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24화
“오빠! 이거 봐봐!”
아침에 일어나 훈련장을 가려고 하는데 가을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뭔데?”
“이거 뭔지 알아?”
“그게 뭔데?”
음식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먹을 건가?
시선을 돌리니 컵라면 용기 비슷한 걸 가을이가 들고 있었다.
“이거 영국 컵라면이래!”
“영국… 컵라면?”
영국이 그런 걸 만들어?
왠지 불안한데?
영국 음식은 최악으로 유명하니까.
“맛… 없어서 가져온 거야?”
나를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려고?
내 물음에 가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거 맛있는데? 카레맛이야!”
“카레맛?”
아, 그래.
영국인들은 인도의 대표적인 음식인 커리도 자기 나라 음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뭐,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아는 카레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개량되고 일본을 타고 우리나라로 들어온 거라고 하니까.
왜 이리 잘 아냐고?
한때 카레에 꽂혀서 카레만 주구장창 먹다 못해 영국과 인도까지 돌면서 커 리를 탐구하던 시절이 있었거든.
물론, 은퇴한 뒤에 말이다.
“그래? 맛있다니 다행이네.”
“이건 오빠 거.”
“아, 이게 아침이야?”
“엉, 엄마가 뭘 요리하고 싶어도 여기 한인마트가 없어서 힘들대.”
“…한인 마트가 있어도 그닥…….”
“응?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잘 먹을게.”
우리 엄마의 요리솜씨는 영국과도 같다.
본토 요리는 기가 막히게 못하고 희한하게 해외 음식은 또 잘한다.
영국도 그렇다.
본토 음식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대부분 최악인데, 희한하게 다른 나라 음식은 기똥차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유명한 요리사도 영국에 많고.
아무튼, 차라리 파스타라도 만드시지.
그나저나 이거 맛있네.
대충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다이닝룸에는 엄마와 할아버지 두 분, 그리고 여름이와 겨울이가 있었다.
“엄마, 아버지는요?”
“출근했지.”
“벌써요?”
“어어, 한국에 바이어랑 전화하려면 일찍이 가야 한다던데?”
“아아.”
아버지는 뉴캐슬에서 알선해 준 회사에 다니게 됐다.
다행히 한국과 무역을 하는 회사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장손, 거 어디냐, 뉴 다즐리? 거긴 어뗘?”
“좋아요. 엄청 좋아요.”
“허긴 들어보니까 돈을 엄청 쏟아 부었다고 하더만? 이?”
“네, 맞아요.”
“사돈, 우리 태양이가 있는 구단이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다지?”
“이이, 그렇다는구먼.”
컵라면으로는 배가 차지 않아서 식탁 위에 깨끗하게 닦아놓은 사과 하나를 손에 들었다.
한입 베어무니 제법 괜찮다.
“아들, 얼른 차에 타야지? 늦겠다.”
부랴부랴 갈 준비를 끝낸 엄마의 말에 나는 사과를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나 걸어가도 되는데요.”
“혼자 돌아다니면 못 써!”
엄마는 영국을 위험한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에 비한다면 치안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니 말이다.
지금에 와서도 축구장에 인종차별이 빈번하고 훌리건이 깽판을 치는 나라가 영국이니 말이다.
인종차별자나 훌리건이 훈련장 근처에서 날 괴롭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크셨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를 건들까 싶지만, 엄마가 마음이 편하다면야.
군말 않고 따라가야지.
아무리 그래도 가라지에서 차를 타고 나와서 3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인데 차 타고 가기 민망하긴 하다.
“아들 오늘도 다치지 말고, 잘하고 와야 해?”
“네, 걱정 마세요.”
뉴 다즐리 파크에서 U-16 팀에 합류한 지 일주일.
아직 낯설지만 길을 헤매지 않고 U-16의 클럽 하우스에 갈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팀은 U-16부터 클럽하우스가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다른 곳은 모르겠고, 적어도 내가 있었던 지난 삶에 팀들에는 통합으로 있거나 없었는데 말이지.
이 팀이 얼마나 유스에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여어, Amigo!”
“왔어?”
“헤이!”
다시 한번 클럽에 감탄하면서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니 나를 반기는 아이들이 보인다.
그래, 이 바닥은 실력을 보여주면 이렇게 다가오는 친구들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꺼져.”
