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65화
세계에서 손꼽히는 에이전시를 이끄는 에이전트 안나 브리즈는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 다음 간단한 샐러드로 아침을 챙겨 먹고 누구보다 일찍 회사에 출근해 누구보다 늦게 퇴근한다.
워커홀릭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일밖에 모르는 기계 같은 여자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일을 해야 할 때 집중해서 많은 일을 소화하고 반드시 최소 일주일에 평일 이틀은 휴식을 취하며 여가 생활을 즐겼다.
단지 바깥에서 활동보다 집 안에서 집순이로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집에서도 축구만 봤다.
가끔 독서를 하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시간을 축구 경기를 보는 것에 투자했다.
역시나 워커홀릭이라고?
아니다.
그녀는 정말 축구를 좋아했다.
명문대를 나와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는데도 축구를 좋아해서 이 일을 선택한 거였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여자 축구부에서 활동을 했고, 좋아하는 팀 경기는 에이전트를 하기 전부터 꼭 경기장에서 직관했으며, 그 외에 경기는 축구 OTT를 이용해 재방송으로 챙겨봤다.
축구를 너무 사랑해 직업으로 삼아버린 이 여자가 요즘 꽂힌 건.
“하… 윤태양.”
다름 아닌 윤태양이었다.
축구선수라고 믿어지지 않는 흰 피부,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곱상한 얼굴에 큰 키까지.
머나먼 동양의 왕자님이 저리할까.
여기서 그쳤으면 축덕인 그녀로서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쩜 저렇게 축구를 잘할까?”
그런데 윤태양은 축구도 기가 막히게 잘했다.
윤태양은 그렇게 그녀의 아이돌이 되었다.
“제발 나랑 계약했으면 좋겠다. 잘해줄 자신 있는데.”
해줄 수 있는 게 많았다.
지금 윤태양과 관련된 굿즈(?)는 유니폼밖에 없었다.
여기서 끝내서는 안 된다.
저 실력에 저 외모를 그대로 두는 건 죄악이었다.
실력적으로 남성에게 어필하고 외모로 여성에게 어필해야 한다.
아시아에서 아이돌 굿즈를 만들어 상품화하듯이 윤태양도 상품화 한다면 엄청난 수익이 예상됐다.
그건 그가 더 잘할수록, 그래서 더 유명해질수록 커질 거다.
“일단 쿠션이랑 베개랑 이불 같은 거에 우리 태양이 얼굴을 박아넣어야지.”
…절대 자기 침실을 그렇게 장식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 겠지?
어쨌든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이뤄졌다.
태양이 아빠, 지성에게서 연락이 온 거다.
-우리 태양이가 당신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합니다. 약속을 잡으시죠.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그녀는 기쁨에 겨워 몸을 부르르 떨다가 냉큼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윤태양과 약속이 잡혔어. 그를 잡을 수 있게 최고의 계약을 준비해. 명심해, 유소년이라 생각하지 말고 미래의 월드클래스 선수라 생각하고 계약을 준비하라고! 그래!”
* * *
아버지가 안나 브리즈를 만났다.
나를 만나고 싶어했는데, 그럴 수가 없다.
왜?
시즌을 앞두고 전지훈련을 떠났기 때문이다.
여기는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FC의 홈구장이자 훈련장인 뱅크 오브 캘리포니아 스타디움이었다.
LA하면 왠지 더운 느낌일 것 같은데 더위도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고, 건조해서 한국의 여름보다는 지낼 만했다.
사실, 난 더위를 타지 않는 편이었다.
이름이 태양이어서 그런가 뜨겁다 못해 따가운 태양도 좋아했다.
“로스앤젤레스 좋네. 말년은 여기서 보낼까?”
“이제 시작한 놈이 뭐 벌써 말년 타령이냐?”
“그러게 아직 10년도 넘게 남았네요.”
“뭐냐 그 나라 잃은 표정은? 설마 벌써 은퇴하고 싶은 건가? 끌끌.”
“어, 음… 군대를 두 번째 다니는 기분이랄까.”
“뭔 소리야 그건.”
