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207화 (207/214)

제207회 예의에 응답하려고 합니다.

극악소마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길게 선이 그어진 벽이 보였다.

극악소마는 그 선을 등진 채 반대쪽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이쪽 벽 색깔이 더 마음에 듭니다.”

내 농담에 극악소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눈구멍 속의 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 눈구멍 속에서 반가움이란 감정을 보게 될 줄이야.

나는 극악소마와 오직 눈구멍 속의 눈빛만으로 소통하지만, 그 어떤 누구보다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가면이 바뀌었습니다.”

“역시 이공자는 대번에 알아보시는군요.”

바뀐 이유가 뜻밖이었다.

“청면이 가면을 여러 개 만들어 왔습니다. 그걸 주면서 말하더군요.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고요. 예쁜 심장에게로 가겠답니다.”

드디어 청면이 귀영대 일조장의 자리를 수락한 것이다.

“그래서 청면의 팔을 자르셨습니까?”

예전에 팔이라도 잘라서 보내지 그냥은 청면을 보내지 않겠다고 말한 그였다.

“안 잘랐습니다.”

“왜요?”

“자르기 전에 꼭 이공자에게 말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데 이공자가 출교 중이니 자를 수가 없었지요.”

어찌 그래서겠는가? 청면이 자신이 원한 삶을 살아가게끔 놓아준 것이다.

잘했다, 소마야. 이대로 갔으면 청면은 마존에 오르지 못하고 늙을 때까지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었을 거다.

“멋지십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진심으로 멋지십니다.”

“이런 칭찬을 들어버렸으니 앞으로도 팔은 못 자르겠군요.”

눈구멍 속의 두 눈이 웃고 있었다. 적어도 나와의 관계에서 그는 극악이 아니라 소마다.

“권마와 출교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농땡이 치러 나갔는데 권마의 제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권마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에 극악소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 잘 싸우게 되었겠군요!”

극악소마는 내 사부가 권마이냐 아니냐는 관심도 없었다. 내가 더 강해졌다는 데서 흥분했다.

“네, 저는 조금 더 강해졌습니다!”

나 역시 이런 말을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대상이 극악소마다. 젊어서 아버지와 권마가 어울려 다녔듯, 극악소마와 나의 관계가 그러했다.

“소마님,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내심 떨렸다. 과연 극악소마는 내 부탁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도맹 야율한을 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아버지를 설득해 주십시오.”

극악소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지요.”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그를 죽여야 하는지, 어떻게 죽일 것인지.

내가 어떤 부탁을 했더라도 그냥 들어줬을 거라는 태도에 내 마음이 울컥했다.

그냥 내 부탁이니까 들어주는 이 세상 단 한 사람.

나는 기뻤다. 이런 순수한 기쁨은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른 마존들의 거절을 이해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섭섭했었나 보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 보니까 말이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 주실지 몰랐습니다.

그 말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왠지 그 어떤 말도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 고마움은 다른 식으로 전했다.

“만약 이번 일의 허락이 떨어지면, 그때 저 좀 도와주십시오.”

소마야, 가자. 나와 또 멋지게 싸우러 가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

나의 뜨거운 눈빛을 보며 극악소마가 기분 좋게 웃었다.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이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그의 피를 끓게 할 것이다.

“지금 찬성한 사람은 누굽니까?”

“확실하게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소마님뿐입니다.”

“제가 일 번입니까?”

“그렇습니다. 소마님이 첫 번째입니다.”

아직 혈천도마나 권마가 설득하겠다는 말을 직접 꺼낸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혈천도마는 나서줄 것이다. 권마 역시 나서줄 거고. 지금 확실히 도움을 줄 마존은 셋.

“괜히 기분 좋군요.”

“제 첫 번째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반대쪽 벽에 있는 쭉 그어진 선을 쳐다보았다. 소마의 시선이 나를 따랐다.

저 벽은 오랫동안 두었으면 합니다.

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 역시 같은 마음일 것이기에.

나중에 천마가 되면 저 벽을 떼어다 천마전에 걸어둘 작정이다.

* * *

권마를 찾아갔을 때 그는 절벽 아래에 서 있었다.

난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눈에 이 절벽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을까?

“극악소마님이 절 위해 나서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마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마 그 사람이?”

권마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극악소마란 사실이 뜻밖인 모양이다.

“둘이 친한가?”

“친합니다.”

“친해지기 쉽지 않은 사람인데.”

“그렇게 따지면 사부님은 어디 쉬운 분이십니까?”

