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6화 (6/202)

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6화

한 명을 제친 태양은 그만큼의 공간을 파고 들어갔다.

빠르게 상대편의 1선과 2선을 부수고 최후방으로 달려가는 태양을 향해 선배팀 선수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체계적으로 배운 지역방어에 따라 자신의 지역으로 들어오는 태양을 향해 한 명의 선배가 태양의 길목을 막고 거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주변의 다른 선배들은 공간을 좁히며 삼각형 대형으로 태양을 압박해 들어갔다.

태양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빠르게 자신의 앞을 막은 선배를 향해 달려갔다.

이미 유려한 프리플랩으로 한 명을 제친 걸 확인한 그 선배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며 태양과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뒤로 달리는 선수와 앞으로 달리는 선수의 속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태양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선수들 보다 빨랐다.

중학교 축구에서 이 정도로 빠른 애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니, 공을 몰고 간다는 전제를 둔다면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간다.

태양 앞에 노련한 3학년 선배가 그렇게 평가할 즈음.

태양은 그것을 비웃듯이 더욱더 속도를 올렸다.

“…엇……!”

너무 빨라 미처 대응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태양이 조그만 공간을 비집고 빠져나갔다.

3학년 선배는 평가를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 손가락이 아니라, 단언컨데 없다.

“마, 막아!”

기겁을 한 선배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이미 다른 선배들 역시 기겁하며 태양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태양을 막아선 것은 주장이었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를 지닌 그는 공세환과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였다.

지금의 서울 UTD가 장기적으로 보고 연령대별로 키우고 있는 후방 미드필더 역할로 공세환은 그의 다음 타자라고 볼 수 있었다.

“주장이 만만한 애는 아니지.”

생각한 것보다 키가 많이, 아주 많이 크지 못해서 미래가 걱정되는 선수였지만, 체력과 투지를 바탕으로 뛰어난 수비력을 보여주는 선수다.

그래서 조봉수는 물론이고 코치까지 여기서 끝이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빠르고 기술이 좋다 하더라도 태양은 경험이 없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뭘까?

이상하게 저 태양은 뭔가를 해줄 것 같다.

그리고 태양은 기대감을 져버리지 않았다.

공을 오른발 앞에 두고 달리던 태양이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공을 오른쪽 바깥으로 밀어낸다.

오른쪽으로 치고 빠질 것인가?

주장이 슬그머니 몸의 균형을 왼쪽에 두는 순간 태양은 그 틈을 노렸다는 듯 빠르게 발을 움직여 공을 스치고 지나 인프론트로 공을 끌어온다.

프리플랩.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주장이 공을 컷하기 위해 왼발을 뻗는 순간, 공은 그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태양의 왼발을 향했다.

“으잇!”

주장은 쪽팔리게 1학년 신입생에게 공을 뺏기지 않겠다는 듯 왼발에 힘을 주고 오른발을 뻗어 태양의 왼발에 놓인 공을 뺏으려고 다리를 벌렸다.

태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문처럼 벌어진 주장의 가랑이 사이로 공을 툭하고 찼다.

절묘한 타이밍을 노린 넛메그.

치욕적인 돌파기술을 당한 주장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가운데 태양은 유유히 골대를 향했다.

전방에 있던 선수들이 태양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이제 남은 건 센터백 둘뿐.

태양을 막거나 다른 선수들이 수비지원을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문제는 1학년 선수들도 태양을 쫓아 라인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건방진 신입생이 절대 패스를 하지 않을 것 같다는 거다.

센터백 둘은 서로 눈을 교환하다가 한 명의 선수가 태양에게 달려들었다.

둘 중에 발이 빠른 센터백이었다.

그는 태양과 거리를 유지하다 태양이 옆으로 피해 달려 나가려 하는 순간에 맞춰 태양의 오른쪽에 나란히 서서 태양을 밀어붙였다.

이 선수는 공격 포지션에서 공격적인 능력이 형편없어 수비로 내려온 어떻게 보면 별 볼 일 없는 선수지만, 고등학교까지 서울 UTD 진학이 예정된 선수였다.

