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13화
“어억! 씨발, 깜짝이야.”
자다가 들리는 비명에 벌떡 일어났다.
낯선 천장이 보인다.
아니, 2층 침대.
우리 집이나 숙소에는 2층 침대가 없는데?
“아… 집 아니지.”
여기는 우리 U-15가 배정받은 숙소다.
4인실.
지난 삶에서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숙소였다.
성인 대표팀이 친선경기를 앞두고 먼저 들어와 있어서 가장 안 좋은 숙소를 배정받은 거다.
전날 특별한 훈련도 없고 몸이 편안해서 그런지 잠이 안 와 간신히 잤는데 아침을 알람 대신에 비명에 깰 줄은 몰랐네.
“으함.”
이왕 깬 거 일찍 씻을까?
그리 생각하는데 반대편 1층 침대에 잠든 이번 대표팀 룸메이트, 배상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이, 아침부터 시끄럽고 지랄이야.”
그러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2층을 바라봤다.
내 위층에는 이성호가 있었다.
아니, 차분하다 못해 돌부처 소리까지 들었던 이상호가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시선을 돌려 배상현 침대의 2층을 바라봤다.
“뭐시여, 사람 팩하는 거 첨 봐야?”
구수한 전라도 억양의 소유자는 다름 아닌 파퀘트 나이엘이었다.
누가 봐도 흑인이지만, 엄연히 한국인이다.
아프리카에서 내전인지 뭔지 때문에 망명 온 파퀘트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낳은 게 파퀘트거든.
아무리 그래도 흑인한테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듣는 건 적응이 안 되네.
“깜작 놀랐다. 누가 아침부터 팩을 하냐?”
“할 수도 있제! 아, 흑인이 팩하니 그게 이상한 거시여? 흑인은 팩하면 안 된다냐?”
“그 말이 아니잖아.”
이성호의 차분한 반응에 파퀘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반응이 그게 뭐시여. 보통 당황하고 막 그려야 할 틴디. 김 새부렸어야.”
“야, 다 닥쳐. 기상 시간도 아닌데 깨우고 지랄들이야. 어우, 피곤해.”
배상현이 마른세수를 하며 투덜거리자 파퀘트와 이성호가 나란히 죄송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나저나 어제 9시인가 자지 않았나?
지금 아침 9시니까 12시간은 잤는데도 졸리다고?
대단한 양반이네, 저 형도.
“에이씨! 잠 다 깼네!”
배상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따, 저 형은 말헐 때마다 카리스마가 넘쳐 부러. 독일물 먹고 와서 그런가?”
카리스마는 개뿔.
나 역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날씨 한번 기가 막히게 좋네.
뛰면 더워 죽을지도 모르겠는걸.
“아따, 오늘 선선하니 좋구마잉.”
파퀘트의 말에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다.
“선선…하다고?”
“이 정도면 선선한 거지. 전라도 가봤냐? 우리 전라도 더럽게 덥다.”
“아, 그래.”
“혹시… 흑인이라 더위 안 탄다, 뭐 그런 생각한 거 아니지?”
하, 이 자식.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싸늘하게 말했다.
“너 자꾸 인종차별 프레임 씌워서 장난치려 하다가 진짜 뒤지게 맞는다?”
이 나이 또래는 기선이라는 게 중요하다.
파퀘트는 나쁜 놈은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도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장난이 짓궂은 놈이었다.
여기서 장난에 휘둘리면 계속 장난을 칠 친구거든.
“아, 그래, 미안.”
그렇다고 상대가 정색하는데 같이 싸우는 그런 애도 아니고.
“그래. 미안하면 됐다.”
내 말에 파퀘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배상현이 나온 화장실로 뒤이어 들어갔다.
그러자 2층에서 슬그머니 내려온 이성호가 말했다.
“저게 장난이었나?”
“어.”
“휴, 하마터면 인종차별자 되는 줄 알고 쫄았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쫄아?”
“축구 선수한테 인성 문제는 크다. 이미지 관리를 잘 해야지 커리어에 흠집이 없지.”
벌써부터 이미지에 커리어까지 신경 쓰는 거냐.
이성호는 이때부터 철저했구만.
“그래, 열심히 관리해라, 이미지.”
이성호를 뒤로하고 가방을 뒤져 치약과 칫솔을 찾는데 이성호가 말을 건다.
“태양.”
“…왜?”
“너는 좋아하는 등번호 있냐?”
등번호?
“글쎄… 뭐 딱히?”
나는 등번호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고 보는 게 맞으려나?
한몫을 하기 전까지는 팀에서 방출당할가 노심초사 했었고, 팀에서 주전을 차지할 즈음에는 그저 기회를 준 감독과 팀에 감사하며 뛰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말년에는 국대에서나 팀에서나 8번을 달았다.
