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회 한마디만 한다더니.
아버지가 왜 오셨을까?
“당연히 저를 밀어주려고 오셨겠죠.”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권마가 심야수련모임에 들어온 이유만큼이나, 아버지가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과연 그럴까?”
권마는 이번 아버지의 방문에 대해서 짐작하는 바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그의 빈 잔에 술을 부어주며 물었다.
“그럼 왜 오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권마는 다시 그 술잔을 비웠다.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하네. 대공자를 밀어주라고 온 거지.”
“두 분이 전음이라도 나누셨습니까?”
권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데 어떻게 아버지 마음을 아십니까?”
“이 자리에 왔다는 그 사실이 해답을 말해주니까. 교주는 내가 자네와 함께하는 모임의 첫 술자리에 굳이 왔네. 축하해주려고? 교주가 그런 사람인가?”
“아니죠.”
“그래, 아니지. 그럼 왜 왔을까? 알려주려고 온 거야. 자신이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거네.”
권마라고 어찌 아버지에 대해 다 알겠는가마는, 분명 어떤 느낌이 있으니 저런 말을 하는 것이리라.
“결국 아버지는 형님 편이라는 말씀이네요.”
“그건 또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지.”
“좀 전에 그랬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나보고 편들어주라고 왔다고 했지, 교주가 대공자 편이라는 말은 아니었지.”
그 모호한 말을 끝으로 권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환영은 잘 받았네.”
“권마님이 모임에 들어오셔서 좋습니다.”
“좋다고?”
의심스러워하는 권마의 시선이 나에게서 이안과 천소희에게 향했다.
바짝 얼어 있는 그녀들의 마음을 내가 대신했다.
“저 두 사람이야 당연히 어렵고 불편하겠지만, 분명 좋아하는 마음도 클 겁니다.”
내가 아는 이안이라면 ‘아닌데요!’라는 말로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권마님이 들어오셔서 너무 좋습니다!”
“그렇겠지. 몸 좋은 권마님이신데.”
내 장난에 이안이 또 눈에 힘을 주고 나를 쳐다보았다.
권마는 못 들은 척했다. 농담이든 장난이든 천하제일미라 불려도 좋을 여인이 몸이 좋다고 했는데, 적어도 기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권마가 들어와서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은 이안이 아니라 천소희였다.
그녀가 권마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실수를 많이 해서 제 말을 믿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검술이 아닌 권법을 택한 건 권마님을 동경해서입니다. 저는…… 권마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술기운 때문인지, 떨려서인지 그녀의 얼굴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권마를 향한 눈빛만큼은 자신의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권마님이 모임에 들어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권마는 말없이 일 층으로 내려갔다.
천소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난 그녀에게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주점을 나가는 권마에게 소리쳤다.
“다음에는 권마님이 술 사주십시오!”
“다음은 없다.”
“우리 아버지 환영회가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권마가 주점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교주가? 꿈도 꾸지 마라.”
그렇게 권마가 주점을 떠났다.
이제 나와 이안, 천소희만 남았다. 이안과 천소희가 허물어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아아!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안이 술잔을 내밀었다.
“드디어 편하게 한잔할 수 있겠네요. 한잔해요, 도련님.”
난 그녀와 건배한 후 술을 마셨다.
천소희는 손을 덜덜 떨었다.
“저는 조금 있다 마실게요. 잔을 들 수가 없어요.”
다 같이 있을 때는 정신없이 상황에 휩쓸렸는데, 막상 천마와 권마가 떠나고 나자 꿈을 꾼 것만 같은 모양이다. 하긴 천마와 함께 술을 마셨고, 권마에게 동경한다는 말을 직접 했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 한 일이 오늘 하루에 전부 벌어진 것이다.
“아, 정말 너무 긴장하고 있었더니, 온몸이 결리는 것 같아요.”
“어때? 또 마시라면 마실 수 있겠어?”
내 물음에 천소희는 몸 상태와는 다른 대답을 했다.
“너무 힘들었는데…… 이 긴장감이 나쁘진 않았어요.”
근래 나를 만나고, 이런저런 일들로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는 동권문 제일철권으로 누구보다 강단이 있는 여인이다.
“마실 수 있겠어가 아니라, 마시고 싶어요.”
“자극적인 것이 확실히 짜릿하지?”
천소희는 옅게 웃으며 동감했다.
이제 내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기분이 어때?”
“어떨 것 같아요?”
무려 천마에게 무공을 지도받은 날이니까.
