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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39화 (39/202)

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39화

태어나서 처음으로 천하의 디오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걸 봤다.

내 지난 삶에서 디오스는 축구로 눈물 흘렸던 일 따위는 아마 없었겠지만, 이번 삶에서는 내가 디오스에게 좌절과 눈물을 선사한 거다.

어떠냐, 이놈아.

너도 당하니까 기분 더럽지?

“다음번에는 안 져.”

뻔하디 뻔한 말을 남기고 물러나는 그를 뒤로하고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반갑네. 써니라고들 부르던데. 맞나?”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었다.

“네. 뭐, 그렇게들 부르긴 해요.”

시큰둥한 나의 말과 달리 그는 즐거워하며 말했다.

“우리 말이 굉장히 유창하군! 아까 디오스와 대화하는 걸 멀리서 봐서 혹시나 했는데 말이야.”

“제가 언어 쪽은 좀 재능이 있습니다.”

“놀라운 재능이군. 축구 선수에겐 꼭 필요한 재능이지.”

“그래서 배웠어요.”

“이왕 배운 김에 우리 팀에 올 생각은 없니?”

“없습니다.”

“아쉽군.”

그리 말하며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어슬렁거리는 아저씨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이제 생각났다.

저 사람 나중에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 되는 사람이다.

후베닐 A가 아니라 레알 마드리드 말이다.

성향은 카를로 안첼로티고 전술성향은 알렉스 퍼거슨과 비슷한 유형의 감독이었다.

이름이 뭐더라?

“로자르 감독이 뭐래?”

아, 그래, 로자르. 로자르 알베르토.

“레알 마드리드에 올 생각 없냐는데?”

“역시, 너라면 그럴 말 들을 줄 알았어.”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누군가에게 꿈의 구단일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나한테는 아니거든.

“윤, 정말 멋진 경기였다.”

…이 사람은 또 왜 이래?

“아, 음… 네. 감사합니다.”

차마 경기 활약 때문에 뭐라 하진 못하고 경기가 끝나고 나면 꽁해진 얼굴로 나를 외면하기 일쑤였던 감독이 보기 드물게 밝은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뭔가 느낌이 별로인데.

왜 이러지?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환상적인 침투와 수비력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윤. 미드필더로…….”

“싫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아니, 얘기는 끝까지…….”

“골 넣는 게 더 좋습니다.”

“아니, 네 재능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축구는 골로 말하는 법이죠.”

디오스 한 번 이기려다가 혹을 단 기분인데, 이거.

우리 디괄 감독 녹음기에 미드필더 전향이 추가될 모양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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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캐슬에서 뛰는 한국 유망주.mp4]

너희 뉴캐슬에 한국인 유망주 뛰는 거 알고 있냐?

요즘 얘 아는 애들도 있긴 한 거 같은데 이 영상 봐라 지린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vs 레알 마드리드 유에파 유스 리그 경기 영상)]

-뭐냐 쟤

-메시 환생했냐

-FM으로 치면 포텐 최소 190은 찍을듯 ㅇ

-디오스가 ㅈ 발리네

-디오스 스페인에서 ㅈㄴ 밀어주는 유망주 아니냐? 최연소 골든보이 유력하다던? ㅋㅋㅋ

-와……. FM에서도 디오스 랜덤 포텐 혼자 -10 받는 애인데 쟤를 가지고 놀아?

-쟤는 fm에도 없는 애인데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미쳤다

-드리블하는 거 봐라 메시다

-레알 요즘 유망주 빡시게 키우는데 무슨 성인이랑 애들이 축구하는 거 같네

-뉴캐슬 현지인이다, 뉴캐슬 사람들 지금 쟤만 보고 산다 뉴캐슬에서도 애지중지 키우는 중임

-ㄹㅇ?

-ㄹㅇ임 한국 홈페이지나 SNS에는 없는데 영국 홈피나 SNS 들어가 보면 1군 애들보다 쟤 영상이 더 많이 나옴 댓글도 제일 많음

-ㅋㅋㅋㅋ 누가 현지 반응 번역 좀 해줘라

-이름이 태양이라 별명이 써니라네 아무튼, 이대로만 커주면 좋겠다

-요즘 유망주들 다 잘나가는 듯?

-걔들 그대로 잘 커주면 역대급 황금세대일 듯]

“야, 이 영상 봤냐?”

대한민국 유소년 총괄 감독 이정후가 코치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게 뭔데요?”

코치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뭐야, 너 얼굴이 왜 이리 상했어?”

“U-15부터 해서 올대까지 죄다 관리해야하는데 얼굴이 안 상하고 배깁니까?”

“그게 뭐 어렵다고 그래? 청소년 월드컵만 준비하면 되는데?”

