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회 농땡이의 묘미는.
다음 날 흑권 수련을 마치고 권마를 따라붙었다.
“오늘 저와 식사하시죠.”
권마는 항상 혼자서 식사했다. 그야 다른 마존들도 다르지 않겠지만, 권마는 간혹 수하들과 함께하는 식사조차 일절 하지 않았다.
“됐네.”
“왜 그러십니까?”
“불편해서.”
“제가 불편하면 불편하지 권마님이 불편하다니요? 세상에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난 자네가 불편해.”
권마가 먼저 성큼성큼 가버렸다. 주위에 수하들이 있는 데도 불편하다고 말하는 권마나, 그런 권마에게 밥 먹자고 따라붙는 나나, 철권들은 놀란 얼굴로 우릴 쳐다보았다.
물론 포기는 없다. 난 다음 날에도 권마를 따라붙었다.
“그럼 오늘은 차 한잔 어떠십니까?”
“차 안 좋아하네.”
“차를 많이 마셔야 몸에 좋답니다.”
권마가 발걸음을 멈췄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그 차에 독이라도 타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요? 독을 타면 다음 구결은 못 배우잖습니까?”
“그렇지. 다 배워야 독을 탈 텐데.”
“오해십니다.”
내 외침에도 권마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다음 날 수련이 끝났을 때, 또 따라붙었다.
“혹시 바둑 둘 줄 아십니까?”
“모르네. 사내대장부가 그깟 작은 돌을 들고 뭐 하는 건가? 계집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그 소꿉장난 우리 아버지가 요즘 푹 빠져 계십니다만.”
“…….”
권마가 뒤도 안 돌아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버지 이야기 때문인지 전날보다 발걸음이 더 빨랐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권마는 철벽이었다.
이대로는 쉽지 않았다.
권마를 펄펄 끓는 솥에 담그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이 크고 튼튼한 상대는 좀처럼 흐물흐물해질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삶아 먹고 싶어도 삶기지 않는다.
이렇게 답답할 때면 떠오르는 한 사람.
나는 곧장 혈천도마가 있는 남도종으로 향했다.
* * *
혈천도마는 서대룡에게 무공을 전수하고 있었다.
이제 정식 제자가 된 서대룡은 혈천도마에게 독문무공 멸천마도식을 전수받고 있었다.
나는 수련에 방해가 되지 않게 뒷마당으로 가서 조용히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마호신공을 운용했다.
비천검법은 십이성 대성을 이뤘고, 풍신사보도 대성을 이뤘다. 익힌 무공 중 반드시 대성을 이뤄야 하는 무공은 천마호신공이었다.
한참을 수련하고 있을 때, 멀리서 서대룡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련 끝났습니다.”
혹시라도 내 수련에 방해가 될까 봐 조용히 알려준 것이다.
내가 눈을 뜨자 서대룡은 땀에 흠뻑 젖은 채 내 옆에 주저앉았다.
“힘드냐?”
“죽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수련에 들어간 서대룡은 그야말로 지옥 수련의 연속인 모양이다.
“말씀드리마. 우리 서 조사관이 너무 힘들어하네요. 좀 살살 해주십시오.”
“그럼요. 사람 죽이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죠.”
나는 가만히 서대룡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달라졌어. 느낌이.”
“어떻게요?”
“강해 보여.”
그 한마디에 서대룡의 기분이 금방 좋아졌다. 서대룡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다려라!”
“악인들이여! 가 아니라 여인들이여! 겠지?”
“표났어요?”
“힘내라, 오른팔! 이렇게 갈아 넣는 시간이 없으면 악인에게는 죽게 될 테고, 여인에게는 차이게 될 거다.”
“갈아 넣었는데도 차이면요?”
서대룡의 사슴 눈은 ‘그럴 리 없다’를 기대했지만.
“그땐 악인들 하나라도 더 잡자. 아! 세상 악인들이 씨가 마를지도 모르겠군.”
“아니! 이러기에요?”
내가 큰소리로 웃었고 서대룡이 따라 웃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별을 고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 그리고 강해 보인다는 그 말씀, 다음에도 또 해주세요! 제가 힘들 때마다.”
“오냐.”
그를 보내고 앞마당으로 가자 혈천도마가 멸천대도에 기대앉은 채 땀을 닦고 있었다.
“주먹질하느라 바쁠 텐데, 왜 왔나? 벌써 질렸어?”
“네. 질렸습니다. 어르신하고 놀러나 다닐 걸 제가 뭐 하려고 권법을 배우겠다고 했는지 후회막심입니다.”
“누가 놀아준다더냐?”
나는 혈천도마 옆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아무리 불을 지펴도 익을 생각을 안 하네요.”
“바윗덩이를 익히려는데 그게 익겠냐?”
“그래서 어르신을 찾아뵌 거죠.”
“끓는 물에 늙은 생강이라도 넣어 보겠다?”
“이래서 제가 어르신을 좋아하는 겁니다. 척하면 척이니까요.”
“자네가 권마에게 얻고 싶은 것이 뭔가? 그의 무공인가? 아님 마음인가?”
“처음에는 무공이었는데.”