뭐, 사실 그렇게 애착이 없다.
팀이나 국대에서나 나름 대우해 준다고 준 번호였으니까.
“그래?”
근데 이성호가 반색한다.
왜?
“그럼 7번은 내가 단다?”
7번?
“9번이 아니라?”
이성호 애착 번호가 9번이 아니었나? 스트라이커이기도 하고.
“아니, 7번.”
7번을 외치는 그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왜?”
“손홍민이 7번이니까.”
아, 그런 의미인가.
시대가 많이 흘렀어도 손홍민은 우리나라 최고의 선수고 모두의 워너비였다.
그 시절 선수로 보자면, 이 녀석 스타일은 손홍민이 아니라 레반도프스카인데.
뭐, 좋아하는 선수랑 플레이는 다른 법이니까.
“그렇군.”
나는 그러려니 했다.
등번호에 집착하는 건 성인 선수도 마찬가지니까.
아,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이정후 감독이 등번호 가지고도 경쟁시키던 감독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소집되기 무섭게 이정후 감독이 말했다.
“너희 좋아하는 등번호 있냐?”
그러자 김효준이 번쩍 손을 들어 외친다.
“9번이요!”
“그래, 9번 좋지. 우리 효준이가 스트라이커라 9번을 좋아하는 구나.”
“헤헤.”
김효준을 시작으로 아이들이 하나, 둘 자기가 좋아하는 번호를 이야기 한다.
가만히 그걸 듣던 감독이 말했다.
“그래, 잘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겹치는 번호가 많네?”
“아…….”
같은 번호를 외친 아이들끼리 서로를 흘끔 바라본다.
김효준처럼 대놓고 노려보기도 하고.
“그지? 그런데 내가 막 명성이 드높고 막 그런 친구들한테 무조건 좋은 번호 주지 않아요. 내가. 그런 사람이야. 아주 공평하지.”
공평은 개뿔.
“그래서 말인데, 자 봐라.”
그는 옷 하나를 꺼냈다.
국가대표 유니폼인데 약간 다르다. 일단 태극기와 축협 마크가 없다. 그리고 등번호와 이름이 없었다.
“이게 너희 연습 시합할 때마다 입을 유니폼이다. 그리고 이건 등번호가 탈부착이 가능하지. 연습 경기 때마다 수시로 번호가 바뀔 거야.”
그는 시범 삼아 등번호 10번을 뒤에 착, 하고 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붙인 번호가 너희들의 정식 등번호가 되는 거지.”
무슨 게임 같지만, 이제 막 잼민이를 벗어난 아이들에게는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일단, 첫 연습경기에 쓸 희망 등번호를 받아볼까? 1번?”
“저요!”
“접니다!”
아니, 뜨겁게 타오른다.
“지금 너희 실력을 모르니 이번엔 가위바위보로 정할 거야. 일단 1번끼리 가위바위보 해라.”
“가위…바위…보!!”
“아으…….”
“앗싸!”
어차피 실력으로 다시 뺏길 수도 있는 건데 엄청 좋아하네.
뭔가 들뜬 분위기 그대로 번호가 호명되고 희망하는 사람끼리 가위바위보를 하는 가운데.
“자, 이번에는 7번인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왠지 모르게 공기가 무겁다.
7번.
세계적으로 에이스가 다는 번호 중 하나이자, 우리나라에서는 박지송과 손홍민이 달아 사실상 국대 최고의 에이스 번호로 자리매김한 번호였다.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이 불타오르지 않을 수가 없지.
이성호만 봐도 7번 하고 싶다잖아.
“제가 7번 하고 싶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이성호가 하겠다는데 이쯤되면 눈치를 보고 손을 안들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성호가 유명하다 해도 내가 쟤보다 잘해, 라는 마인드를 가진 애가 어디 한 둘 일까.
“저요!!”
김효준과 함께 영혼의 투톱을 이루고 있는 류준서.
“큭큭, 7번은 제 차지입니다.”
최지우.
“아따, 7번이면 일단 도전해 봐야쟤.”
파퀘트 나이엘.
“어… 저도요.”
공세환…은 도대체 왜 드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역시 이번 세대도 7번이 대세구나.”
이정후 감독이 씨익 웃음을 흘렸고, 아이들은 하나같이 전의를 불태운다.
하나 같이 중학 축구에서 내노라하는 선수이고 성인팀이 되서도 내노라할 아이들이었다.
이쯤되니 좀 약오르네.
지난 삶에서 7번이야 나랑 인연이 없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의 내가 쟤들한테 꿇릴 게 뭐야?
막말로 1도 없잖아?
아니, 내가 더 잘하지 않나?
나보다 못하는 것들이 감히 에이스를 운운해?
