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25화
맨체스터 시티와 있을 경기에서 선발 출장을 통보받은 이후, 나를 향한 이엘 하츠의 악의는 더욱더 커져갔다.
뭐, 그럴 만하다.
나 때문에 선발이 아닌 벤치를 달구게 됐으니까.
스스로 부동의 주전이요 에이스라고 생각했을 텐데 온 지 얼마 안 된 세 살이나 어린 내가 그런 자기를 밀어냈으니 아니꼬울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도 이어지는 연습경기에서 어느새 입장이 바뀌어 주전이 아닌 후보를 상징하는 형광색 조끼를 입은 녀석은 코앞에 다가온 득점 기회를 쓸데없이 힘이 들어간 슈팅으로 저 멀리 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래, 내가 오기 전에는 얼마나 잘했는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가 본 이엘 하츠는 골대 앞에서 침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연계가 좋거나 포스트 플레이가 좋으냐?
그것도 아니었다.
발재간도 좋고 피지컬도 준수한 건 인정하지만, 그걸 활용하지 못하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다.
현대 축구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사장될 타입이다.
왜 녀석이 회귀 전 기억에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이엘 하츠는 갈수록 못하고 나는 매 연습경기, 훈련마다 두각을 드러내니 팀 내 분위기가 점점 스페인 파벌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페인 파벌 역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유스팀 안에서 내 영향력이 커져갔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할 수는 없었다.
내 목표는 U-16의 대장 노릇이 아니라 최대한 빠르게 프로팀에 입성해 많은 돈을 버는 거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더 발전해야 하고 더 잘해야 한다.
절대 훈련을 허투로 할 수 없었다.
그런 내 열의를 알아주기라도 하듯 뉴캐슬의 스탭은 최고의 환경에서 나를 케어해 주고 있었다.
“아직 너는 성장하는 중이니 무리해서 가속을 하거나 급제동해서 무릎에 무리를 줄 필요가 없다. 지금 부상당해 만성이 되면 치명적이니까.”
내 미래를 위해 내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끔 요령과 관리를 해주고.
“네가 지금까지 보여준 득점 위치를 보면 너희 나라의 전설적인 선수, SON이 득점을 많이 하던 위치와 비슷해. 치명적인 위치와 기술이긴 하지만 득점이 단순화되면 수비수가 그 위치에서 너를 견제할 확률이 높아져.”
사소한 득점 위치, 루트까지 파악해 다양성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자, 이건 도시락이다. 앞으로 영양사가 네 식단을 관리할 거야. 괴로울 수도 있고, 어머님이 해주신 음식보다 맛없을 수도 있겠지만, 네 미래를 생각하면 아침저녁으로 챙겨먹도록 해.”
심지어는 내 식사까지 관리해 줬다.
엄마 밥 보다 맛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뉴캐슬이 제공하는 도시락은 정말 맛있었다.
영양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이고, 쉐프는 5성급 호텔에서 일했다고 했던가?
“심신의 안정을 위해 요가를 해보는 건 어떤가? 유연성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될 텐데.”
“명상을 해볼래? 침착성을 길러주는 데 도움이 되지.”
가끔 과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요가와 명상이라니.
요가는 나도 괜찮은 거 같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명상은 정중히 사양했다.
“이제 곧 있으면 경기구나. 16세 리그는 등번호 교체가 자유로워서 말이지. 혹시 원하는 등번호가 있니?”
리그이긴 하되 교류전 형식이 더 강하다 보니 16세 이하 리그는 선수등록이나 등번호 등록이 별도로 없었다.
물론, 국제 대회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씨익 웃었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등번호를 쓰고 싶어요.”
“몇 번이니?”
“7번이요.”
“오, 그 번호는 쉽게 줄 수 없는 번호인걸? 이미 주인이 있기도 하고.”
그래, 확실히 쉽게 줄 번호는 아니긴 하지.
“그러면 어떻게 하면 7번을 받을 수 있죠?”
“나를 놀라게 해다오. 그러면 빠른 시일에 7번을 주도록 하지.”
감독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할게요.”
어쩌면 이 등번호를 차지하기 위해 선수 생활 동안 몇 번이고 경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평생 내 등번호는 7번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고?