“지금은 마음까지 얻고 싶다?”
“절벽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게 멋있어서 저도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한데 이제는 권마가 왜 저토록 절벽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알고 보면 별것 아닌 이유일 거다.”
“다들 그렇잖아요? 저도 그렇고.”
혈천도마가 애늙은이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이곳까지 온 자네에게 미안하지만, 권마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네.”
“괜찮습니다. 그냥 갑갑해서 어르신 뵈러 온 겁니다.”
매운 생강은 요리 말고 치유에 쓰였다.
“이보게, 이공자.”
“네, 어르신.”
“자네 괜찮나?”
“!”
혈천도마가 내게 묻는다.
괜찮냐고.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괜찮다고 했겠지만 혈천도마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안 괜찮다는 말보다 모르겠다는 말이 더 위험한 법이지. 지쳤을 땐 쉬어 가게.”
혈천도마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무장해제당하는 요즘이다. 그의 문을 열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어쩌면 내 문이 먼저 활짝 열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어르신 도에 저도 좀 기대봐도 되겠습니까?”
“안 되네. 엉뚱한 소리 하는 걸 보니 멀쩡하군, 멀쩡해.”
“한 번만요. 예전부터 정말 딱 한 번만 기대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조르자 결국 혈천도마가 못 이기는 척 허락했다.
“그럼 딱 한 번만이네.”
나는 멸천대도에 기대보았다.
“아! 왜 이렇게 여길 기대셨는지 이제 알겠네요.”
“든든한 것이 날 지켜주는 느낌이 들지?”
“아뇨. 엄청 시원하네요.”
멸천대도가 지닌 원초적인 한기가 있었다.
“그 더운 여름날 혼자서만 시원하게 계셨군요!”
설마 이렇게 따질 줄은 몰랐는지 혈천도마가 에끼 이놈아 하고 웃고 말았다.
서대룡과 너스레를 떨고 혈천도마와 함께 이렇게 웃으니 답답함이 많이 풀렸다. 그리고 큰 치유법도 얻었고.
“지쳤을 땐 쉬어 가겠습니다.”
“힘들 땐 언제든지 오고.”
언제든지란 한마디가 가슴을 찌른다.
“어르신 안 계시면 저는 어떻게 살까요?”
“권마랑 주먹질하며 잘만 살겠지.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돌아가게. 심야수련인가 뭔가 해야지.”
“아니. 어떻게 된 마교에 비밀이 없어요.”
도를 뽑아 든 혈천도마가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누굴 닮아 그렇게 입들이 싸겠는가?”
* * *
나는 혈천도마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흑권 수련에 나가지 않았다. 수련이 한창일 그 시간, 나는 시공이환술 속 세상에 있었다.
내 검강을 닮은 푸른 하늘과 바다, 햇볕이 쨍쨍한 모래사장, 잎 넓은 나무 그늘. 시원한 돗자리까지. 나는 세상 편하게 누워있었다.
오늘 하루는 농땡이 치는 날이었다.
무림맹에서 돌아온 후, 권마와 얽히면서 한순간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작정이다.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마실 것과 요깃거리, 읽을 책까지 준비한 그야말로 완벽한 농땡이였다.
하늘을 보다가, 바다를 보다가, 또 모래사장을 기어 다니는 게를 보았다. 책을 읽다가 졸다가, 깨서는 다시 멍하게 바다를 쳐다보았다.
“아! 좋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렇게 난 온종일 늘어져 있었다.
그날 오후, 거처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녀는 천소희였다.
“사형, 사형.”
권마 앞에서는 이공자라 부르더니, 둘만 있을 때는 사형이라 부르는 그녀가 귀엽다.
“어디 가셨지?”
그녀가 창문으로 내 방을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흑권 수련에 나가다가 갑자기 가지 않았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다.
잠시 마당을 서성이던 그녀가 거처를 떠났다.
그녀가 찾아온 것이야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는데. 잠시 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방문했다. 정확히는 방문이 아니라 지나쳐 간 사람이지만.
놀랍게도 그는 권마였다. 그는 다른 볼일로 내 집 앞을 지나가는 것처럼, 내 거처를 지나간 것이다. 지나가면서 슬쩍 그의 눈동자가 내 거처를 향했다. 기를 끌어올려 내가 집에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그가 지나갔다.
모른 척 지나가는 것이 너무 웃겼고, 한편으로는 감동이었다.
정말이지 시공이환술을 풀고 달려 나가고 싶었다. 날 걱정해서 오셨냐고,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사람들아, 나 귀한 줄도 좀 알아라!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뒹굴거리다가, 심법으로 내공을 채웠다가, 다시 뒹굴뒹굴했다. 별것 아닌 하루 같았지만, 나에게는 값진 충전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심야수련 시간이 되었다.
세 사람은 제시간에 도착했는데 오자마자 천소희가 내게 물었다.
“오늘 흑권 수련 왜 안 나오셨어요?”
내가 수련에 가지 않았다는 말에 이안이 깜짝 놀랐다.
“도련님! 어디가 아프세요? 얼마나 다쳤어요!”
“왜 호들갑이야?”
