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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8화 (8/202)

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8화

기다리던 K리그 주니어 1라운드가 시작되는 날.

오늘은 홈경기였기 때문에 우리 중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엉아! 엉아아!”

가볍게 운동장을 돌면서 워밍업을 하는데 여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 스탠드를 바라보니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여름이가 맹렬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씨익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 주자 가을이와 겨울이도 여름이를 따라 손을 흔든다.

내 지난 삶에 수없이 많은 경기를 생각하면 아주 작은 고작 유스팀 경기에 불과한데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보는 내 인생 첫 경기여서 그런 것 같다.

“아부지!”

그 가운데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공세환이 손을 번쩍 든다.

놈의 시선을 따라 스탠드를 바라보니 공세환의 부모님이 보였다.

지난 삶에서도 본 적이 있다.

그때보다 한참은 젊은 모습이었지만, 세환이 아버지의 불룩한 배와 휑한 이마, 어머니의 부조화스러운 콧대는 그때와 다를 게 없었다.

“어어? 어매!”

유준이의 부모님도 먼 여수에서 아들 경기를 보기 위해 올라온 것 같다.

아무래도 아들의 데뷔전(?)이니까 다들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겠지.

아, 우리 아버지 빼고.

아버지는 수원을 상징하는 푸른색 유니폼…까지는 아니지만, 푸른색 반팔티를 입고서 매우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 모습만 봐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내 몸은 난지도에 있지만, 내 마음과 영혼은 수원에 있다는.

뭐, 그런 마음이랄까?

불편한 아버지를 뒤로하고 워밍업을 끝낸 뒤 감독 앞에 섰다.

오늘 나는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3학년 선배를 제치고 선발이었다.

주전 경쟁은 중학교 때부터 이렇게 냉정한 법이다.

아무리 3년을 열심히 뛰었다 하더라도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유스팀에서조차 후보가 될 수밖에 없다.

침울한 표정으로 스탠드에 앉은 선배를 흘끔 바라보다 조봉수 감독을 바라봤다.

조봉수 감독은 작전 판에 우리를 대신하는 동그란 자석을 열심히 움직이며 오늘 작전을 설명하고 있었다.

열심히 다른 선수들에게 작전을 설명하던 조봉수 감독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 특유의 무시무시한 표정이 아닌 세상 사람 좋은 할아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우리 태양이.”

부르는 목소리도 온화하기 그지없다.

“우리 태양이는 알지? 알아서 잘 하겠지만, 혼자 무리하지 말고 패스할 때는 하고, 응?”

“네, 감독님.”

“너무 내려오지도 말고. 알지?”

“네.”

“그래, 우리 태양이는 알아서 잘 할 거야. 그지?”

감독님이 코치들을 바라보며 말하자 코치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훈련에서 하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니 감독의 기대가 장난 아니다.

“자, 다들 가자.”

전술 지시를 끝으로 심판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필드 한가운데 서서 선수들끼리 악수를 나누고 경기를 준비했다.

삐익!

그리고 울리는 휘슬.

경기가 시작됐다.

* * *

“엄마, 경기 시작한 거야?”

가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축구를 찾아보지는 않지만, 남편이 축구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경기 규칙은 알고 있었다.

“엉아 뛴다!”

여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형을 쫓는다.

“오빠? 어디?”

“엉아 등에 19번 써 이써!”

“19? 1하고 9?”

두 자리 숫자까지 마스터한 겨울이가 손가락을 꾸물거리다가 경기장을 바라봤다.

비슷한 유니폼의 선수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어서 등번호로는 오빠를 찾을 수 없었다.

“오빠 안 보여!”

안 보일 수밖에.

자기 딴에는 엄마 말 잘 듣는다고 스탠드에 얌전히 앉아있는 탓에 앞에 앉은 아저씨에게 반쯤 가려져 운동장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아빠한테 목마 태워 달라 할까? 그럼 잘 보일 텐데?”

“웅! 겨울이 목마 조아.”

“자기야, 겨울이 좀… 어휴! 뭐하고 있어!”

아빠를 본 엄마는 그 즉시 아빠의 등짝을 짝하고 때렸다.

“난지도 타령 좀 그만해, 좀!”

아빠는 그 말에 화들짝 눌라 주변을 둘러보고 엄마의 입을 막았다.

“적의 본진에서 난지도 타령을 하다니 큰일 나 여보!”

“여기가 무슨 적의 본진이야! 당신 장남 축구팀이지!!”

“그건 그거고!”

“시끄럽고, 겨울이 목마 좀 태워줘! 오빠를 못 찾겠대!”

