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회 과연 거절하는 사람이.
아버지를 만난 후, 난 곧장 마의의 의방으로 갔다.
마침 그는 위중한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심하게 다쳤는지 환자는 물론이고 주위가 온통 피바다였다. 돌아와서 맨 처음 맡은 냄새가 철방의 쇠 냄새였는데, 다음으로 맡은 냄새는 피 냄새가 되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 없습니까?”
“괜찮네.”
나는 멀찌감치 서서 그가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의는 피를 뒤집어쓴 채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철방의 곽 방주나 마의나, 한 분야의 정점에 다다른 사람들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반드시 사람을 살리겠다는 저 노력과 집중력은 반드시 좋은 검을 만들겠다는 곽 방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윽고 한바탕 전쟁 같았던 치료를 마친 마의가 나에게로 걸어왔다.
“오래 기다렸지?”
“아닙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나는 신비를 이렇게 공짜로 봐도 되는 겁니까?”
“원래도 살 사람이었네.”
저렇게 힘들게 구했는데 그럴 리가 있겠나? 마의를 의원으로 둔 행운이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마의가 의방 구석에 받아둔 물에 손과 얼굴을 씻었다. 삐쩍 마른 그의 팔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네. 이렇게 한 번씩 보면 되지. 자네 소식은 잘 듣고 있었네. 그때마다 내가 잘 선택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해줘서 고맙네.”
“의선님 덕분입니다.”
“눈은 괜찮나?”
“아무 문제 없습니다. 너무 잘 보여서 탈이죠.”
“다행이군.”
야율한을 죽이고자 마음먹자 그를 보고 싶었다.
‘절대불가’란 아버지 말을 듣고 스스로 용기를 내고자 마의를 찾은 이유도 있다. 마음 같아선 지금부터 야율한을 죽일 작정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건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나서 할 일이다.
“모처럼 왔으니 차나 한잔하고 가게.”
“좋습니다.”
나는 마의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간 밀렸던 이야기를 다 해주려고 했는데, 그새 또 환자가 오는 바람에 그만 일어나야 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바쁜데 그럴 것 없네.”
조만간에 꼭 다시 오게 될 겁니다.
* * *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혈천도마는 마당에 혈천대도를 꽂아두고 등을 기댄 채 자리에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수련의 열기가 주위 공간에 남아 있었다. 내가 권마와 농땡이 치러 나갔던 동안에도 혈천도마는 무공수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어르신! 저 돌아왔습니다.”
금의환향이라도 한 듯 신나게 인사하는 나에 반해 혈천도마는 어제 본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았다.
“먼 길 다녀왔으면 쉬지, 여긴 왜 왔느냐?”
“왜 오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르신께 인사는 드려야죠. 그리고 보고드려야 할 것도 있고요.”
“무슨 보고?”
나는 혈천도마 앞에 마주 앉았다.
“저 권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혈천도마는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무미건조한 반응은 뭡니까?”
“어떤 반응을 기대했는데?”
“내 허락을 받지 않고 덥석 제자가 돼? 버럭 화를 내시거나. 제자가 되려면 내 제자가 되어야지. 질투하시거나.”
그러자 혈천도마가 뜻밖의 말을 했다.
“권마 아니면 널 제자로 삼을 마존은 없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격적으로 말이다.”
“어르신은요?”
“나는 대룡이 같은 제자가 좋아. 마음껏 굴리면서 가르치는 제자.”
“아! 불쌍한 서 조사관.”
“함부로 남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대가지.”
그들 사제지간의 시작이 풍류주점에서 서대룡이 술 취해서 혈천도마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면서 시작되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안다. 혈천도마가 말은 저렇게 해도 서대룡을 많이 아낀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차기 혈천도마로 그를 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널 제자로 두면 한 달도 안 돼서 화병 걸릴 거다.”
“부정할 수가 없군요.”
“반면 권마는 화병에 걸리지 않지.”
“그건 왜 그렇습니까?”
“애초에 누군가를 굴릴 생각이 없는 사람이니까. 교주나 내가 불이라면 그는 물이다.”
나는 권마가 아버지와 같은 불이라 생각했는데, 혈천도마는 그를 물로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불과 물이기에 오히려 아버지와 잘 어울렸을지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르신께서 섭섭해할까 봐 걱정했었습니다.”
“속 좁은 늙은이 삐질까 봐?”
“속 좁다니요. 그냥 절 위한 애정이 깊으시니 그런 거죠.”
