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21화
“영어를 할 줄 아니?”
프리델 마이어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네.”
“허허허, 그럼 이야기가 쉽겠구나.”
“네, 그런데 바이에른 뮌헨에서 오신 게 아니라구요?”
내 말에 그의 안색이 흐려진다.
왜 저러지?
“뮌헨은… 아니지만, 상당히 좋은 클럽에서 왔단다.”
아니, 도대체 어떤 클럽이길래 저렇게 자신감이 없는 거야.
그래도 뮌헨에서 콧대 좀 세우고 다니던 양반일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삶에서 스카우터랑 인연 좀 키울 걸 그랬나보다.
같은 업계 종사자라고 하더라도 의외로 스카우터와 프로 선수는 접점이 크지 않다.
스카우터를 관리하는 수석 스카우터나 디렉터가 아닌 이상 말이다.
아무튼.
“어디서 오셨는데요?”
“나는… 그…….”
아니, 왜 자꾸 말을 흐리는 거야.
누가 보면 사기 치러 온 건 줄 알겠네.
저 사람이 이미 유명한 프리델 마이어가 아니었으면 이건 빼박 사기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뉴캐슬 유나이티드라고 들어봤니?”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모를 수가 있나.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클럽.
구단주 중에서 가장 돈 많은 구단주가 있는 클럽.
“들어봤죠. 부자구단.”
“그래, 우리 구단은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구단이지. 우리 구단은 미래를 위해 자네 같은 어린 친구들이 절실히 필요…….”
“좋아요.”
“응?”
“좋다고요. 뉴캐슬 유나이티드.”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기억한다.
가능성만 있다면 이제 막 프로계약하는 유스라고 하더라도 돈을 꽂아주는 곳이 뉴캐슬이라는 것을 말이다.
망설일 것 없지.
“꼭 가고 싶습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고 싶었거든요.”
“오……!”
“일단, 부모님이 동의하셔야겠지만요.”
뒤에서 조봉수 감독이 뜨거운 시선과 불편한 헛기침을 하는 게 들렸지만, 애써 못 들은 척하며 나는 부모님의 전화번호를 프리델에게 건넸다.
* * *
“뉴캐슬 유나이티드?”
숙소로 갔던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유럽의 스카우트가 영입하고 싶어 한다는 말에 부랴부랴 칼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태양이 아버지, 지성은 의아한 얼굴이 됐다.
“걔들이 왜?”
“걔들이 왜라니, 자기야. 우리 태양이가 잘하니까 데려가고 싶어 하는 거 아니겠어?”
아내 지민의 말에 지성이 말했다.
“그건 그렇긴 한데, 뉴캐슬은 그런 팀이 아닌데.”
“무슨 소리야, 그게?”
“걔들 부자구단이거든. 어떻게든 좋은 선수를 빼오려고 하지 유스를 키우려는 팀이 아니었는데.”
팀을 단기간에 강팀을 만들기 위해서 뉴캐슬이 선택한 방법은 실력 있는 선수를 영입하는 거였다.
축구를 좋아하는 지성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소년을 영입한다는 말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프리미어 리그면 좋은 팀 아니야? 여기에서 크는 거 보다 훨씬 좋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일단 만나봐야 하나.”
그 말에 태양이 말했다.
“안 그래도 아버지가 퇴근하고 괜찮다면 오늘 만났으면 한다고 하던데요.”
“어디서?”
“저녁식사라도 하자더라고요.”
“그래?”
지성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보, 왜? 아직 약속도 안 잡았는데 어딜 가려고? 전화번호부터 줘야지.”
“응? 난 자기가 당연히 만날 거라 생각해서 약속 다 잡아놨는데?”
“…벌써?”
“응.”
지민의 말에 지성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에서 보기로 했는데?”
“우리 집 근처에 고깃집 있잖아. 그 룸으로 되어있는 비싼 소고기 파는데.”
“향화정?”
“어, 거기서 보기로 했어.”
그 말에 가을이가 눈을 빛냈다.
“우리 소고기 먹어, 엄마?”
