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57화
[뉴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36라운드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첼시의 경기가 곧 펼쳐집니다.]
[오늘의 선발 라인업입니다. 먼저 뉴캐슬 유나이티드입니다.]
FW 레델리/실바/오마르
MF 알브레히트/로씨/윤태양
DF 반디아/아놀드/디다/오웰
GK 리첼라
[433 포메이션으로 공격적인 운영이 예상되는 뉴캐슬입니다.]
[네, 이어서 첼시입니다.]
FW 보우프티니/세레띠/게일레스
MF 델로아/젠슨/데 누초
DF 주니뉴/완더레이/크루즈/케이퀘
GK 데스타노글루
[첼시는 그야말로 만전이군요. 부상으로 장기간 이탈했던 선수들이 복귀해 기량을 회복하면서 최고의 스쿼드로 뉴캐슬을 상대합니다.]
[첼시는 우승 레이스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 *
필드에 서서 잔디를 꾹꾹 밟아봤다.
“바짝 말랐구먼.”
지난 경기와 다르게 오늘 잔디는 건조했다.
잔디가 짧고 물을 머금으면 공을 빠르게 풀어나갈 수 있고, 반대로 잔디가 좀 더 길고 건조하면 공이 느려 빠른 전개가 어렵다.
이건 첼시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잔디다.
첼시는 패스 마스터라 불리는 델로아를 중심으로 빠른 패스를 통한 빌드업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패스 마스터라고 까지 불리며 현존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델로아를 막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첼시는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
우리 팀 선수들이 어수선하게 첼시를 맞이한다.
우리가 첼시를 상대로 세심하게 준비했듯이, 첼시도 우리를 상대로 만반의 준비를 한 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번 시즌 통계적으로 우리 팀은 초반 20분 안에 골을 가장 많이 먹었고, 전반전에서 2골차 이상으로 뒤졌을 때 패배할 확률이 79%에 달하는 팀이었다.
첼시는 그걸 노리는 거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 상황에서 우리 롬멜 감독은 델로아와 맞서는 상대로 나를 세웠다.
지금 이 경기를 보는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게 맞나 싶을 거다.
나는 이제 막 프리미어 리그에 고개를 내민 뉴비고 델로아는 세계 최고로 꼽히는 미드필더 중 하나니까.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 우리 좌우 미드필더의 롤은 메짤라였다.
알브레히트는 왼발 밖에 못 쓰는 선수인데, 그의 무기 중 하나가 클래식 윙어로 뛰던 시절 갈고닦은 크로스였다.
그가 내 위치로 오면 그걸 쓸 수 없다는 거지.
근데 생각해 보면 크로스를 백날 올려도 그걸 헤딩으로 받아줄 크롬웰이나 하빕이 없으니 무용지물 아닌가?
모르겠다.
팀을 꾸준한 챔스 단골로 만든 롬멜이지만, 그는 은근히 고집이 세서 자신이 정한 역할 그 이상은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나는 왜 자꾸 바꾸냐고?
아직 내 용도를 완전히 정한 게 아니어서 여러 가지 시범해 보는 걸 거다.
아무튼.
“오랜만이군, 꼬맹이.”
공을 가진 그가 나를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얼마 전에 2군 경기에서 진 게 충격이 컸던 건지 나를 알아본다.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건가?
“내가 더 큰데 누구더러 꼬맹이래?”
그는 키가 172CM 정도로 작은 편이었다.
“……!”
내 말에 그가 정색한다.
그는 작은 키를 컴플렉스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드루와, 이 난쟁이 새꺄.”
내 말에 그는 더욱더 얼굴을 굳히면서도 나를 피해 움직였다.
나를 벗겨내고 패스를 줄 생각이겠지만, 어림없지.
나는 속도를 내 그에게 바짝 붙었다.
“다리가 짧아서 그런가 느리네?”
“…닥쳐라.”
그를 잡고 늘어지면서 계속해서 트래시 토크를 시도했다.
수비하는 사람의 기본 미덕이다.
욕설을 포함한 인신공격, 심지어 인종차별까지 온갖 것들을 동원해서 상대 멘탈을 건드는 건 말이다.
그래야 실수가 잦아지지.
“난쟁이, 아니, 고블린? 맞아, 너 별명이 블루 고블린 아니냐?”
첼시의 푸른 유니폼을 입어서 블루 고블린, 그가 제일 싫어하는 별명이다.