경쟁 없는 축구라니, 재미없잖아?
* * *
제이슨 우드는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뉴캐슬어폰타인에 거주했다.
아마 곧 태어날 아들도 이곳에서 자라 이곳에 정착할 거다.
그야말로 순혈 툰이다.
뉴캐슬 사람을 뜻하는 툰이 어떤 사람들인가?
축구에 미친 사람들이다.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는지 인구 30만 정도밖에 안 되는 소도시의 클럽인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도시와 어울리지 않게 6만 관중을 동원하는 홈구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구장이 매 경기마다 만석, 시즌권은 조기 마감시킬 정도다.
순혈 툰인 제이슨도 축구에 미쳤다.
팀이 이기면 일주일이 행복하고, 지면 일주일이 불행한 그런 사람이었다.
아, 그리고.
[우드 정육점 쇠고기 25% 세일]
팀의 승패에 따라 대대로 운영하는 정육점의 고기가 세일을 하기도 한다.
“25%나 세일이라니, 어제는 뉴캐슬이 이겼나봐요?”
콧노래를 부르며 방금 막 정형한 소고기를 정리하던 제이슨의 귀에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예쁘장한 동양인 소년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그렇지. 어제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아스톤 빌라르 상대로 3대0 대승을 거뒀지.”
그 말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선덜랜드를 이기면 더 많이 세일하나요?”
“그럼, 당연하지. 5대0 이상으로 이기면 40% 이상 세일을 하는 경우도 있단다.”
“그렇군요.”
“그래, 그나저나 처음 보는 친구군. 아시아 어디에서 왔나?”
“한국이요.”
“오! 한국! Son의 나라?”
“네.”
“관광?”
“아뇨, 여기 살고 있어요.”
제이슨은 소년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이 작은 도시에 동양인을 보는 건 드문 일이다.
아시안이 관광을 오는 일도 드물었고, 거주하는 건 더 드문 일이거든.
“어, 그러고 보니…….”
가만히 보니 아이의 옷이 눈에 익었다.
사랑하는 구단의 트레이닝 자켓이었다.
“혹시 뉴캐슬 유스……?”
“네, 맞아요.”
“오오, 아카데미가 아니라 유스?”
아시안, 그것도 동아시아 사람이 유난히 어려 보인다는 걸 감안해도 유스가 아니라 아카데미에 들어갈 것 같은데?
“유스 맞아요. 유스16.”
“오……! 재능이 뛰어난 아이인가 보구나.”
하긴 재능이 좋으니 그 먼 한국에서 여기까지 데려왔겠지.
고개를 끄덕이는데 저쪽에서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온다.
“어… 하우머치?”
어설픈 영어에 아이가 대신 말했다.
“이거 다 얼마예요?”
엄마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데 오히려 아이가 영어를 더 잘하다니.
꽤 똘똘한 친구인 모양이다.
계산을 한 제이슨은 방금 정형한 소고기 한 덩어리를 얹어주며 말했다.
“이건 잘 먹고 잘 하라는 의미로 주는 거다. 팀을 위해 훌륭하게 커다오.”
태양은 꾸벅 인사하고는 말했다.
“그럴게요. 아, 시간 되면 리틀 벤튼에서 유소년 경기 구경 오세요. 요번 주에 맨시티랑 붙거든요. 선발로 나가요.”
리틀 벤튼은 뉴 다즐리 파크가 생기기 전에 뉴캐슬 유소년 아카데미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유스팀을 위한 경기장이 세워져 있었다.
유스 경기에도 관중을 동원해 유소년들이 관중이 있는 경기장에 익숙해지길 바라며 세운 작은 스타디움이었다.
“오, 그거 재미있겠네.”
“시간이 되면 꼭 가도록 하마.”
“네, 좋은 하루 되세요!”
환하게 웃으며 엄마와 나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제이슨은 흐뭇하게 웃었다.
“아니, 가만, 진짜 오랜만에 가볼까?”
시즌권에 실패해 티켓을 구하지 못한 경우 유소년 경기를 본 경우가 있었던 제이슨은 흥미가 생기는 걸 느꼈다.
때마침 티켓을 못 구했기 때문이다.