오로지 단 하나의 재능, 빠른 발 때문이었다.

발밑이 안 좋아 공을 달고 달리면 속도가 확 죽어버리지만, 공이 없는 수비수라면 그 속도로 공격수를 잡을 수 있는 선수다.

무엇보다 지난 3년간 상대 선수 대응을 훈련받아 왔고 철저히 그것을 따르는 선수였다.

지금도 태양의 오른쪽에 붙어 태양의 주력 발을 죽이고 있었다.

태양은 자신의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선배가 거슬렸지만, 무리하지 않았다.

옆에서 씩씩거리는 게 제쳐 버리면 뒤에서 유니폼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치열하게 붙는 척하다가 남은 하나의 수비가 확실히 붙잡았다 판단하고 지원하기 위해 다가올 즈음.

태양은 오른쪽에서 미는 힘을 반동 삼아 왼쪽으로 치고 들어갔다.

달려오던 센터백이 예상했다는 듯 태양을 견제하던 센터백을 대신해 오른쪽을 가로막는 순간.

태양은 왼발을 힘차게 휘둘렀다.

크게 감긴 공이 골키퍼의 손을 피해 골대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양발이네.”

“양발이었어.”

“허.”

지금까지 계속 오른발만 써서 몰랐는데, 왼발로도 수준급의 감아차기를 하는 걸 보면 양발이 분명했다.

조봉수는 전율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세상에 이제 막 입학한 1학년이 선배 다섯 명을 제치고 골을 넣다니.

천재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보통 천재가 아니다.

이맘때쯤은 1살 차이도 피지컬 차이가 크고 경험 차이도 클 때였다.

그걸 초월하다 못해 농락하고 있었다.

“직접 보니 어떠냐?”

조봉수 감독은 코치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지릴 뻔했습니다, 감독님.”

“저도요. 제가 저 나이 때 저랬으면 국가대표 하고 있었을 거 같습니다.”

“신은 불공평하네요.”

그 말에 조봉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신은 몰라도 적어도 축구의 신은 공평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는 아무리 올라가고 싶어도 올라갈 수 없는 위치를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손쉽게 오를 수 있는 재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생기는 게야.”

“네?”

“저런 애들 최고로 키워서 대리만족하고 싶어하거든.”

최고의 선수는 못 돼도 최고의 스승으로 남을 수는 있을지 모르니까.

그 맛에 유소년을 키우는 거다.

“일단 태양이 좀 불러라. 태양이 자리에는 지금 필드 안 뛰는 2학년 집어넣고.”

“네.”

코치가 태양을 부르자 태양이 총총 걸음으로 필드를 나와 감독에게 달려와 말했다.

“부르셨어요?”

“왜 패스를 안 하니?”

조봉수의 물음에 태양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할 필요가 없어서요.”

당돌한 놈이로고.

할 필요가 없다니.

결과로 보여줬으니 저런 말을 할 자격은 있었다.

하지만 현대 축구에서 저런 독선적인 플레이를 좋아하는 감독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이야 뛰어난 재능에 수준 차이가 너무 나니 저런 플레이가 가능한 거겠지만, 프로에서는 통할 지 미지수다.

그 전설적인 리오넬 메시조차도 매번 2, 3선까지 내려와 공을 받고 몇 명씩 제치고 골을 넣는 플레이를 보여주진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패스는 필요하지 않을까?”

조봉수의 물음에 태양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패스 줄 사람도 없었어요.”

“…음?”

이 말은 그렇게 공을 가지고 달리면서도 주변을 살폈다는 말이 아닌가?

“제가 달리면 같이 달려줘야 할 텐데 아무도 안 따라왔어요.”

맞는 모양이다.

태양이가 말한 대로 공을 가로채 돌파하는 상황에서는 하나라도 같은 라인으로 달려 역습에 동참해야 했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물론, 태양이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탓도 있었지만 어쨌든 아이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래, 그래서 패스를 못한 거구나.”

