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211화 (211/214)

제211회 무계획 속 하나의 계획

“어떤 각서?”

독왕이 내 의도를 추측했다.

“네가 각서를 쓰는 대신 난 하루에 독공을 하나씩 가르쳐줘야 한다? 뭐 이런 각서?”

“아닙니다.”

“그럼 이공자 네가 이곳에서 내 독을 훔치거나 독공을 훔쳐 배워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

“독왕님. 저는 독왕님의 독과 독공이 무섭습니다. 되도록 좀 멀리 떨어지고 싶습니다.”

“그럼 대체 무슨 각서지?”

내가 쓰고자 하는 각서는 독왕이 절대 예상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번 내기에서 지면 독왕님의 세상에서 나오겠다는 각서요.”

독왕은 흠칫 놀랐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혼자서 연구하고, 혼자서 배합하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고. 혼자 땅 파고. 바로 그 세상 말입니다.”

그가 얼굴을 바짝 내게 들이밀었다. 말도 안 되게 젊은 그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몸은 다가왔지만, 독왕이란 사람은 내게서 뒤로 물러났음을. 자신의 세계와 바깥세상의 경계선에 서 있던 그는 뒤로 물러나 숨어버렸다.

“넌 나를 데려가서 교주 허락만 받으면 끝이잖아?”

“맞습니다. 그 이유로 온 거죠.”

“그럼 내가 그런 세상에 있든 말든,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나?”

“상관있습니다.”

“무슨 상관?”

“나는 천마가 될 사람이니까요. 차기 천마는 본교의 독왕이 홀로 외로운 독왕이 아니라, 세상을 돌아다니는 독왕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자, 각서 쓰겠습니까?”

독왕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진의가 궁금할 것이다. 내가 어떤 의도를 지니고 이런 조건을 거는지.

하지만 알 수 없을 거다. 미래에 일어날 그 끔찍한 사건을 미리 막을 생각임을 그는 결코 알지 못할 테니까.

“왜 망설이십니까? 어차피 그때는 개가 된 이후의 일인데요. 상관없지 않습니까?”

내기에 지면이란 단서까지 달아줬으니까.

내기에 질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만큼 이곳을 나간다는 것이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인 모양이다.

나는 더는 그를 밀어붙이지 않고 붓을 들었다.

“암튼 좋습니다. 저는 쓰겠습니다. 독왕님께 배우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각서 써야죠.”

나는 이곳 천독림에서 어떤 독에 중독되더라도 그건 독왕의 책임이 아니라, 이곳에 자진해서 온 나의 책임이라는 각서를 썼다. 거기에 수결까지 찍었다.

독왕은 정말 내가 각서를 쓰자 깜짝 놀랐다. 각서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정말 각서를 쓸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너 멍청이냐? 이제 나는 너를 중독시켜서 고통스럽게 죽여도 책임을 지지 않게 됐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냐?”

“똑똑한 사람만이 독공을 익힐 수 있으니까요. 독왕님은 마존들 중에 제일 똑똑한 분이니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진 않을 겁니다.”

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와서 보니 알겠습니다. 독공을 익힌 사람이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요. 이 많은 독초와 독물을 다 외워야 하고, 독을 제조하려면 수백, 수천 가지의 조합과 배합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해약까지 만드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본격적으로 하독술을 익혀야 하잖습니까? 이런 똑똑한 사람의 정점에 서 계신 분이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요? 그럴 리 없습니다. 혼자 땅을 파며 웃을 수는 있어도 그런 멍청한 짓은 안할 겁니다.”

독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생긴 것처럼 반응도 귀여웠다. 큰 눈이 몇 번 껌벅이더니 놀랍다는 듯 말했다.

“넌 말도 많고 말도 잘하는구나.”

이 순간 독왕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독왕아,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저와 있으면 심심하진 않을 겁니다. 자, 그럼 저는 하던 일 마저 하겠습니다.”

각서를 그에게 건넨 후, 나는 일을 계속했다. 독초 자루를 가져와서 풀어헤쳤다. 내가 독초를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독왕이 내게 불쑥 말했다.

“난 뭐라고 쓰면 돼? 넌 쓰고, 난 안 쓰고. 그럼 나만 옹졸한 사람이 되잖아?”

결국 각서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아, 별 내용 없습니다. 그냥 열흘에 한 번 천독문을 나간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그거면 된다고?”

“네.”

“천독문 입구 앞에 서 있다가 들어와도 돼?”

“상관없습니다. 이곳에서 나가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 보는 풍경과 대문 앞에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를 테니까요.”

독왕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뭔가 싶지? 네가 미친놈이라면 나도 미친놈 소리 듣는 사람이다. 어디 한 번 해보자, 독왕아. 누가 더 미친놈인지 승부를 보자.