“어! 소고기 엄청 비싼 소고기! 우리 가을이가 좋아하는 소고기!”
태양이 가족 중에서 유난히 고기를 좋아하는 가을이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나 얼른 옷 입을게!”
“어마, 우리 꼬기?”
“고기 먹는 거야?”
여름이와 겨울이도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자식들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리던 지성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스카우터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식의 미래를 망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모두 차에 태우고 향화정으로 가는 길.
지성이 태양에게 물었다.
“아들, 아들은 거기 가고 싶어?”
“네.”
“왜?”
“프리미어 리그잖아요.”
“음…….”
“프리미어 리그야 네가 잘하면 나중에라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아버지, 다른 리그에서 프리미어 리그로 갔다가 적응 못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신체적인 문제 때문에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프리미어 리그로 가서 거기에 맞게 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말에 운전을 하던 지성은 흘금 태양을 바라봤다.
그래, 장남은 항상 이랬지.
나이에 맞지 않게 항상 생각이 깊었다.
섣불리 프리미어 리그로 가겠다고 할 아이는 아니기는 했다.
“그래, 그러면 아빠도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성은 아직도 뉴캐슬이 꺼려졌다.
이왕 가는 거면 유소년에 집중하는 독일이나 네덜란드 같은 곳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유소년에 유난히 관심이 없는 한국 사람들이 자주 하는 착각이었다.
프리미어 리그 역시 유스에 관해서는 진심이었다.
빅클럽이면 몰라도, 돈이 없거나 중위권 이하의 팀은 유스에서 수준급 선수를 키워내지 않으면 세계 최고가 모이는 이 리그에서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님과 만난 자리.
프리델 마이어는 이 부분에 대해서 질문하는 윤지성에게 열과 성을 다해서 설명했다.
“우리 뉴캐슬 유나이티드도 마찬가지입니다. FFP 룰이 강화된 지금 우리 팀이 장기적으로 우승권을 노리려면 팀의 근본인 유스 시스템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통역사를 통해 이 이야기를 들은 지성은 다시 물었다.
“그러기에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유소년 출신 주전 선수가 얼마 없던데요?”
“그건 어쩔 수 없지요. 수준급 코치와 시설을 만드는 데 하루 이틀 걸리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수준급 유소년을 데려오는 것도 하루아침 만에 되는 게 아닙니다.”
“아…….”
“시스템이 갖춰지고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게 이제 겨우 3시즌? 아마, 그 정도 될 겁니다.”
프리델 마이어의 말에 잠시 생각해 본 윤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최근 들어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유소년 출신 선수들이 대대적으로 콜업해 제 몫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구단주가 바라는 건 하나입니다.”
“무엇이죠?”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리오넬 메시.”
“…메, 메시요?”
아니, 메시라니.
“우리 아들이 그 정도라는 겁니까?”
그 말에 프리델 마이어는 어설프게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구단에서는 뉴캐슬의 메시 후보가 될 잠재력을 지녔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프리델 마이어의 시선이 잠시 태양을 향하고 활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메시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아이의 시대에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 우리 아들이요?”
지성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장남을 바라봤다.
잘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프리델 마이어나 되는 양반이 세계 최고가 될 잠재력으로 평가할 줄이야.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시설과 스탭이 있는 우리 팀으로 와야 한다는 겁니다. 첨단 과학과 의료진, 훈련법을 통해 태양이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자신하거든요.”
“음…….”
“아시다시피 잠재력이 있지만, 잘못된 성장으로 그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한 아이들이 참 많습니다. 뉴캐슬은 그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관리하는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안심하고 미래를 맡겨도 좋습니다.”
그 말에 윤지성은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쉽사리 답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과연 영국에 온 가족이 가서 생활이 가능할까?
지성이 가족을 둘러보는 걸 지켜본 프리델 마이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통역사가 분주히 그 말을 통역했다.