내가 절벽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절벽을 한방에 무너뜨리려고 하시는 분인데요.”

권마의 시선이 나를 따라 절벽을 향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벽은 이 절벽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높고 단단한 벽이었다.

“교주는 이번 일을 허락하지 않을 거다. 너에게는 그 젊은 애들을 구하는 일이 중요하겠지만 교주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마찬가지다. 다른 마존들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아버지나 마존들을 이해한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 지금 보이는 모습들만 해도, 다른 사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이들 변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변화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바뀌어야 무공이 바뀌고, 우리의 운명이 바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지난 삶처럼 그냥 다 지나쳐버리면.

내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회귀 전의 내가 그랬듯 이렇게 다 지나쳐버리는 삶을 살면…… 운명처럼 등장한 화무기에게 또다시 쓸려 버릴 것 같아서다.

사부, 당신이란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이 절벽을 무너뜨릴 수 없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설산에서도 이야기를 나눴듯 교주는 무림일통의 꿈을 꾸고 있다. 네가 야율한을 죽이면 교주가 그리는 큰 그림에 변수가 생길 것이다. 교주가 쉽게 허락할 리가 없지.”

“그럼 더더욱 변수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아버지의 무림일통만큼은 반드시 막을 작정이니까요.”

나는 확고했고, 그 고집스러움을 권마는 말없이 응시했다.

“아버지를 설득해 주시겠습니까? 사부님.”

권마는 마지막 고민에 잠겼다. 아버지와 충돌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권마라고 왜 없겠는가? 아니, 권마이기에 그런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이윽고 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감사합니다, 사부님.”

이래섭니다. 당신을 내 사부로 삼은 것은. 힘들어도 물러서지 않는 남자니까.

혈천도마에겐 대답을 듣지 않았지만, 그것을 재차 확인하러 찾아가진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 나를 도와줄 것이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 확신은 정확했다. 가장 먼저 아버지를 만나러 간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 * *

피의 길을 걸어간 혈천도마가 태사의 아래에 멈춰 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혈천도마의 정중한 인사에 천마 검우진이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첫 포문을 여는 건가?”

검우진은 이미 혈천도마가 왜 왔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겠습니까? 젊은 사람이 큰일 한 번 해보겠다는데 늙은 입이라도 거들어야죠.”

“젊은 놈이 천방지축 사고를 치려 하면 나이 든 우리가 말려야 하지 않나?”

“맞습니다. 우리 젊었을 때 생각해 보면 참 철없던 시절이었죠. 한데 또 생각해 보면 그때만큼 열정적이던 때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열정이 없나?”

“타다 남은 이 흔적이 열정이라면, 있긴 있습니다.”

차분하게 말이 오갔지만 천마전에는 팽팽한 기운이 가득했다.

검우진이 태사의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우리 좀 걸을까?”

“좋습니다.”

검우진이 혈천도마와 함께 피의 길을 걸어서 천마전을 나왔다. 두 사람은 천마전 앞마당을 함께 걸었다.

“저기 대연무장 한가운데서 부탁하더군. 야율한을 죽이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이 아니라 선포였네.”

혈천도마가 좀 편한 어조로 물었다.

“자식이 웬수죠?”

검무극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미소가 검우진의 입가에 지어졌다.

“자네도 겪어봐야 하는데. 아쉽네.”

“제가 교주님보다 유일하게 더 행복한 부분인데. 농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두 사람은 이보다 더 편하게 대화를 나누던 시절도 있었다.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 버릴 줄 알았다면, 교주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가졌을 텐데. 혈천도마는 새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대체 그 많은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낸 걸까?

“다른 마존들은 몰라도 자네가 이렇게 녀석에게 빠져들 줄은 몰랐네. 대체 뭐가 좋아서 이렇게 넘어갔나?”

“그 생각 저도 여러 번 해봤습니다만, 이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드님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묘한 매력이라.”

이번에는 혈천도마가 말했다.

“못 느끼셨습니까? 교주님도 느끼셨을 것 같은데.”

“나는 그걸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라 불렀네.”

검우진은 그 싸구려 감성이란 표현이 순진한 감성으로 바뀌었다는 것까진 말하진 않았다.

“제가 그 싸구려 감성에 푹 빠졌습니다.”

혈천도마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민감하고 중요한 일로 찾아왔지만, 오랜만의 이 대화가 기분 좋았다.

“교주님, 그냥 한 번 져주시지요.”

