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18화
경기 당일.
워밍업을 끝내고 라커룸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정후 감독이 우리들을 부르고 관중석을 가리켰다.
대부분 일본의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가운데 외국인들이 몇몇 보였다.
“저기 백인이나 흑인들 보이냐? 유럽에서 보낸 스카우터들이야.”
유럽 구단들의 스카우트 네트워크는 상당히 광범위하다.
아무리 축구 변방인 아시아라 하더라도 이런 국제 대회가 열리면 반드시 스카우터를 파견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스카우터들이 많다?
“그거 아냐? 저거 다 일본 애들 보러 온 거다?”
아, 그런 건가.
아무래도 유럽에서 뛰는 애가 8명이나 있으니 그럴 만하지.
그중에 세 명은 지금 유럽에서도 생각 이상으로 뜨거운 감자였다.
미드필더이자 레알 마드리드 소속인 이치고 다케후사, 바르셀로나의 다이젠 료타로, 그리고 수비수로 맨체스터 시티 소속인 시로다 노보스케.
얘들은 팀의 명성만큼이나 주목도가 높다.
특히 다이젠 료타로 같은 경우에는 빗셀 고베에서 활약했고 감독까지 맡고 있던 이니에스타가 직접 선발해 바르셀로나에 추천까지 했을 정도로 주목받는 유망주였다.
그런 애들이니 만큼 오히려 스카우터들이 안 모이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쟤들을 짓밟고 너희들이 골을 막 쑤셔넣어서 이기는 거야. 그럼 스카우터들이 누굴 지켜볼까?”
“…….”
“모르겠어? 너희한테 관심이 쏠리는 거야, 애들아. 잘하면 유럽을 갈 수도 있는 기회라고!”
이정후의 말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다.
그 말이 어찌나 달콤한지 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전의를 불태울 정도였다.
“야, 쟤들 다 유럽파라 하지만, 봐라, 지금까지 경기에서 우리가 꿇릴 게 뭐 있어? 골은 우리가 더 많이 넣었잖아?”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하지만 문제는 일본의 득점은 거의 대부분이 스트라이커가 한 게 아니라는 거다.
일본 공격수의 수준은 처참할 정도여서 내가 뛰는 서울 유나이티드 애들과 동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윙어와 미드필더, 수비수들이 골을 넣고 다득점으로 대승을 거둔 걸 생각하면 우리가 득점력이 앞선다고 좋아할 게 아니다.
경기 내내 지배하면서 공격수 제외한 선수들이 골을 넣고 유린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아이들은 교묘하게 단순하게 득점 차이를 내세우는 이정후 감독의 말에 넘어갔다.
일본전을 앞두고 쫄았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일본, 그 까짓거 전력으로 싸우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정후 감독.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축구를 안 했으면, 보험이나 방문 판매를 해도 잘 먹고 잘 살았을 거 같은데?
아니면 희대의 사기꾼이 되거나.
“자자, 내가 할 말은 이게 다야. 전술 브리핑은 라커룸 안에서 하자고. 들어가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수들을 기세등등하게 만든 감독은 아이들을 라커룸으로 밀어넣었다.
나도 얼른 들어가서 준비해야지.
어슬렁 걸어서 들어가려는데, 감독이 나를 부른다.
“태양아.”
“네?”
“내 말에 안 넘어간 거 안다.”
“아, 네.”
이정후 감독은 그런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내가 살다살다 14살짜리가 능구렁이 백 마리는 잡아먹은 거처럼 속을 알 수 없는 건 네가 처음이다, 이 말이야.”
“하하…….”
“너는 유럽 갈 생각은 없냐?”
“당연히 유럽은 가야죠.”
“그지?”
아니, 축구 선수를 하면 당연히 최종 목적지는 유럽 아닌가?
새삼스럽게 이건 왜 물어보지?
“판이 짜여졌잖아. 이번에는 최선을 다할 거지?”
“네? 전 항상 최선을 다했는데요?”
“거짓말하지 마, 무슨 은거고수마냥 실력의 3할 정도 숨긴 거 다 알아, 인마.”
이 사람이… 어떻게 알았지?
물론, 정말 숨긴 건 아니다.
최선을 다할 여건이 안 됐다.
유럽과 한, 일의 간격은 조금이나마 줄어들고 있지만, 한, 일과 그 외 아시아 국가의 격차는 이제 도저히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솔직히 대충해도 골이 들어갔다.
“늘 그렇지만 네 맘대로 뛰어봐. 대신 최선을 다해서. 날 설레게 해보란 말이다.”
“네.”
“혹시 모르지. 내가 설레는 만큼 스카우터들도 설렐지?”
나는 그 말에 관중석을 바라봤다.
사방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서양 양반들을 바라봤다.
“감독님.”
“응?”
“여기 프리미어 리그 스카우터도 있을까요?”
“글쎄, 아마도?”