“아빠, 나 목마!!”

“그럴까?”

아빠는 양팔을 번쩍 들고 총총 뛰는 겨울이를 안아 들어 목에 태웠다.

“어! 오빠다!”

그때 마침 태양이가 공을 잡았다.

1선과 2선 사이에 공을 잡은 태양이는 빠르게 주변을 훑더니 오른쪽 풀백과 수비수 사이에 하프 스페이스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와아!”

그 무시무시한 속도에 스탠드에 앉아있던 학부모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거리를 좁혀오는 상대 선수를 피해 요리조리 비집고 들어가던 태양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슬쩍 골대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공을 감아찼다.

쭉 뻗어나가던 공이 크게 회전하며 그대로 반대편 골대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와아아아!”

그 기막힌 골에 스탠드가 들썩였다.

“오빠가 골 넣었어!”

“엉아!!”

“오빠 이긴 거야?”

태양의 동생들도 그 자리에서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워, 우리 장남… 손홍민인 줄 알았네.”

아빠는 혀를 내둘렀다.

태양이가 골을 넣은 위치가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리던 손홍민이 골을 넣던 그 위치, 일명 손홍민 존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기가 막힌 골을 넣은 태양은 달려오는 동료들도 쳐내고 별 거 아니라는 듯 하프라인으로 어슬렁 걸어가고 있었다.

누가 보면 골이 무효라도 된 줄 알 것 같았다.

그게 성남 아이들을 자극했다.

자신들에게 골을 넣는 건 당연하고 쉬운 일인 것 같은 그 모습에 흥분한 성남 아이들은 경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거세게 서울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얘들아 작전대로 해야지!”

성남 감독이 라인에 가까이 서서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쳤지만, 흥분한 아이들의 귀는 이미 닫힌 뒤였다.

라인을 올리고 서울을 압박해 들어간다.

사실, 성남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화날 일이긴 했다.

작년만 해도 서울에게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로 이전에 경기에는 4대0으로 대승을 거두기까지 했다.

만만하고 우습게보던 상대에게 고작 1분 만에 골을 먹혔으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울은 작년의 서울이 아니었다.

조봉수 감독은 성남이 쉽게 뚫어버린 지금의 수비라인을 보호하기 위해 투 볼란치를 두었다.

서울에서 유난히 힘을 쏟는 포지션인 후방 미드필더의 두 선수, 그중에 공세환은 그 특유의 활동량으로 성남이 파고들 공간을 영리하게 차단했다.

상대 공격의 흐름을 차단하는 그 움직임만큼은 3학년, 아니, 고등학교 선수와도 비교될 만했다.

그 가운데 활로를 찾지 못해 지켜보던 성남의 에이스는 조금 먼 거리에서 작은 공간을 확보해 그대로 슈팅했다.

무시할 수는 없었다.

기습 같은 중거리슛이 이 선수의 주특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울의 3학년 골키퍼는 저 중거리 슛을 막지 못해 작년에만 세 골을 헌납한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골대를 지키고 있는 건 3학년 골키퍼가 아닌 진유준.

중학생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피지컬을 지닌 유준이는 아주 손쉽게 공을 잡아냈다.

“유준아! 차!!”

공을 잡기 무섭게 조봉수가 소리쳤다.

유준이는 자신의 피지컬을 그대로 살려 있는 힘껏 전방으로 공을 찼다.

대포알처럼 공이 쭈욱 뻗어 성남의 후방으로 떨어진다.

성남 선수들이 다급하게 몸을 돌려 공을 쫓았지만, 그들 사이를 비집고 그들보다 몇 발이나 더 빨리 공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엉아!!”

여름이의 형, 태양이었다.

“그렇지!”

스탠드의 학부모가 모두 들릴 정도로 조봉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좋아했다.

지금 조봉수의 전술은 모두 기승전태양이었다.

특히 역습은 모든 선수에게 후방에 공을 찔러주든, 태양에게 패스하든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줬을 정도다.

태양은 그런 감독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꼴!!”

여름이가 다시 한번 벌떡 일어나 만세했다.

옷이 올라가 볼록한 배와 배꼽이 보였지만, 여름이는 신경 쓰지 않고 마냥 좋아했다.

“엄마, 엉아 꼴 잘 넣어! 그지?”

“그러게, 우리 여름이 형아 대단하네?”

“여름 오빠 엉아 아냐! 겨울이 오빠야!”

“그래, 여름이 겨울이 형이자 오빠 대단하네. 됐지?”

“가을이는?”

“가을이는 아빠 딸!”

