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회 그건 어디 쉬울 것 같냐?
권마가 항상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좋은 시도였네.
드디어 시도가 먹힌 것일까? 아니면 이제 언급도 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권마는 말없이 시선을 격투장으로 돌렸다. 두 남자가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열광하는 군중.
“여긴 수십 년이 흘러도 똑같은 모습일 거네.”
“제 아들이 할아버지가 된 권마님과 함께 이곳에 올 수도 있겠지요.”
그러자 권마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혼인할 생각인가?”
“좋은 사람이 있다면요.”
물론 나는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일반적인 대답을 했다.
권마가 단호히 말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안 하는 것을 추천하네.”
권마는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해주면서 자신은 평생 가족도 친구도 가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고 했으니 당연히 이런 조언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조언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네 같은 뛰어난 사람도 피를 흘리지 않는 후계 다툼이 이렇게나 어렵지 않나? 과연 자네 자식들은 자네처럼 해낼 수 있을까? 보통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야.”
나를 높이 사는 말이기도 했고 후대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천마가 되었을 경우를 가정한 일이었다.
“신중히 판단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천마 혈족의 대를 끊는 이야기를 했군.”
“상관없습니다. 저 죽고 난 후의 일인데요.”
내 말을 들은 권마의 표정이 이랬다. 정말 자네라면 진심으로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고.
“이만 나가세.”
“네.”
권마는 출구에서 마지막으로 격투장을 돌아보았다. 생전에 이 격투장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앞일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권마는 다시는 못 올 곳이라는 마음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둘러볼 때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천천히 둘러봤지만, 막상 돌아서자 권마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격투장을 나선 우린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걸었다. 이제 권마는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 역시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듯,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길을 잃어버려보신 적 있으십니까?”
“없네.”
“저도 없습니다.”
그랬기에 이 농땡이 여행이 더 값지고 의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나도 이렇게 무계획적으로 살아본 적은 없었으니까. 인생에서 길을 잃는 즐거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참, 내기는 제가 졌습니다. 인정하죠.”
“아니네. 이번 내기는 내가 졌네.”
의외였다. 괜찮다고 말은 했어도 승부 조작이 일어나는 모습에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으리라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즐거웠네. 덕분에 옛 생각도 했고.”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닐까? 덕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네에게 알려줬다고.
“그럼 우리의 자존심 대결은 일대일이군요.”
“결판은 내야지.”
“그럼요.”
그때 권마가 말했다.
“그전에 가고 싶은 곳이 있네.”
처음으로 권마가 어딘가를 가고 싶다고 말했다.
“권마님과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갑니다!”
“우리가 갈 곳은 그렇게 뜨거운 곳이 아니라네. 오히려 두터운 솜옷을 챙겨가야 할 곳이지.”
그렇게 권마의 오랜 추억이 담긴 격투장을 뒤로한 채 우린 늘어지는 노을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먼 길을 달려온 권마와 난 설산의 정상에 함께 서 있었다.
휘이이잉.
눈을 몰고 온 바람이 주위에 쌓인 눈을 휘감으며 공중으로 올라갔다.
“여긴 왜 오고 싶었던 겁니까?”
권마가 가고 싶다고 한 곳이 바로 이 설산이었다.
“이곳이 바로 전대 권마께서 나를 후계자로 삼은 곳이네.”
“아, 그러셨습니까?”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사실 사부와 나는 잘 맞지 않았다네. 마지막 후계자를 뽑을 때 사부는 다른 사람을 뽑고 싶어 했지. 무공은 나보다 떨어졌지만, 그 친구가 사부에게는 훨씬 더 싹싹하게 잘했거든. 한데 사부가 왜 나를 뽑았는지 아나?”
“아버지 때문입니까?”
“맞네, 교주 때문이지.”
젊은 권마를 동권문에 넣을 때만 해도 아버지는 교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권마가 정식으로 마존 자리를 이어받을 무렵엔 아버지는 천마의 자리에 올라있었다.
전대 권마는 천마가 된 아버지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자네 아버지 때문에 권마가 된 거지.”
“권마님에게는 더 멋진 일 아닙니까?”
“멋지다니?”
“전대 권마보다 아버지가 사람 보는 눈은 더 뛰어날 테니까요. 아버지는 내공 한 줌 없이 격투장에서 주먹질하고 있는 어린 격투가를 골랐습니다. 그 격투가는 홀로 백권에서 흑권을 거쳐 결국 권마가 되었고요. 사람을 보는 눈 만큼은 아버지를 믿으십시오.”