“아버님, 유스팀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했으니 이제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뉴캐슬은 자녀 때문에 영국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가족을 위해 보호자의 정착을 지원합니다. 아, 물론, 불법이라 금액적인 부분은 지원하지 못하지만, 정착할 수 있게 대출과 렌트 하우스, 그리고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연관된 직장을 알선해 드립니다. 어, 이건 스카우터님과 별개로 제가 드리는 말씀인데 영어가 어느 정도 가능하신 거 같으시니 일자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네요.”
“그으래요?”
가장 걸리는 부분이 해결될 것 같자 윤지성은 마음이 굳었다.
독일? 네덜란드?
말도 통하지 않고 경쟁력 없는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환경보다는 자식들이 영어도 배울 수 있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해 주는 이곳이 천배 만배 낫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가족들과 이야기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부디 좋은 쪽으로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군요.”
소주잔을 들고 내미는 프리델에게 잔을 마주치며 윤지성은 들뜬 마음으로 태양을 바라봤다.
세상에 우리 아들이 메시라니.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 이야기였다.
* * *
“야, 너 간다며?”
부모님은 고민 끝에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러모로 나쁠 거 없는 제안이었거든.
무엇보다 동생들이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게 컸다.
영어를 배우면 내가 성인이 되어 혼자 지낼 수 있을 때 동생들은 한국으로 와서 학업을 이어가도 나쁠 게 없으니까.
영국에 계속 머물러도 되고.
아무튼, 그렇게 결정되자 이민을 준비하느라 부모님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두 분도 자식이라고는 부모님 밖에 없어서 함께 이민 가기로 해서 더 바쁘신 모양이다.
어쨌든 이 사실은 서울에 쫙 퍼졌고, 공세환은 서운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 그렇게 됐네.”
“부럽다, 짜식. 프리미어 리그라니. 존나 부럽네.”
“부러우면 너도 노력해서 와.”
그 말에 공세환이 입을 비죽였다.
“나 데려갈 유럽팀은 없다며?”
“그건 배상현이 그렇게 말한 거고.”
사실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긴 하지.
“그럼 가능?”
“그건 너 하기 달렸지.”
언젠가는 유럽으로 올 거다. 짧게나마 프리미어 리그도 경험해 보고.
물론, 지난 삶을 보고 하는 이야기라 100%라고 볼 수는 없다.
나로 인해서 공세환의 인생도 어느 정도 변하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아직까지는 긍정적이다.
“내가 가능할까?”
“부족한 부분은 어른들 말 들어서 너도 알잖아. 패스 실력만 올라도 넌 한몫할 거야.”
그 말에 공세환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연습하고 있기는 한데, 생각이 좀 바뀐 게 있어.”
“뭐? 뭔데?”
“이정후 감독님이 말하더라. 우리나라 공격진은 포화 상태라 파퀘트도 내려오고 윗세대 대표팀에서도 미드필더로 내려올 사람이 많다고. 앞으로 대표팀에 내 자리가 없을 수도 있을 거래.”
아, 이것도 나비효과인가.
파퀘트 나이엘은 원래 우리 세대, 그리고 향후 A매치 대표팀에서 공격진에 한 축을 담당할 친구다.
그런데 이정후가 감독이 나를 공격진의 한 축으로 생각하고 파퀘트를 미드필더로 내린 거다.
먼 훗날이면 발전한 공세환이 미드필더 한 축을 담당할지 몰라도, 지금으로선 이정후가 보기에 공세환의 자리는 앞으로 없어질 것 같다고 판단한 거지.
나는 짐짓 모른 척 물었다.
“그런데?”
“포지션 변경을 해보는 게 어떻냐고 하더라. 윙백으로.”
윙백?
듣고 보니 괜찮은데?
세환이는 어디 하나 최고라고 할 수 없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을 개선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원이다.
“괜찮을 거 같은데?”
“그래?”
“그래, 풀백으로 한 번 도전해 봐. 유럽 와서 같이 뛰자.”
그 말에 공세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놈이랑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떠날 생각을 하니 괜스레 아쉽네.
나는 세환이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지만, 즐거웠고 한편으로는 아쉬웠던 서울 유나이티드의 생활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