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회 앞으로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승객들을 실은 배가 강을 건너고 있었다.
권마와 난 바람 부는 갑판에 서서 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린 점점 본교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일탈이 불안한 사람이 있다. 저러다 무슨 사고라도 치는 것 아냐? 혹은 이 일로 그의 삶이 나쁘게 바뀌어버리지는 않을까? 괜히 나 때문에?
하지만 권마의 일탈은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그가 보여준 삶의 성실함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이 오히려 권마란 사람의 본성을 짓누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그때였다.
또르르륵.
털실로 만든 공이 권마의 발아래로 굴러왔다.
꼬마 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오다가 멈춰 섰다. 커다란 권마의 모습에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권마가 공을 주워서 내게 주었다.
“직접 주십시오.”
“애 울릴 일 있나?”
“안 울 겁니다.”
권마가 아이에게 공을 내밀었음에도 쭈뼛쭈뼛 다가오지 못하는 아이에게 권마가 공을 굴려주었다.
아이야, 오늘 너 권마에게 공 받은 날이다.
공을 받아든 아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제 부모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권마가 불쑥 물었다.
“내가 즐거워할 곳으로 간다고 했나?”
“네.”
“내가 뭘 즐거워할 줄 알고.”
“내기할까요?”
“무슨 내기?”
“만약 가셔서 즐거우시면 제가 이긴 거고. 즐겁지 않으시면 제가 지는 겁니다.”
“내가 즐거운데도 즐겁지 않다고 하면?”
“안 그러실 거잖아요?”
“내기면 뭘 걸어야지?”
“자존심 걸어야죠.”
폭포에서 뛰어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권마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제삼권을 내기에 걸고 싶지 않나?”
“걸고 싶죠.”
“그런데 왜 걸자고 하지 않나?”
“제일권, 제이권도 권마님이 아량을 베풀어 주시는 바람에 너무 쉽게 얻었습니다. 저도 양심이 있지, 또 그럴 수는 없죠.”
진심이기도 했고, 그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자, 남자의 자존심을 걸고!”
내가 그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뭔가? 싸우자고?”
“무인들이 약속할 때 병장기를 부딪치잖습니까? 우리 권법가들은 주먹을 부딪쳐야지요.”
“난 아기손하고는 부딪치지 않을 거네.”
나는 권마의 손을 쳐다보다가 내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분하게도 부정할 수가 없군요.”
권마가 강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멀리 강 위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좋군.”
처음으로 그가 풍경을 보면서 좋다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권마는 강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난간에 기댄 채 노을을 등진 채 권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젊어서는 많이 돌아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교에 붙어 있지 않았지.”
“아버지하고도 많이 나가셨다면서요?”
“교주가 그러던가?”
네, 라고 나직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아버지에게 들은 말은 아니다. 회귀 전 마존들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내용이다. 지금 가는 곳도 그렇게 알게 된 곳이고.
“요즘도 아버지와 자주 만나십니까?”
“거의 못 보지. 그때 주점에서도 오랜만에 만났던 거라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일은 무슨. 사람 관계가 항상 뜨거울 수 있겠나?”
“하긴 그렇죠.”
나도 몸을 돌렸다. 권마를 물들였던 노을이 내 얼굴에 옮겨졌다.
과연 농땡이 치던 이 순간이 그와 나의 뜨거웠던 순간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 * *
이틀 후, 검무극과 권마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저자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난번 야수파가 있던 곳이 무림맹 영역이었다면, 이곳은 사도맹 영역이었다.
걸어가는 동안 권마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굳어지기도 했고,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창고 건물이었다.
검무극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건넸다. 돈을 받자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짐들이 쌓인 곳 사이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었다.
계단으로 한참 내려가자 커다란 철문이 하나 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훅하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함성이 들려왔다.
가운데 큰 비무장이 있었고 상의를 벗은 두 사람이 맨주먹으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여기는 지하격투장입니다.”
중원에 지하격투장은 여러 종류가 있다. 내공을 사용하는 곳도 있고, 병장기를 사용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온 곳처럼 내공이나 병장기 없이 오직 주먹만으로 싸우는 순수한 격투장도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서 시합을 구경만 해도 되고, 승자가 누군지 내기를 걸어도 됩니다. 주로 내기를 위해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자넨 이곳을 어떻게 알았나?”