“한때는 자신만만하던 시기도 있었네. 내가 아니면 누가 권마가 될까? 한데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네. 과연 교주의 판단이 옳으셨을까?”
“그 판단이 잘못된 거였다면, 다른 마존들이 권마님을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마존으로 꼽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자리에 어울리는 분은 권마님이십니다.”
권마는 말없이 설경을 바라보았다. 온통 새하얀 세상에 우뚝 서 있는, 이 정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황홀한 풍경이었다.
나는 자신을 돌아보는 권마의 모습을 높이 샀다. 저런 마음이 없다면 그는 고집 센 늙은이로 화석처럼 굳어버릴 테니까.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이기에, 나는 권마가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에게 솔직한 내 심정을 전했다.
“처음에는 권마님이 어떤 분이신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절벽을 무너뜨리겠다는 목표에 반해서 저도 무너뜨리고 싶어졌죠. 지금은 권마님의 본모습이 더 좋아졌습니다.”
“내 본모습?”
“젊은 시절, 흑도들을 상대로 싸우던 그 모습이 권마님의 본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돌아가면 철권들을 모두 모아 놓고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야! 너희 권마님이 이런 분이다! 하고요.”
“다른 마존들에게도 이런 듣기 좋은 말만 했나?”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솔직한 말을 많이 했습니다. 마존이라는 자리 때문에 남들은 하지 않는 말들이었죠. 아, 물론 어느 정도 아부를 떤 것도 인정합니다. 기왕이면 좋게 보려 했고, 기왕이면 친해지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없는 이야길 지어내진 않았습니다. 저도 나중에 누군가 내 인생을 두고 이런 말을 해주면 좋겠다, 싶은 그런 말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권마를 쳐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잘 안 해주시잖아요?”
수백 명을 가르쳐도, 수만 명의 교도가 오가는 곳에 있어도.
“그런 말…… 잘 못 듣잖아요?”
나중에 내게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은 있을까? 나는 이렇게 다 해줬는데.
권마는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한참을 쳐다보던 그가 다시 한참을 저 건너편 산을 바라보았다.
“천마가 되면 뭘 하려는 건가? 혹 무림일통이 꿈인가?”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그 누구도 무림일통을 하지 못하게 막을 겁니다. 그게 설령 아버지라 하더라도요.”
권마의 눈빛이 빛났다.
“자네도 알고 있었군.”
그 말은 곧 권마도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꿈꾸신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처럼 똑똑한 사람이 그걸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지.”
“권마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는 자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따를 걸세. 전쟁을 일으켜서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면 망설이지 않고 다 죽일 거네. 그게 누구일지라도.”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오른팔은 권마였다. 그럼 왼팔은 혈천도마일까? 혈천도마가 내게 준 영약이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라 했는데.
“저는 막을 겁니다. 아버지도, 권마님도.”
이후 우린 한참 동안 말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휘이이이이잉.
불어온 눈보라가 우리를 시원하게 스쳐 지나갔을 때, 권마의 결심이 바람결을 타고 전해졌다.
“무극, 너를 내 첫 제자로 삼겠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긴 했어도 이렇게, 이곳에서 제자로 삼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무림일통에 있어서 상반된 생각을 가졌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는데.
크고 두꺼운 몸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무서운 얼굴, 지금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깊고도 진지한 눈빛으로 권마가 말했다.
“네 사부가 될 테니, 내 제자가 돼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울컥했다. 기쁨이 솟구쳐 올라왔다. 결국 이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권마라는 마존을 얻기 위해서도, 그의 권법을 얻을 수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이 사람이 내 사부가 된 것이 너무 좋았다.
“우아아아아아아!”
너무 좋아서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눈이 와서 신난 강아지처럼, 나는 내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자 권마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저 무서운 얼굴에 저런 부드러움이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좋은 나머지 나는 제일권을 발출했다. 눈사태가 날 수 있기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발출했다. 제이권도 순식간에 쏟아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렸다.
“제자 검무극, 사부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크나크신 가르침으로 이 어리석은 제자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엎드린 내 어깨에 권마의 큰 손이 올려졌다. 거칠고 두꺼운 손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느껴보는 권마의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일어나거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부님.”
권마는 내가 사부로 삼고 싶은 사람이다. 그럴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제자야.”
권마도 첫 제자를 맞이한 것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지금부터 벽력수라권 전권을 전수하겠다.”
권마는 무공전수를 미루지 않았다. 무공전수를 조건으로 나에게 뭘 원하지도 않았다. 권마는 이런 남자인 거다.
설산 정상에서 권마가 벽력수라권 제삼권부터 제육권까지 무공전수를 시작했다.