“U-17이랑 U-20을 같이 하잖습니까. 코치 정원 좀 늘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도 그러고 싶지, 안 해주는 걸 어떻게 하냐. 아무튼, 이거 봤냐고.”

“아, 태양이요? 봤습니다.”

그 말에 이정후가 뱀눈을 뜨고 코치를 노려봤다.

“이 자식 일은 안 하고 커뮤질이나 하고 있었던 겨?”

“…함정 카드를 발동하셨지만, 아쉽게도 예~ 전부터 감독님이 지시한 대로 윤태양을 관찰한 거뿐입니다.”

“아, 내가 시켰었나? 태양이 지켜보라고?”

코치는 이정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출장비를 안 줘서 가질 못 하니 유튜브 영상이라도 꾸준히 챙겨봤습니다. 뉴캐슬 걔들 가끔이라도 유소년 경기 영상 올려주거든요.”

“그래? 요거요거, 일을 아주 잘하고 있었구만 기래.”

“어휴…….”

한숨을 내쉬는 코치를 뒤로하고 이정후는 흐뭇하게 영상을 다시 시청했다.

누구보다 유소년에 진심인 이정후 감독이 디오스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천하의 디오스를 가지고 노는 걸 봐라.

수비수를 해본 적도 없는 놈이 기라성 같은 수비수들도 막지 못하는 디오스 특유의 리듬을 차단하고 지난 시즌 유로파 유스 리그 우승을 거머쥔 수비라인을 손쉽게 털어버린다.

한 경기뿐이긴 하지만, 디오스 그 이상의 재능을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얘는 진짜 될 놈이야.”

한국에 이런 인재가 나오다니.

선배들과 비교해 봐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한국 역사상 역대급 재능이다.

“얘는 내년 월드컵 생각하면 요번에 꼭 선발해야겠지?”

“한독 교류전이요?”

“어어.”

어느덧 20년이 넘게 이어져 온 한독 교류전은 다음 해에 열리는 청소년 월드컵을 대비하기 위해 독일 분데스리가 유스팀 네 곳과 시합을 치른다.

게다가 올해는 섭외된 팀 수준이 역대급으로 높았다.

바이에른 뮌헨, 도르트문트, 레버쿠젠, 프랑크푸르트였기 때문이다.

도르트문트, 레버쿠젠, 프랑크푸르트는 각각 이성호, 김효준, 배상현을 보유하고 있어 섭외가 쉬었지만, 매년 요청을 해도 거절하던 바이에른 뮌헨이 승낙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분데스리가의 공룡, 바이에른 뮌헨은 다른 분데스리가 팀에서 선수를 강탈하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누가 뭐래도 리그 최고의 팀으로 유스팀의 수준도 굉장히 높았다.

“확실히……. 꼭 합류해야겠네요. 수준 높은 팀을 상대로 호흡을 맞춰보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그래, 애들이 태양이에게 적응해야 하니까.”

“태양이가 대표팀에 적응하는 게 아니라요?”

“넌 태양이 경기 보고도 모르겠냐? 걘 적응이 필요 없어.”

코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걘 당장 U-20, 아니, A매치 나가도 뭔가 할 것 같긴 해요.”

“캬, A매치까진 든든하다는 거구나. 제발 부상 없이 잘 커줘야 할 텐데.”

기대감에 혼자 들떠있는 이정후를 뒤로하고 코치는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네, 대리님!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협조 공문 좀 준비해서 보내주세요! 네! 윤태양 군 차출 협조입니다. 네, 네! 부탁드립니다!”

“으흐흐흐, 가보자고. 최초의 청소년 월드컵 우승.”

“…그전에 뉴캐슬이 윤태양 차출 승낙해 주길 비세요.”

“아, 맞다. 설마… 차출 반대하진 않겠지?”

마시던 김칫국 그릇이 깨진 것마냥 표정이 잔뜩 굳은 감독을 보며 코치가 말했다.

“태양이가 안 온다고 할 수도 있어요.”

“서,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벌써부터 태양이가 차출 거부라도 한 것처럼 절망하는 감독을 보며 코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이 아니라 애를 모시는 기분이었다.

* * *

유소년 리그라 한가할 듯 보이지만, 사실 일정은 살인적이다.

하지만, 유스팀 선수단은 널널한 편이다.

레알 마드리드와 일전 이후 4일 뒤에 열린 리그컵은 후보 선수들이 전부 투입되어 경기를 치렀다.

그 가운데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대표팀 차출 요청이었다.

지금처럼 하면 대표팀에서 부를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연락이 오니 기분이 좋았다.

“리그가 한창인데 고작 친선경기 때문에 대표팀 합류는 좀 그렇지 않나? 안 갔으면 좋겠는데.”