“도련님이 수련에 빠질 리가 없잖아요?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나도 사람이야. 농땡이 치고 싶을 때도 있고, 쉬고 싶을 때도 있다고.”
그러면서 권마를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권마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런 적 없네.”
“정말요?”
“그런 나태한 삶을 살았다면 지금 권마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겠지.”
“힘들지 않으십니까?”
“전혀.”
나는 안다. 정작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힘듦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고, 알아도 무심히 넘어가 버리는 것임을.
“힘드시면 저와 노시죠! 전 언제든 대기 중입니다.”
물론 권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날 수련이 끝나갈 무렵.
휘이이잉!
내 주먹에서 생소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천둥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주먹 소리도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 물음에 권마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비바람이 몰려오는 소리다.”
천둥 칠 때가 머지않았다는 뜻이었다.
믿기 어려운 내 빠른 성취에 권마의 온몸에서 투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다가섰고 나는 뒤로 물러났다. 금방이라도 격전이 벌어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안과 천소희도 긴장했다.
내가 재빨리 그에게 말했다.
“내기 하나 할까요?”
“무슨 내기.”
“치고받고 싸우는 것은 싫으니, 경공 내기 어떻습니까? 제가 이기면 벽력수라권 제이권을 전수해주십시오.”
“내가 이기면?”
“권마님과 승부를 보겠습니다.”
권마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몸이 이렇게 크니까 느리다고 생각했겠군.”
권법의 최고수들은 보법이 기가 막힌 법이고, 보법은 경공과 이어져 있다.
“좋아. 그 내기 받아들이겠네.”
권마는 자신만만했다. 그는 독문무공 제이권을 자신 있게 걸 정도로 경공에 자신 있었다.
“마가촌 입구까지. 어떻습니까?”
“거긴 비무를 펼치기 적당하지 않아. 입구에서 십 리쯤 더 가면 대숲이 나온다. 거기까지 하세.”
이미 권마 마음속에서는 내기에서 이겼다.
이안이 바닥에 줄을 그었고, 우린 나란히 줄에 섰다.
“준비, 출발!”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쏘아진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우리 모습에 두 여인이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간다.
권마는 정말 빨랐다. 마존들 중에 제일 빠를 거라 확신한다. 그래서 내기를 받아들인 것이겠지만, 내 쾌속보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나는 그와 속도를 맞춰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권마의 놀람이 거친 숨결을 타고 전해져 온다.
대숲에 몇 걸음 먼저 내가 도착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이긴 것처럼 연기했다. 곧이어 도착한 권마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내가 자신보다 빠를지 몰랐던 모양이다.
“우선 제이권 전수해주시고, 억울하시면 삼권 걸고 또 하시죠.”
권마의 무서운 얼굴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니 정말 무서웠다. 하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그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좋아. 이 자리에서 제이권을 전수하겠네.”
망설임 없는 그의 결정에 나는 내심 놀랐다. 그는 정말 남자 중에서도 상남자였다.
경공 내기로 내주기에는 너무 귀한 무공이다. 권마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애초에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정말 하지 않았을까? 그의 의중이 궁금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함정에 빠뜨려놓고 괜찮냐고 묻는 건가?”
그 함정, 혹시 알고 빠지신 것은 아니시고요?
제이권 벽력수라(霹靂修羅)
제일권 흑운수라가 하나의 상대에게 온 힘을 실어서 적중시키는 것이라면 벽력수라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주먹을 날리는 초식이었다. 위력보다는 속도에 비중을 둔, 비천검법으로 따지면 쾌검식인 창천식과 마찬가지였다.
권마는 구결과 자세를 내게 전수해주었다.
나는 모든 심력을 소모해서 그의 가르침을 하나도 빠짐없이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권마의 두 번째 주먹도 내 것이 되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주먹이 잘못 쓰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나는 그에게 절을 올렸다. 아직 사제지간이 되진 않았지만 두 번째 권까지 전수받은 것이다.
“그럼 기왕 여기까지 나왔으니 바람 좀 쐬고 들어가시죠.”
권마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출교하신지 꽤 오래되셨죠? 저 어제 수련 빼먹고 노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권마님도 저와 농땡이 좀 치시죠.”
어림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권마가 본교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크고 두꺼운 등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매일 그렇게 나가주시니 다들 권마님 귀한 줄 모릅니다.”
권마가 발걸음을 딱 멈췄다.
“본교에 대한 권마님의 호의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수하들을 향한 호의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권마를 겁내는 수하들의 인지상정이나, 그들에 대한 권마의 애정을 폄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마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우리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한참 동안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고, 내가 한 말에 담긴 속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에게 두 번째로 하는 말이다. 그 말이 와닿은 것일까?
잠시 사이를 두고 권마가 물었다.
“어디 갈 곳은 있나?”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농땡이의 묘미는 무계획에 있죠. 가시죠.”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내가 달리기 시작했고, 권마가 나와 함께 달렸다.
우린 속도를 맞춰서 엇비슷하게 달렸다. 옆을 달리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얼핏 보았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어떤 희열을.
그렇게 우린 순식간에 교에서 멀어졌다.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