“그래, 가자. 상대도 상대니깐.”
제이슨은 가지 못하는 홈경기를 대신 유스 경기를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라나는 뉴캐슬의 아이들을 보는 것도 기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다.
무려 맨체스터 시티니까.
오일머니가 투입된 이후 맨체스터 시티는 빠르게 리그를 평정했고, 지금도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다.
아니, 거의 1강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유스 명가로도 자리매김했다.
필 포든을 위시한 빅리그 주전급 이상의 선수들을 여럿 배출했고, 지금 맨체스터 시티 유스팀도 연령별로 잉글랜드 최강이라 자부할 만했다.
잉글랜드 국내 뉴스에서도 대서특필되며 잉글랜드 차세대 센터백으로 주목받는 엠마누엘 에제크웸을 필두로 헨리 도멩게, 루크 영과 같은 선수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이 셋은 모두 잉글랜드 출신으로 잉글랜드의 미래라 불리고 있었다.
그 반면에 우리 뉴캐슬의 유스는?
그 생각을 하자 제이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대별로 괜찮은 유망주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최소 국내에서 일찍이 이름을 알릴 법한 선수는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 이엘 하츠인가? 걔 정도뿐인가?”
그나마 이름을 들어본 건 이엘 하츠 정도?
“걔는 싹수가 노란데.”
하지만 오랜 시간 경기를 지켜본 팬의 입장에서 보면 이엘 하츠는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어린 주제에 벌써부터 거만해 미래가 보이지 않았거든.
“그 아이는 어떠려나.”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두 번째로 본 동양인. 그것도 꼬마.
생각해 보니 둘 다 공교롭게 한국인이었다.
크게 나쁘지 않았던 지난 한국인의 기억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주말.
제이슨은 유스팀 경기를 위해 리틀벤튼을 찾았다.
리틀벤튼은 제일 하위리그 정도 되는 구단에서나 운용할 법한 작은 경기장이지만, 유스팀이 사용하기엔 어찌 보면 과분한 경기장일 수도 있는 곳이다.
누가 유스팀 경기를 보겠는가?
웃긴 건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 뉴캐슬 사람들, 툰(뉴캐슬 사람을 뜻하는 말)들은 본다.
많은 사람은 아니어도 경기장에서 검고 하얀 유니폼을 직접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유스팀 경기라도 찾아와서 보고야 만다.
“헨릭! 자네도 티켓을 못 구했나보군?”
“제이슨? 시즌권 있다 하지 않았어?”
혹시나 했는데 관중석에 앉아있는 친구를 보고 제이슨이 냉큼 그쪽으로 달려가 자리 잡았다.
“요번에 못 구했다고 했잖아. 연락도 안 했는데 여기서 보게 되네.”
헨릭은 제이슨과 마찬가지로 뉴캐슬 토박이, 진성 툰으로 같은 학교를 다니며 자란 사이였다.
“그러게. 맥주?”
“좋지.”
헨릭이 가져온 맥주 한 캔을 따는 사이 툰의 아이들이 필드 위에 섰다.
“뉴스에서 본 애들이 참 많네. 저쪽 팀에는.”
맨체스터 시티에서 자랑하는 유망주들을 바라보며 헨릭이 부러운 듯이 말하자 제이슨도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우리 유스도 많이 발전했어. 시설은 맨시티보다 더 좋으니 언젠가 최고의 유망주를 키워내겠지.”
“그렇지, 그리고 지금 잘한다고 나중에 잘한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것도 그렇고.”
아무리 그래도 엠마누엘 에제크웸은 이미 완성되다시피 해서 커서도 문제없을 것 같긴 하다만, 모를 일이다.
프로 선수가 되고 망가진 애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그 가운데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된다. 필드를 지켜보던 헨릭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우리 유스에 아시안이 있었어?”
“이번에 들어온 친구야.”
“오, 그래. 본 적 있나봐?”
“얼마 전에 내 가게에서.”
“그렇… 어? 어어!”
고개를 주억거리던 헨릭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기장을 바라봤다.
“뭐야? 뭔… 우악! 와우! 미쳤네!”
필드에는 그 아시안 소년이 놀라운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