좋은 기분을 감독이 초쳤다.

그걸 제압한 건 유스 디렉터인 칼센이었다.

“대표팀 활동은 선수 성장에 중요한 요소네. 태양이 거부하지 않는다면 협조할 생각이니 그리 알게.”

감독이 아무리 거부해도 유스팀의 모든 결정권은 디렉터에게 있었다.

“하지만 유에파 유스 리그가…….”

“한 선수 없이 조별 예선도 통과 못하는 팀이라면 감독의 자질을 의심해야겠지.”

“…….”

듣는 내가 다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지 하고 싶은 말만 주구장창하던 감독답지 않게 입꾹닫하고 물러났다.

칼센은 고개를 저으며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가서 좋은 경험 하고 오게, 태양.”

“감사합니다.”

일이 원만하게 끝나서 좋네.

이제 얼른 집에나 가야겠다.

“응?”

이 시간에 깨톡이 울리네.

누구지? 아, 대표팀 톡방이구나.

-김효준 : 다들 10월쯤에 합류하나요 대표팀?

-나이엘 : ㅇㅇ

-류준서 : 당연히 합류지 ㅋ

-김효준 : ㅋㅋ ㅈㄹ하고 있네 국내파 전북따리가 제발 대표팀 합류하게 해주세요 하고 빌 판국에 당연은 무슨 당연 ㅋㅋㅋ

-류준서 : 전북 출신이 전북 따리 ㅇㅈㄹ하네 진짜 참나

-김효준 : 응? 아니쥬? 나는 뼛속까지 레버쿠젠이쥬? 전북 피 싹다 빠졌쥬?

-나이엘 : 저 ㅅㅋ 전생에 일본 앞잡이였을 듯

-배상현 : ㅋㅋㅋ 솔직히 효준이가 차출된 게 더 의아한 거 아니냐 ㅋㅋ 경쟁자가 짱짱한데 ㅋㅋ 아 후보도 필요하긴 하지

-김효준 : 아, 형…….

-류준서 : ㅋㅋㅋㅋㅋ

-나이엘 : ㅋㅋㅋㅋ

-이성호 : 다들,,,,,오렌만에,,,보겟군,,,,,기대ㅤㄷㅙㄴ다

우리 성호가 한국에서는 그래도 맞춤법을 어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그 짧은 사이에 한글을 잊은 모양이다.

-김효준 : 근데 꼭 이럴 때 윤태양은 말이 없더라? 뒤짐?

-나 : 살아있음

-김효준 : 연락 좀 해라 좀;

-나 : 못하는 애랑 말 섞기 싫어서 연락 안 함 ㅇ

-김효준 : ;;;레버쿠젠 무시하냐?

-나 : 레버쿠젠이 아니라 너 무시함 ㅇ 김효준 너 내 후보잖아 ㅇㅈ?

-나이엘 : ㅇㅈ? ㅇㅇㅈ

-류준서 : 인정박고 인정드립니다

-김효준 : 야;; 예전에 내가 아니야

-나 : 레알 마드리드에 해트트릭 넣어봄? 안 넣어봤음 찌그러져 있어라

-김효준 : ㅅㅂ

-배상현 : 태양아 조만간 보자

-ㅇㅋㅇㅋ 상현이는 잘 지냄?

-류준서 : 와우 유럽마인드 오지네 선배 이름을 막 부르네

-배상현 : 냅둬… 포기함…….

-나 : 원래 잘하는 사람이 형이야 앞으로 다들 나한테 형이라 불러라

-나 : 왜 다들 말이 없음?

-나 : ㅋㅋㅋㅋㅋ 조만간 보자 동생들

톡을 끝내고 내가 웃고 있다는 걸 느꼈다.

실제로 살아온 시간이 길다보니 다들 애 취급했는데, 어느새 내가 오히려 지금 삶의 나이에 적응한 모양이다.

얘들이랑 대화하는 게 즐거운 걸 보면 말이다.

“기대되네.”

교류전, 나아가서 청소년 월드컵까지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설렌다.

지난 삶에서는 그렇게 처절하게 뛰어도 월드컵 16강이 한계였는데, 이번 생에는 다를 거란 생각을 해본다.

청소년 월드컵부터 해서 차근차근 밟아서 월드컵 우승까지 바라보는 거지.

꿈이 크다고?

원래 꿈은 커야 하는 법이지.

혹시 모르잖아, 내 영향으로 대표팀 전체가 발전해서 월드컵 우승이라도 할지?

“…너무 과한 욕심이긴 한가?”

뭐, 다시 한번 말하지만 꿈은 커야 하는 법.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우승은 그런 자들에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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