“키가 문제가 아니라 얼굴이 문제였네. 님 얼굴 고블린같이 생김.”
“뭐? 이익……!”
연륜과 더불어 급식들과 어울리며 갈고닦아진 나의 트래시 토크는 천마신공에 버금가지.
흥분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델로아의 발밑에서 공을 가로챘다.
와아아아아!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분명 저 중에는 우리 가족들도 있을 거다. 가을이 여름이 겨울이도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다.
프리미어 리그 무대에서는 처음 있는 일.
그래서 그런지 어깨가 무겁다.
오빠이자 형으로서 뭔가를 보여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렇다고 감정에 휘둘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 바닥에서 너무 오래 굴러먹었다.
공을 뺏기고 뒤따라오는 델로아를 등지고 앞을 바라봤다.
마테오 실바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휴, 주책 맞은 영감 같으니라고.
그래도 정말 기가 막힌 위치에 있었다.
나는 무릎이 좋지 않아 점프하기 힘든 노인을 배려해 허리 높이 정도 되는 패스를 찔러주었다.
바닥에 깔리는 패스는 아까 말한 대로 잔디 때문에 느리거든.
마테오 실바가 다리를 들어 부드럽게 공을 받는다.
방금 다리 들 때 어이구, 하고 앓는 소리 한 거 아니지?
입모양이 그런데?
어쨌든 중요한 건 기가 막히다.
뭐랄까 관절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삐그덕거리고 느린 것 같은데 선수 하나를 금방 제친다.
차징하는 선수는 슬쩍 흘리며 비키고 그 뒤로 파고들어 곧 바로 툭하고 공을 차서 슈팅한다.
아쉽게 골키퍼에게 막히긴 했지만, 참 축구 쉽게 한다.
연륜 축구 무시할 게 아니다.
아무튼, 첼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긴 했는데, 아직 첼시 선수들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20분 안에 어떻게든 골을 넣고 두 골 넣어 전반을 가져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거참.”
나는 첼시 감독을 바라봤다.
이번 시즌 부임해 통계 축구를 들고 나온 젊은 감독이었다.
요번 시즌인지 다음 시즌부터인지 몰라도 맨시티가 군림하던 시대를 끝내고 짧게나마 첼시의 영광을 이끌며 이른 나이에 명장 반열에 오를 감독이다.
하지만, 통계라는 건 어디까지나 통계일 뿐이다.
그걸 가르쳐 줘야지.
* * *
[아, 델로아가 막히는군요.]
[윤태양과 대결에서 번번이 차단당하고 공을 앞으로 전개하지 못하는 델로아입니다.]
[놀라운 일이에요. 16세 소년에게 델로아가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윤태양은 공격만 잘하는 게 아니네.
-쟤 수비수 출신이냐? 왜케 잘 막냐?
-아주 그냥 손바닥 위에 두고 가지고 노는 거 같은데? 델로아가 하려는 거 다 막히고 있음
-와… 2033년 발롱도르 세계3위가 저렇게 무너지냐
-이게 그 뭐 대충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어쩌고 그거냐?
-ㅋㅋㅋ 쟨 진짜 망해도 절대 국내 올 일은 없겠다
한국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 프리미어 리그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고르 펠리페 델로아.
올해 28살.
발롱도르 최종 후보로서 세계 3위까지 기록하며 거액의 이적료를 받고 첼시로 이적한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사람.
그가 올해 16살에 불과한 소년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농락이었다.
마치 델로아가 어디서 삼바리듬으로 사람을 속일지, 어떤 패스를 보낼지, 어떻게 공을 받을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윤태양이 그 모든 걸 차단하고 있었다.
다른 팀에서 두세 명이 달라붙어도 그 말도 안 되는 탈압박 능력으로 모두 벗겨 버리고 환상적인 패스를 선보이거나 중거리 슛을 선보이던 델로아가 한 소년 때문에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그것뿐이면 다행이지.
[델로아가 못하는 걸 윤태양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첼시의 수비수들이 잘 막아서 그렇지 경기 초반 마테오 실바의 슈팅 장면도 그렇고, 계속해서 위협적인 상황을 윤태양이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윤태양은 얄미울 정도로 델로아를 막아내고선 델로아가 보여줘야 할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잰슨과 데 누초를 벗겨내고 완더레이와 크루즈 사이, 혹은 크루즈와 케위케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패스로 뒷공간을 탈탈 털어내고 있었다.
