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202화 (202/214)

제202회 며칠 금방이죠?

“일단 화를 가라앉히게.”

삼선이 검무극을 달랬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일단은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당신이라면 참을 수 있겠소?”

“나라도 못 참았을 거야. 그래도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면 복수도 못 하지 않겠나? 상대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대가 권마라는 말을 자기 입으로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이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나를 자식처럼 여긴다고 했는데. 나쁜 놈!”

삼선은 다른 신선들이 오기 전에 검무극이 일을 저지르지 않게 해야 했다.

“그런 나쁜 놈은 죽여야지. 내가 도와주겠네.”

“당신이 왜?”

“왜냐니? 그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니까.”

검무극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아니겠지. 괜히 당신까지 개입될까 봐 겁나는 거지? 걱정하지 마. 당신이 독을 사줬다는 말,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돈을 빌렸다는 말 대신 당신이 독을 사줬다고 표현했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말은 오히려 더 위험하게 들렸다. 검무극은 의도적으로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삼선은 ‘내가 독을 사주다니? 너 미쳤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을 꾹 참았다.

“권마를 어떻게 중독시킬 건가?”

“술에 독을 탈 거요.”

“권마는 언제 또 오는데?”

“닷새 후에 이곳에 다시 올 거요.”

닷새 후! 삼선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사이에 어떻게든 신선들이 도착하게 해야 한다.

“괜히 끼어들었다간 당신도 죽소. 그러니 빠지시오.”

“권마를 죽이면 마교에서 자네 집 안을 그냥 두겠나? 멸문당할 거야.”

“당하든지 말든지. 우리 아버지는 자식이 이런 일을 당했는데도 찍소리도 하지 못했소. 이런 집구석이라면 차라리 멸문당하는 게 낫소.”

삼선은 막 나가는 검무극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친놈을 잘못 건드렸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떻게 처리할 수도 없었다. 일전에 객잔에서 발휘한 실력으로 볼 때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고수였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는 날 찾지 마시오. 또 찾아오면 그땐 그 독 당신에게 확 뿌려버릴 테니까.”

검무극이 위협적인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나갔다.

* * *

잠시 후, 나는 객잔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고월과 함께 삼선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좀 전에 놈의 수하가 전서를 날리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협계의 핵심 인원을 모두 불렀을 겁니다. 조사한 바로는 저들의 수뇌부는 모두 네 명으로 이뤄져 있고 일선이란 자가 수장입니다.”

벌써 고월의 정보조직이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돈 들인 보람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는 고월이었다.

“그들 넷만 처리하면 된다는 의미지?”

“네. 그놈들 중에서 일선이 주모자입니다. 놈은 의심이 많아서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인데. 이번 일에 권마님이 개입된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래서 다들 군사를 두는 거구나. 너무 편하고 좋다.”

“자기보다 더 머리 좋은 수장을 둔 군사는 너무 힘들지요.”

“오해야. 내가 잘하는 건 아부신공 밖에 없다네.”

잠시 사이를 두고 고월이 말했다.

“덕분에 교주와 잘 풀었습니다.”

검무극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음 교주를 부탁할 때보다 한결 편한 모습이었다.

검무극은 고월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그렇게 붙잡아 둔 풍천교주에게 이렇게 잘하다니.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의 인연이 참으로 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교주가 자네 걱정하더라. 자네가 요즘 힘들어한다고. 자기 말고 고 군사나 챙기라고.”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다들 괜찮다는 말부터 한다더라.”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는 표정으로 고월이 쳐다보자 검무극은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고 군사, 난 안 괜찮아. 마존들 상대하랴, 후계 싸움하랴, 신선채 이 쓰레기 놈들 앞에서 연기하랴, 너무 힘들고 피곤해. 한데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아. 그러니 고 군사도 말해. 힘들면 힘들다고.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내가 듣고 있으니까.”

고월이 뜻깊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힘들다고. 너도 힘들면 이렇게 말하라는 의미로. 그걸 이제 검무극이 자신에게 해주고 있다.

고월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기분이 괜찮아졌다.

* * *

우리 중에 가장 힘들어한 사람은 권마였다.

“……그러해서 권마님이 악당이 되었습니다. 상황이 급해서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가 상황 설명을 마치자 권마는 버럭 화를 냈다.

“그냥 악당이 아니라…… 파렴치한 색마잖아?”

“이 정도 악행은 저지르셔야 독을 써서 죽일 동기가 되죠.”

“다른 이유도 많잖나? 자기를 인격적으로 모독했다거나, 아끼던 수하를 죽였다거나!”