넌지시 던진 말에 검우진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훗날 비사인이 사도맹주 자리에 오르면, 야율한은 두고두고 사도맹의 화근이 될 자네. 당대 사도맹주가 죽기 전에 야율한을 처리할 수도 있고. 굳이 우리가 없앨 이유가 없지.”

“대신 비사인은 이번 일로 이공자에게 큰 은혜를 입게 될 겁니다. 잃는 것만큼 얻는 것도 있겠지요.”

“사파인들은 원한만 오래가져 갈 뿐, 은혜를 기억하는 족속들이 아니지.”

“하지만 이공자는 기억하겠지요.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큰 양보를 했다는 것을요.”

검우진은 뒷짐을 진 채 말없이 천마신교의 장내를 쳐다보았다. 혈천도마는 더는 밀어붙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천마전으로 오고 있던 권마였다.

“차륜전을 펼치려고 작정한 건가?”

검우진의 농담에 혈천도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 큰 주먹은 왜 넘어갔는지 궁금하군요.”

그러는 사이 권마가 그들 앞까지 다가왔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권마가 검우진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혈천도마에게도 인사했다.

“먼저 오셨군요.”

“권마께서도 오실 거라 생각했소. 참, 이공자를 제자로 맞은 것 축하드리오.”

그러자 검우진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게 축하할 일인가? 위로할 일이지.”

권마가 검우진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신뢰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랬기에 권마는 이 자리가 어려웠다. 다행히 혈천도마가 있어 분위기는 심각하지 않게 이어졌다.

“왜 오셨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 우리 합공을 펼쳐봅시다.”

“합공을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인지 모르겠습니다. 상대가 강할수록 더 강해지는 분이라서.”

그걸 아는 사람이! 라는 표정으로 검우진이 권마에게 물었다.

“자넨 녀석에게 왜 넘어간 건가?”

“평생 안 치던 농땡이를 치다 보니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검우진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진짜 이유를 말해보게.”

권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동안 제가 외로웠나 봅니다.”

“!”

검우진도 혈천도마도 깜짝 놀랐다. 권마 입에서 외롭다는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오면서 마지막에 경공 내기를 했습니다. 어찌나 빠른지 못 따라잡겠더군요. 혼자서 터벅터벅 걷는데 제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심심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심심하다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권마가 검우진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넘어갔나 봅니다.”

권마와 검우진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권마는 이곳까지 오면서 내내 생각했던 것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첫 제자인데, 사부로서 도움이 되어 주고 싶어서 무례를 범하러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권마가 정중히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천마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그 어떤 마존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였기에, 검우진은 아무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때 검우진의 시선이 권마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자네 둘까지는 내가 어찌 이해를 한다 치더라도, 저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곳으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 하얀 가면을 쓴 그는 극악소마였다.

극악소마가 천마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혈천도마와 권마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나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제가 일 번이었는데 두 분에게 새치기를 당했군요.”

그가 나선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런 농담까지?

혈천도마가 먼저 있던 세 사람의 심정을 대표해서 말했다.

“이공자와 얽히면 이렇게 다 미쳐버리는가 봅니다.”

검우진이 극악소마에게 물었다.

“대체 자네는 무엇 때문인가?”

그 질문을 받는 순간 극악소마는 자신의 흘러내리던 가면을 받쳐주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대답하지 않았겠지만 검우진의 물음이었기에 극악소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공자는 예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검우진은 물론이고, 혈천도마와 권마도 깜짝 놀랐다. 극악소마의 입에서 예의란 말이 나온다고? 언제부터 극악소마가 예의를 따졌다고?

세 사람은 느낄 수 있었다. 극악이 말한 예의란 일반적인 예의범절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이공자가 제게 보인 예의에 저도 응답을 하려고 합니다.”

극악소마가 뒤로 돌아서더니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품에 넣어온 새 가면을 쓴 후 천천히 돌아섰다.

지금껏 썼던 새하얀 가면이 아니었다. 악귀가 웃고 있는 섬뜩한 가면이었다. 붉게 칠해진 눈은 귀신처럼 길게 찢어져 있고, 시뻘건 입도 귀밑까지 올라가 웃고 있었다. 이 가면은 전쟁에 나갈 때 극악소마가 쓰는 불사귀면(不死鬼面)이었다.

“이공자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극악소마는 전쟁터에 나가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그는 천마의 분노를 각오했고, 눈 밖에 나는 것도 불사했다.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교주를 설득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듯, 가면 속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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