어느 구단이 목표다, 이런 건 없지만, 아무래도 세계 최고 리그니까.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그나마 가능성 있는 외국어가 영어이기도 하고.
동생들 외국어 배워야 한다면 아무래도 영어가 낫기도 하고.
아, 유소년이 프로계약을 해도 가장 후하게 계약해 주는 곳도 영국이지.
이것저것 생각하면 답은 하나네.
“최선을 다해야겠네요.”
최선을 다하는 것.
* * *
윤태양 가족은 도스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주위를 둘러본 친할아버지, 윤창수는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 왜놈들이 참 많구만.”
“자네는 애들도 있는데 왜놈들이 뭔가 왜놈이.”
“크흠, 이이, 일본놈들이 많어. 참 많어.”
온통 푸른색 유니폼이 가득한 이곳에서 태양이네 가족은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오빠는 어디써?”
막내 겨울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오빠를 찾았다.
“어, 저기 엉아다!”
형 껌딱지인 여름이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는 붉은 유니폼 사이에서 단숨에 형을 찾아냈다.
“이야, 뉘집 장손인지 참 의젓하구먼? 이?”
“우리 아들 잘생겼다!”
“엉아!”
“오빠!”
태양이 가족이 난리가 났다.
태양은 그런 가족을 보고서 살짝 손을 들어 흔들어 준다.
“우리 오빠 멋있다, 그지 엄마?”
가을이가 그런 오빠를 보고 발그레해진 얼굴로 물어보자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누가 낳았는데? 당연히 멋있지.”
“그나저나 코쟁이들이 뭐 이리 많은 겨? 저짝들도 한일전에 관심들이 많나벼?”
그 말에 윤지성이 주변을 훑어봤다.
“아무래도 스카우터 같은데요?”
“스카우터? 그… 선수들 데려가는 그거 말하는 겨?”
“네, 아버지.”
“그네들이 왜? 혹시 우리 태양이 보러 왔나?”
할아버지 말에 지성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닐 거예요. 아직까지는요. 일본에 유럽파들이 꽤 많거든요. 그 애들 보러온 걸 겁니다.”
“이이, 뭐 볼 게 있다구 왜놈들을 보는 겨. 우리 태양이나 볼 것이지.”
“제가 말했잖아요, 아버지. 아직까지는이라고요. 우리 태양이 하는 거 보면 깜짝 놀라 겁니다.”
“이이, 그렇지? 그럴 겨.”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한국과 일본의 대표 선수들이 경기를 준비하고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어? 경기 시작한다.”
“태양아! 외할아버지 여기 있다! 화이팅 해라!”
“이! 할아버지도 여 있다! 다치지 말고 화이팅 혀라!”
경기는 일본의 선축이었다.
일본 선수들은 공을 수비라인까지 내려 보내고 느린 템포로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서서히 라인을 올리기 시작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삼보(三寶) 중 한 명인 수비수 시로다가 또 다른 삼보인 이치고에게 패스한다.
들어오는 압박에 이치고가 미련 없이 다이젠에게 패스하는 순간.
누군가 그 사이를 파고들어 가로채 치고 나간다.
“꺄악! 아들!!”
엄마, 김지민이 비명처럼 아들을 부른다.
그런 엄마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공을 가로챈 태양은 수비수이지만,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까지 올라온 시로다를 속도로만 제쳐 버리고 골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최후방을 지키던 두 명의 수비수가 다급하게 태양의 길목을 막아섰다.
태양은 급제동 후 드래그백해서 옆으로 빠져나가는 것만으로 단숨에 한 명을 제쳤다.
그 뒤 좁은 간격으로 붙은 마지막으로 남은 수비수 한 명.
태양은 팬텀드리블, 이름 그대로 귀신같이 수비수를 제치고 골대를 향해 나아갔다.
남은 건 골키퍼 한 명.
1대1 상황을 맞이한 골키퍼는 영리하게 앞으로 나와 각을 줄였다.
태양은 공 밑을 가볍게 툭하고 차올렸다.
머리 위로 넘어가는 공을 보며 골키퍼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다 펄쩍 뛰어올라 손을 뻗었지만 공은 닿지 않고 골라인을 넘어 바닥에 통통 튀겼다.
전반 3분.
충격적인 선제골에 경기장이 순간 조용해졌다.
그 가운에 태양은 가족이 있는 관중석 쪽으로 달려와 뒤돌아 자신의 등번호를 가리켰다.
T Y YOON
7
“와!”
“우리 아들 멋있다!”
“엉아 머싯써!”
“오빠!”
태양은 동생들 목소리에 씨익 웃고는 필드로 돌아갔다.
재개된 경기.
충격적인 골을 먹긴 했지만, 일본은 차분하게 다시 자신들의 플레이를 해나갔다.
유럽 각국에서 기본기를 갈고닦고 일본의 색깔이 진한 아기자기한 패스 축구.