“예전이라면 그랬을 거다. 널 보기 전의 나라면 분명 섭섭해했을 거다.”
“지금은요?”
“지금은 바뀌었지. 너 때문에.”
“저 때문이라고요?”
“그런 속 좁은 늙은이로는 너와 함께 갈 수 없게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느냐?”
“……!”
나는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와 인연을 맺은 후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너는 나를 끝없이 자극했지. 처음에는 짜증 나게 했고, 나중에는 놀라게 했고, 지금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다.”
“수련하시는 것도 그런 측면이십니까?”
“그래. 기존의 내 실력만 믿고 잘난 척 어슬렁거리다간, 비바람에 휩쓸려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 너는 이미 승천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말했다. 승천하는 용이 비바람을 몰고 오고 있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비유적으로 했던 말이었는데, 그 말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혈천도마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고 나는 예전처럼 미꾸라지니 어떻니, 너스레를 떨지 않았다. 그의 말이 옳다. 가진 실력 믿고 어슬렁거렸다간 우린 다 죽는다.
그랬기에 계속 나아가야 했다.
“제가 쓸 수 있는 서른세 가지 부탁 중 첫 번째를 쓰겠습니다.”
내 말에 혈천도마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서른세 가지 부탁이라니?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있었나?”
“물론 없죠. 앞으로 살면서 어르신께 서른세 번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임의로 정한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서른세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기 전에는 감기도 걸리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오래 살라는 내 마음도 담겨 있는 억지였기에 혈천도마는 못 말린다는 듯 픽― 웃고 말았다.
“무슨 부탁이냐?”
“아버지를 설득해 주십시오.”
“교주를? 어떻게?”
“사도맹의 야율한을 처치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혈천도마는 놀라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놀라지 않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차분했다.
“왜 놀라지 않으십니까?”
“넌 미친놈이니까 이런 짓도 저지를 수 있겠다 싶어서.”
“승천하는 용의 비바람 아니고요?”
“아니. 이건 그냥 미친 짓이다.”
“그 미친 짓 한 번만 하게 해주십시오.”
“이유나 묻자. 왜 그자를 죽이려는 거냐?”
나는 혈천도마에게 야율한의 수하인 황금돼지 지생이 신선채를 이용해서 무림의 젊은이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음을 전했다.
마의의 복수에 대해서는 그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으니까.
“그런 이유라면 교주는 허락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어르신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물었다.
“허락이 떨어지면…… 죽일 자신은 있고?”
“해봐야죠.”
“놈도 놈이지만 놈을 지키는 수하들 무공도 만만치 않다. 거기에 일이 잘못 풀리면 본교와 사도맹과의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어.”
혈천도마 역시 전쟁이 발발할 것을 걱정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가?”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젊은이들이 닳고 닳은 저놈들에게 속아 온갖 악행을 강요당하고, 결국 칼받이로 죽거나 자결하고 맙니다. 가치가 있는 일이냐고요? 네,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마의와의 약속이 아니더라도, 야율한의 악행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회귀 전 인생에서야 대법 재료를 구하느라 사도맹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꾸준하게 들려온 소문은 야율한의 수하들과 관련된 악행들이었다.
운명이 이 시점에 나를 그의 앞에 세웠다면, 이번에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왜 너 같은 사람이 본교에서 태어난 건가? 무림맹주 아들로 태어나지 않고.”
“어르신과 싸우지 말라고 그랬겠지요.”
혈천도마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도맹에서 저를 도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데?”
“사도맹 후계자 비사인입니다.”
지난 은원을 갚기 위해서라도 비사인은 반드시 나를 도울 것이고, 그라면 훌륭한 조력자가 될 것이다.
잠시 숙고하던 혈천도마가 권마가 같은 말을 꺼냈다.
“교주의 마음을 바꾸려면 마존들 여덟이 다 나서야 할 거다. 네가 그 정도 능력을 발휘하면 교주도 스스로 마음을 꺾을 명분이 생길 테니까.”
아버지를 가장 잘 아는 두 사람의 의견이기에 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팔마존은 어렵습니다. 당장 마불과 독왕은 형을 지지하는 사람이라 도움을 주지 않을 겁니다.”
혈천도마가 땅에 박힌 도를 뽑으며 말했다.
“과연 거절하는 사람이 그들 두 사람뿐일까?”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가며 덧붙였다.
“네 진짜 인간관계는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모르지.”
* * *
과연 혈천도마의 예상대로였다.
일화검존은 일언지하 거절했다. 정말 그녀의 검술처럼 깔끔하게 거절했다.