“제가 무림의 온갖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순수하게 주먹으로 싸우는 곳이니, 권마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모시고 온 겁니다.”
권마의 눈동자에 어떤 떨림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권마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어렸을 적 나도 이곳에 격투가로 있었다네.”
“네?”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아니, 깜짝 놀라는 척을 했다. 사실 그가 이곳 출신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 말씀입니까?”
“그렇네. 바로 여기에 있었지.”
권마의 인생 역시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다.
“그럼 본교와는 어떻게 인연이 되신 겁니까?”
“이곳에서 본교 사람의 눈에 띄어서 발탁되었지.”
거기까진 검무극도 모르는 일이다. 아직 본격적인 무공을 익히지 않은 시기였겠지만, 그래도 권마가 될만한 자질을 지닌 이의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여기서도 불패셨습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권마가 되물었다.
“나는 지금도 불패가 아니지 않나?”
“무슨 뜻입니까?”
“교주와 싸워도 못 이길 테고, 무림맹주와 사도맹주 역시 마찬가지잖나? 세상의 모래알처럼 많은 은거 고수들까지 불러올 필요 없이 당장 자네만 해도 내가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지 않나?”
“저야 아기손이지 않습니까?”
“그 아기손이 든 흑마검은 무섭다네.”
검무극은 문득 권마가 불패라는 별호를 싫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를 일이죠. 진짜 생사결이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요. 권마님이 아버지를 이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권마의 시선이 다시 격투장을 향했다. 죽도록 얻어터지는 무인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교주와 싸우면 저렇게 될 거네. 교주가 검을 뽑지 않더라도 말일세.”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식도 저렇게 팰 분이죠.”
검무극의 말에 권마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곳에 대한 권마의 추억이 어떨지는 검무극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지긋지긋했을지도 모르고,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데려온 것은 그는 이제 권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먹의 밑바닥에서 이제 주먹의 정점에 올라섰다.
한 번쯤 오고 싶지 않았을까? 저 뜨거운 열기를 다시 한번 느끼고 싶지 않았을까?
검무극과 권마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이곳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가 하면, 이 무섭게 생긴 권마가 주위에 있는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혼이 나간 그들은 격투에 빠진 것이 아니라 도박에 빠져 있다는 것을. 오직 싸움의 결과만을 바라며 소리치고 있다는 것을.
잠시 싸움을 지켜보던 권마가 무심코 툭 내뱉었다.
“왼쪽이 이길 거네.”
누구 판단인데 틀리겠나?
결과는 왼쪽 무인의 승리였다.
경기는 쉬지 않고 속행되었다. 경기가 끝나자 서너 명의 남자들이 나와서 순식간에 비무대에 흘린 땀과 피를 지웠다.
그사이 또 다른 남자들이 다음 시합에 나올 격투가들의 상대 전적과 최근 성적을 적은 커다란 판을 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보고 도박을 거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시간이 곧 돈이라는 듯, 지켜보는 이들의 열기를 식히지 않겠다는 듯, 쉴 틈 없이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권마는 다음 경기도 정확히 맞혔다. 그야말로 권마는 예언가였다.
“우리 여기서 부자가 되어서 나갈 수도 있겠는데요?”
말과는 달리 검무극은 단 한 푼의 돈도 걸지 않았다.
“재미 삼아 걸어 보지 그러나?”
“싫습니다.”
“왜?”
“솔직히 저 후회 중입니다. 격투의 열기를 느끼시라고 모셔 왔는데, 도박의 열기가 더 뜨거운 것 같아서요.”
솔직한 검무극의 말에 권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도 그랬다네. 여긴…… 언제나 그렇지.”
그때 권마가 한 청년을 주시했다.
“저 어린 친구, 눈빛이 좋군.”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저 친구에게 권마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하고 있음을.
“좋습니다. 저 친구에게 제 전 재산을 걸겠습니다.”
검무극의 농담에 권마가 권했다.
“걸어 봐. 꼭 이길 거네.”
“됐습니다.”
하지만 권마가 이길 거라 말한 어린 친구는 시합에서 졌다. 그 결과에 권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만약에 말씀하신 대로 걸었다면 저는 전 재산을 날렸습니다. 오늘 우리 노숙할 뻔했습니다!”
어디 권마가 저들의 실력을 잘못 파악해서 그랬겠는가? 승부조작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 주인장 보자고 할까요?”