“단지 교주님께서 무공을 알려주셔서 기뻤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럼?”
“무공을 알려주셨다는 것은 정식으로 저를 인정해 주신 거잖아요?”
차마 그녀가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직접 비천검법을 전수하는 것으로 그녀가 혈육처럼 가까운 사이임을 인정해 준 것이다. 비천검법은 혈육에게만 전수한 무공이었으니까.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 될 거예요. 감사해요, 도련님.”
“내가 뭘 했다고?”
“교주님께 그러셨잖아요? 아버지에게는 한 번의 술자리지만, 이안에게는 인생을 바꿀 자리가 될 수도 있다고요. 그 말씀 아니었으면 없던 일이었죠.”
이안은 내가 아버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은 제가 환영받은 기분이었어요.”
난 활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었다. 환영한다, 이안.
그렇게 풍류주점에서의 술자리는 끝이 났다.
* * *
환영회는 끝났지만 나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거처로 돌아왔을 때, 생각지 못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거처 마당에 서서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형 검무양이었다.
“언제 왔어?”
“좀 전에.”
아마 느낌상 꽤 오래 기다렸을 것 같다. 기다리는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권마님과 술 한잔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할걸.”
검무양은 말없이 달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나는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피곤해 보이네.”
내 말에 검무양의 시선이 달에서 나를 향했다.
“그래? 요즘 맡은 일이 많다. 너는 어떠냐?”
평소보다 더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나는 느꼈다. 검무양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궁지에 몰릴수록 더 노력하고 있음을.
어떤 의미에선 형에게 미안했다. 내가 회귀하면서 형의 인생이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이 싸움은 애초에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이십대의 청년이 나를 상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나는 회귀한 후 끝없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형, 우리가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어. 그대로 가면 우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니까.
“내가 권마 만나는 것 신경 쓰여?”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겠지.”
“요즘 권법에 푹 빠졌어. 이 말 안 믿겠지?”
“너라면 믿겠냐?”
“형도 편하게 마존들 만나. 혈천도마 만나서 책 이야기도 나누고, 취마 만나서 술도 마시고. 난 괜찮으니까.”
“자신있다 이거냐? 이미 네 사람이다? 내가 형으로서 충고 하나 하마. 마존들을 우습게 보지 마라. 지금 네 앞에서 웃고 있다고 네 사람이라 생각하면 그건 큰 착각이다. 그들은 결국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할 거야.”
나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비웃는 거냐?”
“아니. 형이 내게 충고나 조언을 해준 것이 언제였나 해서. 꽤 오래전이지?”
검무양은 고개를 돌려 달그림자가 진 담장을 바라보았다.
우린 사이에는 저 담장보다 몇 배는 더 높고 두꺼운 담장이 가로질러 있다.
“권마가 그러더라. 자신은 형 지지한다고. 아버지도 그걸 바랄 거라고.”
순간 검무양이 흠칫 놀랐다.
“정말이냐?”
“그래.”
“내게 왜 그런 말을 해주는 거냐?”
“형.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상대가 좋게 나오는데 어깃장 놓는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오랫동안 그에게 하지 않았던 본심을 밝혔다.
“내가 왜 마존들에게 형과 피를 흘리지 않고 후계자 싸움을 하겠다고 말한 줄 알아?”
“왜냐?”
검무양은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형은 어려서 내게 못 할 짓을 했지. 어린 내게 무림에 대한 공포감을 심고, 심리적으로 무너지게끔 유도했어. 당시의 난 무림이란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위축되고 겁이 났었지.”
그에게 이 문제를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검무양의 눈동자가 떨렸다.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긴, 형 딴에는 나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온갖 이야기를 다 했으니까.
형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 복수를 해야지, 왜 피를 흘리지 말자는 거냐?”
“형은 딱 그 정도까지만 나쁜 놈이었거든.”
“!”
“만약 형이 더 쓰레기 같은 놈이었으면, 어떻게든 나를 죽였겠지. 단전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다른 악랄한 수를 썼겠지. 하지만 형은 적어도 동생을 해치면서까지 후계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던 거야. 내가 이해하고 허용할 수 있을 정도의 나쁜 놈, 그래서야. 내 넓은 마음으로 저기까진 용서하고 이해해주자. 그땐 형도 어렸으니까.”
물론 아버지가 그걸 원하는 것도 더불어 큰 이유였지만.
“미친놈, 지랄한다.”