“그래도 이보다 더 자극적이진 않을 것 같아서요.”

“추잡스럽다!”

한 번도 여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던 권마였으니, 그가 펄쩍 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권마가 검무극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댔다.

“네 생각인가? 아니면 바둑 못 두는 네 군사 생각인가?”

“당연히 제 군사 생각이죠. 참지 마시고 가셔서…….”

크르르릉.

권마의 움켜쥔 주먹에서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태풍이 몰려오는 소리였다.

“네 소행이지, 네 군사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느냐?”

“역시 똑똑하십니다. 당연히 제 생각이었죠.”

“왜 나를 색마로 만들었냐?”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가장 강력한 이유 중 하나라서요. 그래서인지 놈들은 제 살의에 대해서는 일절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난 오해받는 것 딱 질색이다.”

“사부님. 어차피 곧 죽을 놈들에게 한 말이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다른 곳에 말이 흘러나갈 일도 없고요.”

그때 문득 권마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한데 그놈이 그 말을 믿었어?”

그가 기대한 말은 ‘권마가 그럴 리가 있겠나?’ 였겠지만.

“네. 너무 잘 믿던데요?”

“한 번에 믿었다고? 그놈 이름 뭐냐? 이름 뭐야!”

괜히 놈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는 권마에게 검무극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며칠만 있으면 끝날 일입니다. 그 며칠은 사부님 인생에서 제일 가치 있는 며칠이 될 겁니다.”

“그건 뭔 소리냐?”

“권마라는 이름이 언급되었기에 놈들의 수뇌부들이 움직일 겁니다. 그 결과 놈들의 마수에 걸린 수많은 청년들이 절망과 죽음에서 벗어나게 될 테고요. 앞으로 놈들에게 당할 사람들까지 치면 수백, 수천 명이 될 겁니다. 그 사람들 사부님이 다 살리는 겁니다.”

“내가 무슨 의선이냐? 사람 살렸다고 좋아하게?”

“그럼, 사람 살리는 것 좋아하는 제자를 위해 며칠만 색마로 살아주십시오.”

권마는 검무극을 뚫어지듯 노려보다가 여전히 어둠의 기운을 풀풀 풍기며 홱 돌아섰다.

“며칠도 길다!”

* * *

나흘 후,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사선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야? 전쟁이라도 났어?”

삼선이 형이었지만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냈다.

삼선은 무공의 고수인 사선을 보자 내내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삼선은 있었던 일을 자세히 사선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 미친놈이 권마를 독살하겠다는 거잖아? 그게 뭐가 문제인데? 죽여도 그놈이 죽이는 거잖아?”

“그 독을 우리에게 빌린 돈으로 샀다는 게 문제지.”

“그게 어째서? 마교에서 누구 돈으로 독을 샀는지까지 조사한다고?”

“평범한 독이고 평범한 대상이면 걱정 안 하지. 아, 이놈이 독을 구해서 죽였구나로 끝날 문제니까. 문제는 무형지독을 샀다는 거다. 그 비싼 무형지독을 어떻게 샀지? 그리고 죽은 사람이 권마야. 그럼 당연히 배후가 있는지부터 의심하겠지. 뒤를 파헤치면 결국 우리 존재도 드러날 거다. 마교가 우릴 그냥 둘 것 같냐?”

그제야 사선도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했다.

“권마는 언제 오는데?”

“내일.”

“그럼 오늘밖에 시간이 없군. 정권문 아들놈은?”

“지금 주점에서 술 마시고 있어.”

“가자, 앞장서.”

사선이 곧바로 가려고 하자 삼선이 말렸다.

“주점에서 그냥 죽였다간 놈의 아비가 아들의 죽음을 조사할 거다. 결국 마교가 개입할 거고. 그럼 우린 더 위험해져.”

“그럼 어쩌자고?”

삼선이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놈을 납치해서 실종상태로 만드는 거다. 약혼녀의 일로 낙담해서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으로 처리하는 거지. 죽여서 화골산으로 녹이기 전에 서찰이라도 짧게 한 장 남기게 하고.”

사선도 그 의견에 동조했다.

“좋은 생각이야.”

* * *

삼선과 사선이 주점 앞에서 기다린 지 한 시진 후, 검무극이 비틀거리며 주점에서 나왔다.

그가 인적이 드문 곳에 접어들었을 때, 삼선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술에 취한 검무극은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뱉었다.

“당신! 또 내 앞에 나타나면 내가 죽여버린다고 했지?”