권마가 주인장 만나서 따끔하게 한마디 할 법도 했는데.
“조작은 격투장하고는 관계가 없을 거야. 오히려 격투장 쪽에서는 어떻게든 조작을 잡아내려고 하지. 가만히 두어도 막대한 돈을 버는데, 굳이 조작해서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네.”
외부에서 조작이 시도된다는 뜻이었다.
“추억은 그냥 추억으로 묻어둬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나?”
“격투 보시면서 즐기시라고 왔는데, 괜히 기분만 나빠지신 것은 아닌가 해서요.”
“괜찮네.”
“시대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때처럼 순수한 싸움은 없어졌나 봅니다.”
그러자 권마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왜 그때는 조작이 없었다고 생각하나?”
“있었습니까?”
“당연히 있었지. 그게 내 인생을 바꿨고.”
권마의 시선이 비무장을 떠나고 있는 청년을 향하면서 자연스럽게 과거를 떠올렸다.
“내가 연전연승을 이어나고 있던 어느 날이었네. 이 지역 흑도 수장이 야밤에 수하들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었지. 다음 시합에서 져주라고 하더군. 연전연승 중이기에 내가 지면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었겠지. 내게도 돈을 주겠다더군. 꽤 큰 돈이었어.”
“어떻게 하셨습니까?”
“거절했네.”
“놈들이 그냥 있지 않았겠군요.”
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당시 그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렸다.
흑도 놈들에게 주먹을 날리면서 이리저리 피하며 싸우던 그 순간이.
함께 온 수하 놈들은 다 때려눕혔지만, 수장을 당해내진 못했다. 놈은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자였고, 자신은 무공을 배우기 전이었다. 결국 놈에게 꼼짝 못 하게 제압당했다.
“내 말 안 들으면 죽는다.”
“병신 같은 흑도 새끼야! 네가 남자면 내공 쓰지 말고 격투장에서 나랑 붙자!”
“말로는 안 되겠군.”
수장이 권마의 옷자락을 풀어 헤쳤다.
스으으으윽!
놈이 비수로 권마의 가슴을 길게 그었다. 권마는 비명을 내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져야 하니, 좀 아파도 되겠지?”
결국 권마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알겠습니다. 다음 시합은 지겠습니다.”
“진작 그랬으면 안 다치고 좋았지. 한 번씩 멍청한 생각이 들 때면 이 상처를 봐.”
놈이 웃으면서 그곳을 떠났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검무극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다음 시합 때 화끈하게 이겼지. 그 병신의 전 재산을 다 날려버리게 만든 거지.”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 권마지.
“멋있습니다!”
“멋있는 게 아니라 무모하고 겁이 없을 때였지. 그때보다 천 배는 더 강해진 지금보다 훨씬 더 겁이 없었지.”
권마가 자신의 앞가슴을 풀어헤치며 내게 다시 보여주었다.
“내 몸의 상처는 그렇게 얻은 거네. 거창한 고수에게 얻은 상처가 아니라,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일개 흑도 놈이 남긴 초라하고 치욕적인 상처지. 무림맹 장로와 싸워도 입지 않았던 상처인데.”
아마 권마는 이 상처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몸의 상처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였다.
“더 자랑스러운 상처 아닙니까?”
“자랑스럽다니?”
“무림맹 장로하고 싸울 때보다 훨씬 더 겁났을 텐데, 참아냈던 것 아닙니까?”
“자넨 좋게 포장해주고 싶겠지만, 내겐 지우고 싶은 수치일 뿐이라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오히려 그 상처가 더 좋아졌습니다. 이제 앞으로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젊은 시절 내공 한 줌 없이도 당당하던 권마님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무림맹주가 남긴 일격보다, 사도맹주가 남긴 상처보다, 훨씬 더 멋진 상처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권마는 잠시 얼떨떨했다. 상처를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빴었는데, 어쩌면 오늘부터는 그런 불쾌함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은 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누군가 해주는 말이라는 것을.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 백 번, 천 번 하는 것보다, 누가 이렇게 한번 말해줄 때 비로소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 상처 자주 보여주십시오.”
권마는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을 느끼며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말없이 검무극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이 다시 물었다.
“다음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그럼 그 흑도 놈이 권마님을 죽이러 왔겠군요.”
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운명이 바뀐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 밤 자신이 거느린 모든 수하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