잘하지 않던 욕설이 튀어나왔다. 검무양은 당황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순간 형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질문 공세를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네가 후계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면,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동생을 그냥 뒀을까? 후계자가 될 자신이 있기에 그 정도에서 멈춘 것은 아니었을까?’
과연 형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사실 거기까진 나도 알지 못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고, 절박한 사람이 그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대신 방심하진 마. 형이나 나나 아직 시험대 위에 서 있어. 피를 흘리지 않고 후계 싸움을 하겠다고 했는데 형을 죽이고 교주가 된다면, 어떤 마존도 진심으로 나를 따르지 않을 거야. 형도 마찬가지야. 어설픈 음모로 나를 누르고 교주 자리에 오르면, 절대 마존들은 진심으로 충성하지 않을 거야. 잊지 마. 안 보는 것 같지만, 항상 마존들은 우릴 주시하고 있어.”
날 가만히 응시하던 검무양이 불쑥 말했다.
“넌 왜 이렇게 말이 많아졌냐? 어려서는 안 그랬는데.”
“내공이 다 입으로 가나 보지.”
“하나도 안 웃긴다.”
내가 처음으로 한 말로 그와 나 사이의 두꺼운 벽에서 벽돌 하나쯤은 부서졌을까? 그렇게 되었기를 바라며 잔소리를 더 했다. 어쩔 수 없이 형에게는 잔소리 신공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수다쟁이가 됐으니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 권력투쟁에 형제간의 공존은 없다고? 결국 서로 죽이고 만다고? 대체 누가 정한 거야? 왜 그런 제 욕망도 주체하지 못하는 병신 같은 놈들의 전례와 의심에 우리가 휘둘려야 해?”
옆에 있던 내가 검무양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니 휘둘릴 생각 꿈도 꾸지 마. 내가 형을 죽일 것 같은 불안증이 들면 날 찾아와. 날 보면 그런 생각 사라질 거야. 오늘도 내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지 마! 졌다고 생각하지 마. 그냥 동생 놈이 말 많고 말 잘하는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해. 발끈하지 마! 성급하게 뭘 결정하지 말고!”
내 말이 끝나자 검무양이 버럭했다.
“이 자식아! 귀에서 피 나는 줄 알았다. 한마디만 한다더니 이게 한마디냐? 너나 나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면 날 찾아와라! 어린놈이 훈계는!”
검무양이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거 알아? 형. 형도 내가 어렵겠지만 나도 그래. 나는 아버지보다도, 팔마존보다도 형이 제일 어렵다.
잠시 마당에 서서 형이 올려다보던 달을 올려다보았다. 식구가 원수라던 혈천도마의 말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 *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우린 열심히 수련했다.
낮에도 열심히 했고, 밤에도 열심히 했다. 그야말로 수련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오늘도 심야수련에 한참인 우리였다.
오늘도 권마와 똑같은 자세로 초식을 연마하고 있던 그때였다.
후우우우욱!
권마의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실수처럼 보였지만 실수가 아니었다.
꽝!
내 주먹과 권마의 주먹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북이 터져나가는 소리에 이안과 천소희가 놀라서 우릴 쳐다보았다.
우린 똑같은 자세로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고, 그 주먹이 허공에서 마주쳐 있었다.
“미안하네.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고.”
“그럴 수도 있죠.”
“어떤가? 기왕 이렇게 힘을 썼는데, 비무나 한 번 해볼까?”
“시도는 좋았습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드디어 권마가 슬슬 수작 아닌 수작을 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무공을 배우고 싶은 것의 열 배 정도로 그는 나와 싸우고 싶어 했다.
“사양했으면 돌아설 일이지 왜 그렇게 나를 쳐다보는가?”
아마 그로서는 참 낯선 경험일 것이다. 누군가 이렇게 자신을 응시하는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이제 저 권마를 제대로 보려고 한다. 주먹부터 먼저 봤지만, 이제 그를 보려 한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똑바로.
“권마님 얼굴을 자꾸 보니까 덜 무서운 것 같아서요.”
권마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더니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라는 듯 옷을 챙겨 입었다.
그가 떠나자 이안과 천소희가 내 양옆에 와서 말했다.
“거짓말쟁이!”
“보면 볼수록 더 무섭잖아요.”
그녀들의 진담 가득한 장난에 난 옅게 웃었다.
내 시선이 저 멀리 걸어가는 권마를 향했다. 권마는 크고 두툼한 등을 보인 채 홀로 어둠 속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내 눈에 자꾸 들어오는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다. 저 외로워 보이는 뒷모습에서 나는…… 회귀 전 나의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