“어린놈이 늦게 다니네.”
“재수 없는 놈.”
그 반대급부로 오히려 나를 싫어하는 놈들도 생기는 법이고.
웃긴 건 이게 파벌에 따라 갈린다는 거다.
뉴캐슬은 유소년 육성에 집중하다보니 다양한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파벌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성인팀도 생기는 마당에 애들이 안 생기는 게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여기는 영국인을 중심으로 영어권 국가들, 유럽인들이 뭉친 영국 파벌과 스페인어권을 중심으로 남미 쪽 아이들, 흑인들이 뭉친 스페인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아시안은 내가 유일했지만, 나는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모두 유창하다보니 스페인 파벌 아이들이 우호적이었다.
반대로 영국 파벌은 나를 적대시 했다.
그 중심에는 저놈이 있었다.
이엘 하츠.
뉴캐슬에서 가장 촉망받는 잉글랜드산 유망주다.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뭘 봐?”
보시다시피 굉장히 싸가지가 없는 놈이다.
정말로 촉망받는 유망주인지 잉글랜드 프리미엄이 붙어서 과대포장된 건지 지금 봐서는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내 기억에는 없다.
지금이야 촉망받지만, 나중에 거짓말처럼 사라질 놈이라는 거겠지.
어떤 이유에서든 말이다.
“보면 안 되냐?”
“너 따위가 볼 사람이 아냐. 난.”
“…쓰으, 딱히 그 정도 수준은 아니던데?”
“뭐? 하, 고작 한 경기 가지고 까부네 어린놈이?”
내가 영국 와서 느낀 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달리 유난히 더 꼰대스럽다는 거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보다 더 하다.
혹시 꼰대문화는 유교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혐성국에서 만들어내 일본을 타고 우리나라로 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크게 다쳐서 축구 못할 수도 있어.”
그 꼰대의 화신과도 같은 놈이 나를 내려다보며 바짝 다가온다.
“그렇게 내 정수리 내려다보다가 너야말로 바닥을 기는 수가 있는데?”
키 좀 크다고 쫄 거 같냐?
내가 인마, 지난 생에서 고추에 털 나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보다 나이 많은 형들한테 주먹을 들이댄 놈이라고, 인마.
서로 주먹을 쥔 채로 대치하는 가운데, 언제든지 싸울 것 같은 분위기는 주변에도 전염됐다.
양 파벌이 갈라선 채로 서로를 노려본다.
이 가운데 누군가 하나 주먹이라도 휘두르는 순간 그게 ‘도폭선’이 되어 폭발할 것 같았다.
“다들 뭐하나? 준비하지 않고?”
물론, 그럴 일은 없다.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코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조심해라.”
“너나 조심해.”
“이 새끼…….”
내가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이엘이 씩씩거리며 나간다.
나가면 그의 얼굴은 더욱더 구겨진다.
그에게 향했을 일부의 관심을 포함한 코칭 스탭 대부분의 관심이 나를 향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폴스나인 역할을 해볼 거다.”
에이든 감독이 나에게 말했다.
“폴스나인.”
“그래, 해볼래?”
“네, 좋아요.”
이들은 본격적으로 입단한 어제 부터 여러 측면에서 나를 테스트했다.
어제는 잉글랜드의 상징과도 같은 빅 앤 스몰 조합으로 처진 스트라이커 역할을 시켜보더니 그 다음 날에는 윙포워드, 그리고 어제는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까지 세웠다.
그때마다 내가 해야 할 임무를 세 가지 정도는 줬던 거 같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위로 올려 보낼 사람이니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거든.
그나저나 오늘은 폴스나인인가?
재미있겠네.
* * *
에이든과 코칭스탭은 태양의 딜레마에 빠졌다.
“어떻게 어린 나이인데도 저럴 수가 있죠?”
“기술적으로나 전술적으로 이미 완성된 선수입니다.”
“크기만 기다리면 될 것 같습니다.”
불과 일주일.
코치들은 열렬한 태양맘들이 되었다.
세 가지 임무만 가르쳐 주고 시키는 역할마다 그 세 가지 이상을 해주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거기서 생겼다.
과연 태양을 어떤 타입의 선수로 키울 것인가?
“빠른 발과 그의 라인 브레이킹을 보면 어드밴스 포워드로 키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롱런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포쳐로 키우는 건 어떨까요?”