제삼권 천뢰수라(天雷修羅).
권마의 주먹 중에서 가장 무거운 주먹이었다. 흑운수라처럼 멀리 있는 적을 격타하는 것도 아니고, 벽력수라처럼 빠르게 주먹을 날리는 공격도 아니었다. 주먹으로 직접 타격하는 초식으로, 그 한 방, 한 방에 담긴 힘이 엄청난 무공이었다.
제사권 철각수라(鐵脚修羅)
벽력수라권에는 모두 주먹을 사용하는 초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력한 발차기로 상대를 박살 내는 초식도 있었다. 동작 자체가 화려하고 멋있어서 철각수라가 펼쳐지면 반드시 감탄이 따를 것임을 확신했다.
제오권 금강수라(金剛修羅).
일시적으로 몸을 강철처럼 만들어서 보호하는 초식이었다. 내공 소모가 극심한 초식이지만, 위기의 순간 목숨을 구할 초식이었다.
만약 제오권과 천마호신공을 함께 쓴다면, 일시적으로 금강불괴의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제육권 염뢰수라(閻雷修羅).
벽력수라권의 마지막 권. 염왕이 내리치는 벼락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몸 안의 모든 내공을 일격에 쏟아내는 최후의 초식이었다. 절벽을 무너뜨릴 초식이기도 했는데, 이 수가 통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죽게 될 것이다.
마지막 육권을 사용해야 할 정도의 강적인데, 이 초식이 실패하면 내공 한 줌 없이 그를 상대해야 할 테니까.
나는 설산 정상에서 칠 일간 벽력수라권을 전수받았다. 제일권부터 마지막권까지 다시 꼼꼼하게 배웠다.
그 과정에서 권마가 평생 느꼈던 권법에 관한 여러 깨달음까지 함께 전수받았다. 한 번 제자로 삼겠다고 마음먹자 권마는 정말 아낌없이 주었다. 이 시원시원한 모습에 나도 반한 것이리라.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열심히 수련해서 대성을 이루는 것.
앞으로 싸우다 검을 놓쳐도 그 상황이 상대에게 기회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순간은 방심한 상대에게 일격을 가할 나의 기회가 될 것이다.
“교로 돌아가면 두 가지 발표를 할 작정이다. 첫 번째는 너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것. 두 번째는 동권문은 공식적으로 대공자를 지지한다는 것.”
예상했던 바였다. 이 발표로 또 한바탕 교내가 시끄러워질 것이다. 다른 마존이나 형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리고 과연 아버지는?
“다들 날 너와 대공자 모두에게 발을 걸친 욕심쟁이로 보겠지.”
“그렇게 좀 보면 어떻습니까? 사부님이 그렇게 살겠다는데. 부러우면 너희도 그렇게 해, 그건 어디 쉬울 것 같냐? 이 겁쟁이들아! 하시면 되죠.”
권마가 웃었다. 이제 나에 대한 웃음이 편해졌음을 느낀다.
“이만 내려가자, 제자야.”
“네, 사부님.”
권마와 함께 설산을 걸어 내려왔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내려왔다. 그나 나나 이미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에 올라있지만, 일부러 발자국을 꾹꾹 남기면서 내려왔다.
마음 같아선 돌바닥에 발자국을 찍어서 그 옆에 이런 팻말을 세워두고 싶었다.
권마와 검무극이 사제의 연을 맺고 걸어 내려온 길.
산을 내려온 후 우린 자연스럽게 본교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출발하기 전에 설산 인근의 서호객잔에 들러서 내게 온 기별이 있는지 확인했다.
“아! 사부님. 저는 들렀다 갈 곳이 있습니다.”
“어딜?”
“제 사람들에게서 저를 보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중원에 나가 정보조직을 구축하고 있던 고월과 풍천교주가 나에게 만나자는 기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를 버리겠다고?”
“버리다니요?”
“나 혼자 돌아가라는 말 아닌가? 이제 무공도 다 배웠겠다, 단물 빠진 너는 가버려라. 이거잖아? 아! 이래서 예로부터 뭐든 한 번에 다 주면 안 된다고 했지.”
권마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 몰랐기에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럼, 같이 가시면 언제 돌아갈지 모릅니다.”
고월이 별일 아닌 일로 나에게 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철권들 수업,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도 꽤 많은 날 동안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권마가 내심 신경 쓰고 있을 것 같아 배려한 것이었는데.
“뭐가 걱정인가? 이제 제자도 있는데.”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말을 금방 배우셨습니다.”
권마가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럼, 누구 사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