독왕이 각서를 쓰고 수결을 찍었다.

“이공자, 네가 졌다. 난 절대 설득당하지 않을 테니까 이 각서도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내 의지가 이런데 어떻게 꺾을 거냐?”

사실 그를 설득할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혈천도마가 말했듯, 지금껏 해왔던 방식대로 그를 대할 뿐이다.

“최선을 다해봐야죠.”

“정말 넌 내가 연무장에서 짖을 사람처럼 보이냐?”

“인생에서 한 번쯤은요.”

“어떻게 이렇게 허술한 너에게 다른 마존들이 넘어간 거지?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독왕의 눈빛에는 자신감과 총기가 가득했다. 지금은 얼굴에 흙을 잔뜩 묻히고 땅을 파던 독왕과는 다른 사람이다.

“조심해. 이제부터 네가 죽어도 난 책임 없으니까.”

* * *

다음날 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열심히 일했다.

독왕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의도된 것이라 여겼다. 내가 말만 하면 습관적으로 이 말을 했다.

“그래봤자 내게 잘 보이려고 하는 수작인 것 다 알아. 헛수고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무계획 속에 하나의 계획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고 일에 집중하자.

일을 진심으로 배웠다. 독을 배워서 어디에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여기서 일하는 것은 내가 처음 해보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첫 경험이 주는 가르침이 있다.

“제가 언제 독초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날라서 그것을 분류하는 삶을 살아보겠습니까? 제겐 값진 경험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몸을 쓴다.

이것이 내 인생이나 무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를 바란다. 어떤 생각을 떠올리려고 아무리 집중해도 잘 안될 때가 있다. 한데 목욕하다가 갑자기, 혹은 길을 걷다가 갑자기 퍼뜩 떠오를 때가 있다.

마찬가지다. 나는 천독림에서의 이 생소한 일이 내 삶과 무공에 신선한 영향을 끼치기를 바란다. 독초를 분류하다 풍신사보가 십이성 대성하길 바랐다. 독을 배합하다 삶의 새로운 면을 깨닫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이곳에서의 모든 일이 초조하지 않았고, 재미있었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독왕의 마음을 움직일 기회가 올 거로 생각했다. 그 기회는 내가 진심으로 독공에 빠져들 때 찾아올 것이다.

“조심해! 이번에는 딱 절반만 부어야 해!”

내가 살면서 언제 단혼산(斷魂酸)의 열다섯 가지 재료를 배합해 볼 기회가 있겠는가?

“됐어! 됐다!”

그가 시키는 대로 나는 정확하게 따랐다. 내 무공 경지로 어찌 하는 일이 정확하지 않겠는가? 아마 이곳 천독문의 누구보다 그의 마음에 들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평소에도 이 일을 혼자서 다 하시는 겁니까?”

“그래.”

“힘드시겠습니다.”

함부로 이곳에 독인들을 들이지 않는 이유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의 거처에는 워낙 치명적인 독이 많은데, 만약 제자들을 잘못 들였다가 사고라도 치면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실제로도 통천각의 강력한 감시와 조사를 받는 곳이 천독림이었다. 독이 사용되면 반드시 보고해야 했고, 그 재고량도 항상 조사했다.

단혼산 배합을 끝내고 난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내 소감을 솔직히 밝혔다.

“재미있습니다! 다음은 무슨 독 배합을 하실 겁니까?”

물론, 그는 나를 믿지 않았다.

“넌 천마보다는 저잣거리의 배우를 하는 게 더 잘할 것 같은데?”

“다음에 저와 중원에 나가면 연희단에 들어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독왕님 외모면 주연 자리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독왕이 질색했다. 그의 표정이 딱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는 것도 싫은데, 뭐? 연극의 주연을 맡으라고?

“방금 독왕님 상상 속에서 무대 위 배우들과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싹 다 독살당해 죽었군요.”

“과연 이공자 너는 살아남았을까?”

홱, 하고 돌아서는 그에게 내가 소리쳤다.

“공연은 취소합니다!”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 * *

독왕은 다른 사람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로 찾아온 나에게 이 정도 관심이라면, 평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고 있을지 예상이 된다. 그에게는 사람들은 독초 저 아래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다 충동적으로 질문을 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독왕이 독초를 빻다가 불쑥 물었다.

“이봐, 이공자 솔직히 말해. 여기서 독공을 훔쳐 배워서 자네 형을 독살하려는 거지?”

나는 큰 통에 옮겨 물을 담으며 대답했다.

“독왕님께 이렇게 와 있는 걸 뻔히 아는데, 형이 독살당해 죽으면 누구부터 의심하겠습니까? 저는 오히려 형이 독살당해 죽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죠.”