플랜에 맞춰서 잘 맞춰진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플레이는 보기에는 마치 유럽의 팀을 보는 듯했다.
완벽한 축구처럼 보였지만 이쯤해서 한국팀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윤태양은 깨달았다.
이들의 축구가.
그저 예쁘기만 하다는 것을.
멀리서 보면 완벽하기 그지없는 최첨단 축구를 보여주는 것 같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유럽의 축구를 따라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예쁘게 축구를 하기 위해 억지로 따라하는 것뿐이다.
일부러 템포를 느리게 하는 게 아니라 예쁘게 따라하려 하니 빠르게 할 수 없는 거다.
태양은 후방으로 내려오면서 미드필더 라인에게 소리쳤다.
“얘들 템포 느리다! 몰아붙여!”
2002년 이래로 한국에서 압박은 기본 베이스다.
파퀘트 나이엘, 최지우, 공세환은 태양의 말을 듣기 무섭게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체력을 신경 쓰지 않고 몰아붙이자, 풀백이 눈치껏 중원에 가세해 그들을 지원했고, 배상현 역시 두 명의 센터백을 남겨두고 올라왔다.
중원에 한국 선수만 무려 여섯 명.
미드필더와 수비에 특화된 일본인지라 중원 싸움에서 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한국의 파워풀한 압박과 상극이라는 거다.
체력을 아끼지 않고 무식하게 달려들어 질식시키려 드는 한국의 압박에 일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귀신같이 공을 잘 끊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공세환.
금수저로 곱게 자란 것과 달리 그는 터프한 플레이와 지치지 않는 활동량을 자랑했다.
그리고 귀신같이 패스의 흐름을 파악하고 자르는 능력을 타고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윤태양이 공을 가로챘던 것처럼 공세환이 일본의 패스를 끊었다.
그 순간 패스 코스를 차단하고 들어오는 일본의 선수를 보고 파퀘트 나이엘이 공세환의 지근거리에 붙었다.
패스 실력이 부족한 공세환은 차지한 공을 파퀘트에게 패스했다.
파퀘트는 흑인 특유의 탄력과 피지컬로 공을 소유하고 압박을 벗겨내는 데 능한 선수였다.
파퀘트는 일본의 진영을 헤집고 최지우에게 공을 운반했다.
원래 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하는 최지우는 패스의 명수다.
윤태양이 비록 똥 같은 패스를 한다고 놀리긴 하지만, 한국 팀 중에 최전방에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줄 유일한 선수였다.
“크큭, 응답해라, 태양.”
그런 최지우가 윤태양을 찾았다.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성호로 만족해야 하는가.”
윤태양에게 공을 보내는 것을 포기한 최지우는 1.5선으로 내려온 이성호에게 공을 보냈다.
이성호는 일본 선수를 등지고 공을 받아 몸을 돌려 벗겨내며 수비 뒷공간으로 로빙 패스를 보냈다.
허공으로 붕 떠오른 공이 수비 뒷공간, 페널티 에어리어 앞쪽으로 향한다.
수비 라인 옆에 있던 태양은 컷아웃 무빙으로 수비의 시선을 벗어났다 다시 컷인하며 공을 향해 달려 나갔다.
빠졌다가 들어오는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윤태양이 일본 선수보다 두 걸음 앞섰다.
“아, 공이 좀 느린데.”
태양이 아빠가 탄식을 터뜨린다.
그의 말대로 높이 떠오른 공은 느릿하게 낙하하고 있었다.
태양이 아무리 빠르게 달려 나가도 공이 떨어질 즈음에는 수비수에게 덜미를 잡히기 충분한 상황.
태양은 누구보다 빨리 도착해 자기 머리 바로 위로 떨어지는 공을 바라보며 골대를 등졌다.
두 명의 수비수가 그것을 지켜보고 골키퍼가 적당한 위치에서 앞으로 나갈지 아니면 골대를 지킬지 판단하는 사이.
태양이 점프하며 몸을 뒤로 젖힌다.
마치 허공에서 수영하듯 태양의 다리가 교차했고.
왼발에 공이 걸렸다.
그대로 뻗어나간 공은 골키퍼의 머리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가 골망을 갈랐다.
“우와…….”
여름이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아빠, 저게 머야?”
여름이 형의 멋진 슈팅에 놀라 아빠를 바라보니 아빠는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선 채 멈춰있었다.
“아빠? 엄마?”
이번엔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도 멈춰있었다.
아니, 엄마뿐만이 아니었다.
가족들, 그리고 경기장 모두가 멈춘 듯 소리 없이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도하게 유니폼에 묻은 잔디를 털어내자 그제야 사람들의 탄성과 함성, 야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아…….”
여름이의 눈에는 형이 마치 마법을 부린 것만 같았다.
“대다네……! 엉아 대다네!!”
여름이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