조봉수는 그리 말하며 태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구 경기를 보면서 개인기 돌파만 본 게 아니었어?”

“네. 경기 리뷰 같은 것도 많이 봤어요.”

“어렵지 않디?”

“어렵긴 한데, 재미있었어요.”

“기특하구나.”

이 아이는 그저 혼자 돌파하고 골을 넣고 돋보이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축구 그 자체를 좋아해 이해하려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니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지.

조봉수는 흐뭇하게 아이를 바라보고 말했다.

“네 활약은 충분히 봤으니까 오늘은 스트레칭하고 마무리하자꾸나.”

“…네.”

아쉬운 얼굴로 필드를 바라보던 태양은 뒤로 물러나 코치와 함께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조봉수 감독도 태양이 더 뛰는 걸 보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허무하게 돌파당한 선배들이 흥분해 태양이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걱정돼서 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물을 시작부터 망가뜨릴 수 없지.

아직 세공되지 않은 보물을 세공해서 이 세상 둘도 없는 보물을 만들 생각에 조봉수 감독은 벌써부터 흥분되는 걸 느꼈다.

한편 그런 조봉수 감독 뒤에서 태양이를 U-12 코치인 정한율이 바라보고 있었다.

드림 오브 서울에서 승급해 올라온 아이들을 본다는 핑계로 이 자리를 찾아와 뒤에서 지켜보던 그는 복잡한 얼굴로 태양이를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사라졌다.

* * *

내가 빠진 뒤 경기 양상은 선배들이 압도하며 3대1로 끝나게 되었다.

내가 빠진 경기를 지켜보자니 서울의 장단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터운 수비층, 그리고 이들을 보호할 후방 미드필더 라인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1선과 2선 자원이 너무 얇다.

특히 1선, 최전방 공격수로 뛰는 선배들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저 정도 수준이면 내가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자, 수고했다! 신입생들은 씻고 바로 집으로 가고, 신입생들 씻을 동안 2, 3학년은 시청각실로 와라. 알았나?”

“네!”

내가 고발한 덕분에 욕 좀 먹을 것 같다. 아니면 소원수리 같은 거 하려나?

코치의 안내를 받아 샤워실로 향하는데 주장이랑 눈이 마주쳤다.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시선을 외면하고 샤워실에 옷을 벗는데 공세환이 슬그머니 다가온다.

“야, 너 존나 잘하더라?”

“내가 말하지 않았냐? 나 좀 한다고.”

“좀이 아니라 존나 잘하던데? 팬텀 드리블 어떻게 하는 거야? 나 좀 가르쳐 주라.”

“감독님이 가르쳐 주는 거 아니면 괜히 배웠다가 욕 먹을 걸?”

“그런가?”

“아마?”

적어도 예전에 내가 다니던 중학교 감독은 그랬다.

이런 거 배울 시간에 패스나 연습하라고 뒤지게 욕먹은데다 경기도 못 뛰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너 어디 사냐? 기숙사 생활 하냐?”

“학교에서 조금 멀어서 숙소 생활 해야 할 듯?”

“워, 나도 그런데.”

“어디 사는… 아, 아니다.”

아… 잊고 있던 게 생각난다.

이 자식 엄청난 금수저였다.

집이 한남동이었지 아마?

“같이 기숙사 생활할 건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나는 표정을 싹 바꾸고 웃으며 세환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 어어, 그러자.”

해맑게 웃는 세환이에게서 돈 냄새가 나는 거 같다.

자고로 돈 있는 친구랑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거 없지.

세환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서둘러 씻고 나왔다.

“안녕히 계세요!”

“오냐! 내일 보자!”

코치에게 인사하고 교문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길.

“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름이 정한율 코치였던가?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냈지? 잘하더라?”

“보고 계셨어요?”

정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이 분위기는?

표정이 왜 저리 무거워?

“저… 왜 그러세요?”

“태양아.”

왠지 우물쭈물하던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부른다.

“네, 코치님.”

“혹시… 말이다…….”

“네?”

“외국에 나갈 생각 없니?”

…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