“득점에만 국한되기에는 태양이의 능력이 아깝습니다. 윙포워드는 어때요?”
반론의 반론의 반론.
하지만 반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공격적인 능력 외에도 다른 것에도 발군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본인이 공격수를 원하지만, 포지션을 변경해 미드필더에서 뛰게끔 하는 건 어떨까요?”
“수비수 괜찮을 것 같은데?”
“확실히 그의 시야는 무서울 정도지.”
“시야뿐입니까? 패스만 보면 1군에서 뛰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공을 가로채고 역습의 빌미를 제공했던 테스트 경기 못 봤습니까? 수비수 앞에서 뛰어도 되겠더군요.”
그 모든 말을 들어보던 수석코치가 탄식하며 말했다.
“허… 이 정도로 모자랄 게 없는 아이는 처음이군. 어떻게 할 건가, 에이든?”
수석코치의 물음에 연신 큼지막한 본인의 코를 만지며 생각에 잠겼던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뭘 시켜도 부족한 게 없다라…….”
에이든은 코치진을 둘러봤다.
가만 보면 이 양반들 자기들이 뛰었거나 선호하는 포지션을 말한 것 같았다.
“중간에 수비수 시켜야 한다는 친구 있지 않았나?”
한 코치가 슬그머니 뒤로 숨는다.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은 에이든은 말했다.
“축구는 결국 골로 말하는 법. 골 결정력이 떨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는 양발에 결정력도 뛰어나. 그는 1선에서 뛰어야 해.”
그 말에 코치들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축구는 골로 말한다는 말을 적어도 이 팀에서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단계에서 그에게 역할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보이네.”
“그렇습니까?”
“그래.”
굳이 역할을 부여해 거기에 국한되어 크는 건 그를 낭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내 팀에서는 그를 폴스나인으로 운영하고 싶군.”
에이든은 프리델 마이어가 뉴캐슬의 메시라고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실제로 그는 메시의 롤이었던 폴스나인에 어울리는 선수였다.
지금도 봐라.
2선까지 내려와 중원의 숫자를 늘려 B팀을 압박하던 그는 공을 받자 단순한 드리블로 한 사람을 제친다.
저게 어딜 봐서 13살의 플레이란 말인가.
그뿐이면 말을 안 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아웃프론트 패스로 생각지도 못한 위치에 공을 찔러넣었다.
이에 윙어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지만, 너무나도 절묘한 위치여서 따라 붙은 수비수가 없을 정도였다.
윙어가 전력을 다해 골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아쉽게도 골로 연결되지 못했군.”
“저 친구는 발이 빠른 것 빼곤 없는 것 같습니다.”
“상위 클래스로 가긴 글렀어.”
냉정하게 한 선수를 평가한 스탭들의 시선이 다시 태양을 향했다.
원래라면 잉글랜드산 유망주 이엘 하츠에게 꽂혀야 할 시선이었다.
그리고 이따금 다른 선수들을 둘러볼 눈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태양의 놀라운 플레이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상대의 역습을 후방에서 끊어낸 태양팀의 공이 다시 태양의 발에 닿은 순간.
태양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패스를 주고받으며 빌드업하다 최전방에서 빠른 속도로 하프 스페이스를 파고 들어갔다.
그런 그를 붙잡기 위해 머리 하나 이상은 큰 상대 센터백이 붙었지만 태양은 쓰러지거나 공을 뺏기지 않았다.
“오……! 레인보우 플릭!”
메시와 다르게 화려한 기술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워…….”
“와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기술로 두 명을 무너뜨리고 무슨 억하심정인지 유니폼을 붙잡고 늘어지는 상대 선수의 방해에 넘어질 것 같은 상황에도 말도 안 되는 코어를 자랑하며 기어이 골을 넣어 버린다.
그걸 본 에이든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수석코치에게 지시했다.
“저 친구를 다음 경기에 투입합시다.”
불과 일주일 만에 U-16 리그 출전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아, 다음 경기? 어려운 경기입니다만?”
“경기에서 저 활약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어려운 경기는 우리가 아니라…….”
U-16 리그.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상대는.
“맨시티가 될 겁니다.”
유스팀 포함 프리미어 리그 절대적 강자, 맨체스터 시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