첼시는 그런 윤태양 때문에 전체적으로 라인을 올리지 못하고 간격이 벌어져 전반적으로 패스 정확도가 떨어졌다.
마른 잔디에서는 거리가 먼 상황에서 첼시 특유의 빠른 패스가 나오지 못해 좁은 간격에서 짧은 패스를 주고받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도권이 뉴캐슬에게 넘어갔습니다.]
[완더레이와 크루즈가 아니었으면 뉴캐슬이 진즉에 선제골을 넣었을 상황입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전반전 끝났습니다. 비록 스코어는 0대0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만, 점유율, 유효슈팅 등 모든 분야에서 뉴캐슬이 압도한 전반이었습니다.]
전반전이 끝나고 라커룸으로 들어가며 태양의 어깨에 마테오 실바가 팔을 올렸다.
“으아, 힘들다. 힘들어. 노인 학대하냐? 뭐 그리 패스를 나한테 찔러넣는 거야?”
“그러게 잘 좀 넣지 그랬어요. 전반에 해트트릭이라도 했음 진즉에 감독님이 교체했을 텐데.”
“그게 됐으면 진작에 발롱도르 10개는 탔겠지.”
“말년에 한 번 타볼 생각은 안 해요?”
“어휴, 그러기엔 관절이 너무 낡았어. 왼쪽 무릎 연골이 거의 없어. 이번 시즌 끝나면 수술할까 고민 중이야.”
그 말에 태양이 멈칫하고 마테오 실바를 바라봤다.
“뭐, 인마. 약속대로 너랑 같이 필드도 뛰고 했잖아. 이제 은퇴 생각도 해봐야지.”
마테오 실바는 그리 말하며 다음대 미스터 툰이 되어줄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은퇴는 모르겠고 팔 치워요. 냄새나네.”
태양이 그리 말하며 마테오 실바의 팔을 피해 서둘러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마테오 실바는 자신의 겨드랑이를 슥 만져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심한가? 그러고 보니 저 자식은 냄새도 안 나네? 희한한 새끼야.”
한국인이 유난히 냄새 유전자가 적다는 걸 모르는 마테오 실바는 괜히 좋다고 히죽 웃으며 라커룸 안으로 들어갔다.
태양이 뚱한 얼굴로 바나나를 욱여넣고 있었다.
정말이지 저 표정만 보면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단 말이지.
근데 귀여워 죽을 것 같다.
왜?
더럽게 잘하니까.
세상에 델로아를 그리 농락할 줄이야.
“너 아까부터 델로아한테 계속 말 걸던데 뭐라는 거냐?”
그 가운데 디다가 궁금한 얼굴로 묻는다.
마테오 실바도 그게 궁금해 귀를 기울였다.
“그냥 키 작다, 고블린이다, 계속 놀리니까 멘탈 나가던데. 쟤 멘탈 유리야.”
“그래? 많이 들어서 그 정도로 멘탈 나갈 애는 아닌데.”
“당연하지. 부모님 키까지 물어봤지. 네 아버지 키는 너보다 크냐 작냐 이러니까 그때부터 완전히 멘탈이 나간 것 같더라고.”
“와… 너어는 진짜…….”
세상에 16세 소년이 부모 욕까지 하는데 멘탈이 안 나갈 놈이 없지.
마테오 실바는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저런 걸 어디서 배워오는 거지?
자기 경험상 입 놀리는 건 선배가 하는 걸 보고 배우는 일이 많은데, 쟨 누가 가르쳐서 하는 것 같지가 않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전반전에 첼시를 압도하면서도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롬멜 감독이 붉어진 얼굴로 선수들을 다그친다.
그래, 화낼 만하지.
그 많은 기회를 날려 버렸으니.
마테오 실바는 슬그머니 자신의 무릎을 만져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애써 웃고 있지만, 그의 무릎은 차라리 죽여 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태양이 툴툴거릴 만하다.
그렇게 좋은 패스를 줬는데 골을 다 날려먹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아프지만 않았어도 진짜 해트트릭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감각이 둔해질까 주사도 맞지 않고 뛰었는데, 감각보다 고통으로 힘든 게 더 큰 것 같다.
실바는 슬그머니 의료진을 찾아 라커룸을 나섰다.
“라스트 댄스는 아직 멀었어.”
못해도 저 천재랑 한 시즌만 더.
마지막 한 시즌만 더.
매 시즌마다 했던 말이지만, 이번엔 그 어느 때 보다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