“그건 안 되겠네.”
거절하는 이유 역시 깔끔했다.
“이공자, 자네니까 솔직히 말하겠네. 난 이런 일로 교주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네.”
이해할 수 있었다. 젊어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누구보다 높은 그녀였다. 아버지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을 굳이 찾아가서 부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해합니다, 선배님.”
솔직히 일화검존이 거절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다른 마존에 비해 일화검존과는 한 걸음 더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비무 이외에는 그녀와 깊은 인간관계를 맺을 기회가 없었으니까.
“섭섭한가?”
괜히 고지식하게 대답하면 진짜 그녀를 섭섭하게 만들 것이다.
“네, 섭섭합니다. 너무 하십니다!”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이해해 주게.”
그제야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는 미소를 지었다.
“이해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압니다, 선배님 부담감이 얼마나 클지.”
“이해해 주니 고맙네.”
“죄송하지만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시 설득하러 찾아뵐지도 모릅니다.”
“그러게.”
하지만 그녀보다 한 걸음 더 가깝다고 여긴 사람에게도 이번 일의 허락을 받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취마였는데,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는 말에 갑자기 취한 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네.”
취마가 술상에 머리를 박으며 잠든 척했다.
내가 말없이 술을 마시자 그가 엎드린 채로 말했다.
“다른 부탁은 다 들어준다. 뭐 해줄까? 평생 술 사달라면 술 사주고. 돈 빌려줄까? 악인곡에 가서 그놈들 또 패줄까?”
“됐고. 아버지 설득해줘.”
그러자 술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취마가 벌떡 일어나더니 호수로 풍덩 뛰어들었다.
취마는 미친놈처럼 호수 끝에서 끝까지 마구 헤엄치더니 정자로 다시 올라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원래 자리에 앉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라리 내가 술 끊을게.”
술 끊겠다는 취마라니.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정도로 힘들어?”
“내가 찾아가면 교주가 무슨 생각 하겠어? 이 새끼 봐라, 내가 반대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날 찾아와서 설득하려고 해? 그러잖아도 교주는 날 싫어하는데.”
“아버지가 형을 왜 싫어해?”
“싫어해. 교주는 주정뱅이도 싫어하고, 독 쓰는 놈도 싫어해. 교주는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이다. 나는 못 해! 절대 못 해! 미안해, 동생.”
나는 더는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아버지와 관련된 일인데 어찌 이해가 안 되겠는가? 설령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 아니더라도, 상대가 싫다면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안하면 오늘부터 열흘간 금주해!”
“금주한다! 미안해!”
“형이 왜 미안해. 무리한 일로 조른 내가 미안해야지.”
“이번 일로 우리 사이 나빠지면 안 돼!”
“형, 우리 사이가 나빠지는 건 내가 부탁을 해서도, 형이 그 부탁을 거절해서도 아니야.”
“그럼 왜 나빠지는데?”
“솔직하지 않을 때. 이렇게 솔직히 나 이래서 못 해줘, 하면 되는데 지금 내 기분 맞춰주려고 해주겠다고 대답했다고 상상해봐. 하기 싫은 걸 하려다 보면 짜증에 울화에. 결국 나란 사람까지 미워질걸?”
취마가 그랬을 거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거절했어, 형. 난 앞으로도 부탁 많이 할 거야, 누구 좀 패는데 같이 가줘, 외로운데 같이 술 마셔줘, 저 사람 설득해야 하는데 도와줘. 형 그때도 이렇게 솔직히 말해줘야 해. 지난번에 거절했으니 이번에는 억지로라도 해줘야지, 이런 생각 절대 하면 안 돼! 그때 우리 사이가 갈라지는 거야, 알았어?”
날 가만히 응시하던 취마가 말했다.
“오늘부터 네가 형 해라. 진심이다.”
“싫습니다. 우리 형 놀리는 재미로 사는 동생에게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어휴, 세상 부끄러운 형이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아버지 무서워하는 건 절대 부끄러워할 일 아니야. 나, 간다. 아마 이 일로 또 올 거야. 그때 봐.”
그렇게 취마의 거처에서 물러났다.
혈천도마 말이 맞았다. 어쩌면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보다 마존들을 설득하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내 편이라 여긴 일화검존이나 취마도 설득하기 어려운데 여덟 명이 다 가서 이야기해야 아버지가 허락하실 거라고?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지금은 좌절할 때가 아니라 방법을 찾아내야 할 때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나의 싸움 동지가 있는 곳이었다.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