쿵쿵! 반박 대신 독왕의 독초 빻는 소리가 더 커졌다.

“전 독살에는 관심 없습니다. 굳이 독왕님께 한가지라도 배울 수 있다면 다른 걸 배우고 싶습니다.”

“어떤 것?”

여전히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독초를 빻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저러다 언제 또 자기만의 세상으로 갈지 모를 일이지만, 지금 내 대답은 그를 이쪽으로 확실하게 끌어내는 말이었다.

“해독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독공의 꽃은 하독이 아니라 해독 아닙니까?”

순간 독초 빻는 소리가 멈췄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난 후 가장 놀란 얼굴이었다.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을 내가 정확히 말했으니까.

“며칠 안 되었지만 제가 와서 느낀 점은 독을 만드는 것보다 그것을 완벽하게 해독할 해약을 만드는 일이 더 어려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독을 확실하게 해독할 수 있는 해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 상대가 독을 뿌렸을 때 순식간에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독공의 고수가 아닐까?”

하독만이 아니라 해독까지 완벽할 때 비로소 독공의 극의를 깨우치게 된다는 의미.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나?”

당신에게 독공을 배운 차기 독왕에게서요.

“그냥 제 생각입니다.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무공도 그렇거든요. 죽이는 것보다 생포하는 게 더 힘들죠.”

나는 그에게 승부수를 던졌다. 만독불침인 내게 가장 유리한 승부.

“독 하나를 정해서 제게 해독술을 가르쳐주십시오. 저는 해독하고, 독왕님은 하독하고. 어떻습니까? 한판 붙으시죠!”

평생 독공을 익히신 분인데, 저 정도는 이길 수 있지 않습니까? 이건 자존심 문제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도발하지 않았다. 섣부른 도발은 역효과만 낼 게 분명했기에.

독왕아, 하자고 해. 한판 붙자고 말해!

그렇다고만 하면 이번 내기는 내 승리였다.

하지만 독왕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았다.

“싫다.”

단호한 독왕의 거절에 내가 물었다.

“왜 싫으십니까?”

“내가 네 수작을 모를 줄 아는가? 내게 이런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거겠지. 만약 네가 내 독을 해독할 수 있으면 내기에서 진 것으로 하겠다. 그렇지? 이 말이 듣고 싶은 거지?”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내 일이 아니라면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내기에서 이기면 되잖습니까?”

“어떻게 내가 이긴다고 장담하나? 해독술도 내 해독술인데.”

독왕이 다시 독초를 빻기 시작했다.

“가서 짖는 연습이나 해, 이공자.”

* * *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독왕을 알면 알수록 나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럴 때는 각오를 다지게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점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적합한 분이 아버지다.

주무시기 직전에 찾아뵙는 바람에, 나는 또 한 번 아버지의 잠옷을 보게 되었다.

“그때 봤던 것과 다른 꽃무늬군요. 이건 무림에서 제일가는 호신갑일 겁니다. 적들이 보고서 ‘에이, 설마 천마가 이런 잠옷을 입겠어?’ 하고 그냥 다 지나갈 테니까요. 그 옷이 제일 안전한 옷입니다!”

아버지는 언제까지 헛소리할 거냐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셨는데, 내가 한 번은 찾아올 줄 알고 계신 눈치였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죠? 독왕이 내게 넘어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벌써 포기했느냐?”

“그럴 리가요? 다만 그렇게나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아버지의 입가에 그 특유의 비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오늘 찾아온 것은 저 웃음을 보려고 온 것이었다.

그 웃음을 보니 힘이 났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지금 실컷 즐거워하십시오. 저는 꼭 독왕을 이 앞으로 데려옵니다.

진작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아버지 독왕 싫어하시죠?”

아버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무를 진정 사랑하시는 아버지였으니 독공이나 섭혼술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싫어하시는데 왜 살려두십니까? 죽여버리시지요.”

“적들에게는 가장 위협적이니까.”

“반란을 일으키거나, 미쳐서 본교 사람들을 중독시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독왕을 본교의 무기로 삼으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그 과정에서 형이나 제가 죽으면요?”

“역시 감수해야지.”

“그런 말씀은 어디 숨겨둔 자식이 한 열 명쯤 있을 때나 하시는 말씀이죠.”

“왜 없다고 생각하느냐?”

“없어야죠. 형 하나만 해도 이렇게 골치가 아픈데.”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사마명이나 혈천도마가 말했으면 껄껄 웃으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뭔가 꽉 막힌 벽 앞에 서면, 아버지 생각부터 납니다. 이렇게 얼굴 뵈었으니 됐습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참, 이대로 가다간 조만간에 대연무장에서 불효 아닌 불효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너스레를 떤 후 돌아서려는데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독왕이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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