, 감히 권마 앞에서 웃지 못했다.
그때 권마가 담담하게 물었다.
“나도 그 배에 태울 건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권마보다 천소희가 더 긴장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권마님을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건 권마님의 그 주먹뿐입니다. 지금 제 마음은 이 아기손을 그 주먹처럼 만들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내 말을 들은 권마가 조용히 술을 마셨다. 나도 술을 마셨고, 천소희도 조심스럽게 술을 마셨다.
권마, 그대는 형의 배에 타면 됩니다. 혹 형의 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대의 배에 형을 태우든지요. 대신 언젠가 난 당신들이 탄 배를 통째로 내 배에 실을 겁니다. 내 배 크기가 그렇게 커지기를 바라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지요.
잠시 후, 아버지와 이안이 들어왔다.
이안은 상기되어 있었다.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 몰라도, 아마 이안에게는 기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때? 오늘 환영식 잘했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습니까? 아버지도 이 모임에 들어오시겠습니까?”
내 말에 모두 기겁했다. 실제로 천소희는 손으로 비명이 터지는 자신의 입을 간신히 막았다.
아버지는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 같으냐? 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내가 들어가면 어떤 혜택이라도 있느냐?”
“드려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마가 들어오신다는데. 특별 혜택 있습니다.”
“어떤 혜택이냐?”
“우선 원하실 때마다 우리 넷이서 놀아드립니다.”
그러자 권마가 불쑥 말했다.
“넷이서?”
“권마님도 좋잖아요? 교주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권마가 표정으로 발끈했고 눈으로 욕을 했다.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고,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두 번째 혜택은?”
“아버지가 무공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면 언제든지 받겠습니다.”
“그건 내 혜택이 아니라 너희 혜택 아니냐?”
“요즘 젊은 사람들, 어른들 가르침을 잔소리로 듣고 흘리기 일쑤입니다. 어디 가서 잘난 척할 기회도 없지요. 그래서 우린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옛날이야기도 마음껏 하십시오!”
“내 말은 남녀노소 다들 잘 듣는데?”
이안과 천소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칫 이 농담에 휩쓸리면 큰일 난다는 경각심으로 웃음을 꾹 참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 모시고 여행도 갈 겁니다. 그때는 천마전도 안녕이고, 사마 군사님도 안녕이고, 태사의도 안녕입니다.”
“또?”
“욕심도 많으십니다. 뭘 또 원하십니까?”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내가 원할 때 바둑 두고, 사냥도 가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울컥했다. 방금 아버지가 한 말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혜택이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혜택에도 안 들어오시겠어요?”
아버지가 마지막 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갑자기 오셨듯, 갈 때도 갑자기 가시는 아버지셨다.
아버지가 권마와 작별을 나눴다.
“일간 또 보세.”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우린 모두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기왕 오셨으니 술 사주시고 가십시오!”
그 말에 정말 아버지가 술을 사주고 가셨다. 흥분한 조춘배가 아버지에게 받은 돈을 따로 넣어두고 있었다.
“천마에게 얻어먹는 귀한 술이다.”
내 말에 이안과 천소희가 술을 두 손으로 받들어 마셨다.
다시 한 잔을 비운 권마가 내게 물었다.
“교주가 오늘 이 자리에 왜 왔는지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