“저요.”
나도 손을 들어버렸다.
“좋아, 여기까지. 7번은 경쟁이 빡세네. 가위바위보 해라.”
이성호가 자기를 속였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경쟁자가 많아서 재밌어 보였어.”
“아…….”
이성호가 탄성을 터뜨리는 사이, 공세환이 기습적으로 외쳤다.
“안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본능적으로 모두의 손이 나간다.
승자는 단 한 판만에 결정됐다.
“일단 이번 7번은 윤태양!”
바로 나였다.
가위바위보 운이 없는 편인데, 이번 삶에서는 운이 좋은 모양이다.
한 번에 7번을 달았네.
“아…….”
안타까움이 묻은 이성호의 탄성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가 임시 대표팀 유니폼을 받고 돌아오니 공세환이 묻는다.
“아, 아쉽다. 7번 나한테 팔래?”
돈으로 모든 걸 사려고 드네. 진짜 돈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제시.”
“…만 원?”
“꺼져.”
십만 원 정도면 협상해 볼 만했는데, 고작 만원으로 나를 홀리려 들다니 건방진 놈.
“좋아, 이제 임시 등번호 가지고 연습경기 한번 해볼까?”
이정후의 말에 배상현이 손을 들어 물었다.
“연습경기 상대가 누구입니까? 우리끼리 하나요?”
“아니, 그러면 재미없지. 게다가 오늘 파주에 대표팀이 한, 두 팀이 있는 거 아니잖아?”
설마 저 미친 감독이 A매치 대표팀이랑 붙겠다는 건 아니지?
“근데 아쉽게도 다들 바쁘네? 붙어볼 팀이 없네?”
…장난하나.
“그래서 근처에 알아봤더니 괜찮은 팀 하나가 있더라. 대장 고등하교라고 아나 몰라?”
진짜 장난하나?
대장 고등학교는 K리그 산하 유소년팀인 중, 고등학교와 별도로 운영되는 학원 축구의 왕이다.
아니, 황제다.
심지어 왕중왕전에서 K리그 주니어 팀들을 두들겨 패는 유소년 축구의 강호.
거기랑 붙는단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놈들 제외하고 다들 긴장한 표정을 짓는다.
“뭐야, 쫄은 거냐? 이 감독이 중학교에서 제일 잘한다는 애들 긁어모은 건데 고작 고등학교 하나 못 이긴다 이거야?”
애들을 오래 다뤄서 그런지 몰라도 이정후 감독의 아이들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다.
국대까지 뽑혀서 한참 콧대가 솟은 아이들의 자존심을 은근히 긁는다.
“아뇨! 이길 수 있슴다!”
김효준의 말에 아이들이 동참하며 이긴다고 외치자 이정후가 말했다.
“그래, 이겨야지. 하지만 져도 괜찮다. 오늘 처음으로 같이 뛰어보는 거니까. 부담 없이 최선을 다해봐. 이기면 좋고 져도 아쉬울 건 없어. 처음이니까. 그렇지?”
“네!!”
“그럼… 오늘 선발을 이야기해 볼까?”
대장고는 둘째 치고 이게 중요하네.
이번 대표팀에 스트라이커는 생각보다 많다.
나와 이성호, 김효준과 류준서, 그리고 상황에 따라 파퀘트 나이엘까지 다섯 명이나 있다.
이정후 감독은 433 포메이션을 꺼냈다.
아니, 343이라고 해야 하나.
양측 풀백은 전문적인 풀백이라기보다는 양 사이드를 전체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를 배치했다.
이상할 정도로 멀티플레이에 열을 올리는 한국의 단점이자 장점이 여기서는 장점이 될 수 있으려나?
중앙의 세 명은 최지우, 공세환, 파퀘트 나이엘의 차지였다.
그리고 최전방은 류준서와 이성호, 내가 잡았다.
포지션이 겹치는 김효준이 이성호에게 밀려났네.
아니, 나한테도 밀려난 건가.
김효준이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문다.
어쨌든 난 선발이 된 거지.
경기 전에 전술 브리핑을 받고 훈련을 하기 위해서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가운데 이성호가 나를 붙잡았다.
“7번.”
“뭐?”
“관심 없다며?”
그리 말하는 이성호의 눈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한테 뒤통수 맞았다는 배신감 때문이려나?
나는 그런 이성호에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내가 이 팀에서 제일 잘하는 에이스 같거든?”
“…….”
“공 좀 찬다는 놈들이 죄다 국대 에이스 번호를 탐내는데, 진짜 에이스가 그걸 구경만 하자니 웃기잖아.”
“과연… 네가 에이스일까?”
이성호의 도전적인 물음에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뺏어갈 수 있으면 뺏어가든가.”
“…그래.”
이성호는 불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