아빠가 가을이를 바라보며 외치자, 가을이는 아빠를 비켜서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오빠 첫 번째 동생이야!”

“그래, 태양이 첫 번째 동생은 가을이가 맞지.”

“아빠 딸…….”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식들은 아빠를 바라보지 않고 다시 운동장을 바라보며 연신 오빠, 형을 외쳤다.

소외된 아빠는 한숨을 내쉬고 필드를 바라봤다.

여전히 빨검 유니폼을 입은 아들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거 하난 확실하다.

축구시키길 잘했다는 것.

세상에 축구 시작한 지 1년은커녕 반년도 안 된 애가 2, 3학년이 주축인 대회에서 저렇게 날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빠는 비록 조기축구에서 뛰지만, 이대로라면 아들은 EPL 같은 곳에서 뛰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설렐 지경이다.

하지만 여기서 들뜨기에는 아직 일렀다.

재개된 경기에서 성남의 아이들은 위기를 느낀 듯 무리하게 라인을 올리지 않고 거북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패스만 주고받았고, 서울은 기세가 살아 거세게 성남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공세환의 활약이 빛났다.

공이 어디로 올 것인지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패스를 차단해 공을 서울로 가져온다.

“야! 패스하지 말고 내놔!”

세환이 공을 잡고 앞을 바라보자 세환의 파트너인 선배가 기겁을 하고 말렸다.

아직 세환의 패스는 어설펐기 때문이다.

세환이 욕심 부리지 않고 아쉬운 얼굴을 하고서 선배에게 공을 패스했고, 선배는 짧게 공을 앞으로 보냈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데, 입술을 비죽이는 공세환을 뒤로하고 공은 짧은 패스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아까 그 시원한 공격과는 달리 지지부진한 모습에 지켜보는 사람들이 지루해할 즈음.

태양이 대뜸 1.5선으로 내려와 공을 잡았다.

성남 아이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는 가운데, 성남의 미드필더 두 명과 수비수 한 명이 태양을 감싸기 시작한다.

그렇게 포위되는 상황에서 태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으로 인해 생긴 빈 공간으로 공을 패스했다.

단숨에 생겨난 공격 기회.

성남 선수들은 어이없이 만들어진 찬스에 정신없이 공을 쫓았고, 태양이 찔러준 공을 받은 윙포워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빠르게 슈팅했다.

성급한 슈팅이었다.

태양의 첫 골로 연결되었던 그 유려한 감아차기를 생각하면 형편없이 휘어진 공이 골키퍼의 펀칭에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떨어진다.

루즈볼을 차지한 것은 서울.

어수선한 그 상황에서 공을 잡은 태양의 선배가 골대를 노리고 다시 한번 슈팅한다.

떵!!

골키퍼가 닿을 수 없는 위치로 뻗어가는 건 좋았지만, 공은 골포스트를 맞고 다시 튕겨 나갔다.

이번에는 성남의 선수가 그 공을 차지했고, 공을 잡은 선수는 라인 밖으로 공을 찼다.

“헛!”

하지만 공은 그 아이가 의도한 대로 라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전에 달려온 태양이 성남 선수가 찬 공을 자신의 발 앞으로 회수하고 그대로 그 선수를 지나쳐 골대를 향했다.

골키퍼 옆에 있다시피 하며 골대를 지키던 수비수가 다급하게 태양에게 달려든다.

성난 황소처럼 달려든 수비수를 향해 마주 달려간 태양은 수비수의 영역 안에 도달하기 전 발바닥으로 공을 옆으로 굴려 골대까지 빈 공간을 만들더니 그대로 슈팅했다.

철썩!

공은 여지없이 골망을 뒤흔들었고, 태양은 K리그 주니어 U-15 데뷔전에서 해트트릭을 만들어냈다.

“…저 새끼 뭐야?”

너무나도 손쉽게 해트트릭을 만들어내고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터덜터덜 하프라인으로 걸어가는 태양을 보며 성남의 감독은 허, 하고 탄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서울이 대단한 애를 건져왔네.”

1학년이 2, 3학년 사이에서 주전도 모자라 해트트릭이라니.

저 정도면 모처럼 국가대표급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남 감독의 평가는 경기가 끝나고 바뀔 수밖에 없었다.

K리그 주니어 U-15

1R 서울 UTD 6:0 성남 UTD

윤태양 ’1, 12, 34, 52, 67, 70

태양이 더블 해트트릭으로 서울의 대승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쟤 유럽 안 가고 뭐하냐?”

성남 감독은 유럽, 그것도 라 마시아 정도는 되는 곳에서 뛸 법한 아이가 여기서 뭐하는지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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