“이보게,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네.”

검무극은 자기 뒤에 사선이 접근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할 말은 무슨! 또 날 말리러 왔겠지. 이 겁쟁이 같으니라고. 난 겁나지 않아! 내일이면…….”

사선이 검무극의 마혈과 아혈을 제압했다.

말을 하고 있던 검무극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삼선과 사선이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내달렸다.

두 사람은 인적이 없는 숲속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해서야 검무극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뭐야? 죽을래?”

술에 취한 검무극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듯 보였다.

삼선이 검무극에게 준비해온 종이와 붓, 미리 갈아온 먹을 건넸다.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적어라.”

“뭐야? 이건?”

“아버지, 소자 잠시 떠났다 돌아오겠습니다.”

검무극이 취한 눈으로 적으려다가 이내 붓을 내려놓았다.

“너 이 새끼! 이거 적게 하고 날 죽이려는 거지?”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멍청이들!”

삼선과 사선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일선과 이선이 그곳으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일선은 진작 왔지만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확실하게 안전한 상황이라 판단되었기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떠나는데, 서찰을 왜 남기나? 그게 더 이상하지.”

일선의 말에 삼선이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대형이십니다. 우리와 생각하는 게 다르십니다!”

일선이 검무극에게 다가갔다. 그는 정말 성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악인상이었는데, 눈빛 역시 뱀처럼 차가웠다.

“이 하찮은 놈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거군.”

검무극을 노려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산 채로 묻어버려라.”

산채로 매장당하는 공포와 고통을 주려는 것이다.

그때 검무극이 싱긋 웃었다. 지금까지 우울하고 어두운 모습을 연기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원래 검무극의 표정이 되었다.

딴 사람처럼 보이는 그 표정 변화에 지켜보던 삼선은 흠칫 놀랐다.

‘정말이지 이 미친놈은 죽을 때까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나.’

그때 검무극이 일선에게 물었다.

“이번 일은 네 머릿속에서 나왔나? 그렇게까지 머리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일선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머지 셋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일선이 화가 나면 날수록 볼거리가 늘어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가끔은 꿈에 나올까 두려운 일도 벌어지긴 했지만.

“뒤에 누가 있지? 돈은 누가 댄 거야?”

검무극이 다른 신선들을 쳐다보았다.

“혹시 너희들에게도 안 알려줬어? 그 정도의 믿음도 없이 뭉친 거야?”

순간 일선은 알아차렸다. 어느새 검무극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사라졌음을.

“너? 술 안 취했구나.”

“다 깼어. 산 채로 묻는다는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드네.”

검무극의 표정만큼이나 그가 내뱉는 말도 여유로웠다.

뭔지 모를 위화감에 일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매복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지만, 주위에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삼선이 대신 나섰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원래도 미친놈이었습니다.”

얼른 죽여버리고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검무극에게 십만 냥이나 빌려준 것은 자신의 판단이었으니까, 저 미친놈이 일선을 더 화나게 하기 전에 마무리 짓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제가 처리하고 묻겠습니다.”

품에서 비수를 꺼내는 그를 보며 검무극이 물었다.

“내 젊음에 투자한다면서?”

“말을 잘못 들었나 보네. 내 젊음에 투자한다는 말이었어.”

삼선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는 이때가 가장 좋았다.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는 이 순간이.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이 순간이. 물론 지금 이 미친놈은 자신이 원하는 표정을 지어주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짜증 나긴 했지만 특별한 경험이었다. 두고두고 생각날 거야.”

“난 오늘 이후로 너희들 기억 싹 지울 건데.”

“잘 가라! 미친놈아!”

그가 비수로 검무극의 목을 그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차가운 한기가 싹 감돌면서 삼선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주위를 장악한 한기를 느낀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사선이 검을 뽑아들며 주위를 살폈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달그림자는 보통 사람보다 크고 넓었다. 지금 자신의 기분이 어떤지 서릿발 같은 기도로 보여주면서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권마였다.

상대를 확인한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등장한 남자에 비하면 무자비해 보이는 일선은 아기 얼굴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검무극의 뜻 모를 말이 들려왔다.

“너희들이 의심 없이 다 믿어서 지금 화가 많이 나셨다.”

마혈을 제압당한 줄 알았던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에 먼지를 털고 있었다. 그가 웃으면서 권마에게 물었다.

“며칠 금방이죠?”

잠까지 설친 퀭한 얼굴로 권마가 그들 앞에 섰다.

“내겐 억겁처럼 긴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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