“그런 게 있어요. 마티는 어때요, 여기? 은퇴하고 여기서 살 생각 없어요?”
내 물음에 마티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더운 거 싫어. 차라리 러시아 가서 살고 말지.”
더운 거 싫은 양반이 축구는 어떻게 하나 몰라.
“그나저나 새로운 친구들은 어때?”
“글쎄요?”
흘끔 주변을 훑어 새로운 이적생인 일리뉴와 마리오를 찾았다.
덩치가 큰 흑인과 레게머리를 한 라틴계 백인을 살폈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듯 겉돌고 있지만, 여유가 넘쳐났다.
그럴 만해.
일리뉴는 지난 시즌 세리에 A 득점왕이고, 마리오 메넨데즈는 레알 마드리드의 코어 같은 존재였으니까.
“콧대가 드높은데요?”
“그지? 좀 그런 감이 있지? 지들이 뭐라도 되는 것마냥 거들먹거리는 게 고깝지 않누?”
아니, 이 양반이 왜 이래?
“왜 이러심?”
“음… 그냥?”
“심심해요? 나이 차이 많이 나서 아무도 안 놀아주고 막 그러시나?”
“…그것도 없지 않아 있지.”
늙어서 이렇게 추해지면 안 되는데, 쯧쯧.
“거… 정 할 거 없으면 감독님이랑 코치들이랑 노세요. 아, 코치도 마티보단 어린가?”
“나이로 늘리지므르…….”
이를 악무로 말하는 걸 보니 이제 나이에 민감한 나이가 된 모양이다.
“뭐,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뭉치겠죠.”
“당연히 그러겠지.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 뭐가 중요해요?”
“네가 리더가 돼야지.”
“제가요? 왜요?”
실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말했다.
“쟤들은 언제고 또 떠날지도 모르잖아. 클럽에 대한 애정도 없고. 이왕 팀의 실질적인 리더를 꼽자면 너 아니겠냐?”
“리첼라가 주장인데요?”
왜 나한테 이러실까?
“솔직히 리첼라도 오래 못해. 쟤도 막 점프하고 그러면 삐걱삐걱 소리 난다?”
저 고릴라가 어딜 봐서?
피지컬 괴물 소리 듣는 일리뉴도 리첼라한테는 쨉도 안 되는 거 같은데.
“리첼라 보지 말고. 내가 한 이야기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리첼라는 무서우신가 봄?”
“쟤한테 맞으면 두개골이 박살 날지도 몰라. 조심해야지. 아무튼, 네가 중심이 되서 뭔가 해야 한다니까?”
“프랜차이즈를 찾으시면 저기 이젤도 있는데요?”
때마침 이젤이 공을 가지고 내게 달려온다.
“태양! 나 크로스 좀 올려줘!”
“그래.”
목적이 그거였나.
나는 냅다 골대 쪽으로 높은 크로스를 올렸고, 이젤이 열심히 공을 쫓아 달리기 시작한다.
“주인 없는 개가 주인이 정해졌네…….”
“이젤이 개예요? 아무리 별명이 이젤 하운드라고 하더라도 마티가 개 취급하면 어떻게 해요?”
열심히 공을 쫓은 이젤은 골대를 향해 발리 슈팅으로 골을 만들고 다시 공을 들고 나에게 달려온다.
마티가 전에 넣었던 발리 슈팅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헥헥, 한 번 더!”
“그래.”
뻥.
다시 날아가는 공을 향해 이젤 하운, 아니, 이젤이 열심히 뛰어간다.
“아무리 봐도 개 같은데.”
“…오마르나 레델리는? 디다와 아놀드도 있고.”
“글렀어, 걔들도. 리더 역할할 깜냥이 안 된다구.”
“나는 뭐 되나요?”
“그래도 네가 군기를 잡아야 한다니깐?”
“거참, 우리나라에서 마티 같은 사람을 뭐라 그러는지 알아요?”
“뭐라 그러는데?”
“꼰대.”
“What? Conte? 감독 말하는 거야?”
“그런 게 있어요.”
꼰대 오염될라.
나는 후다닥 마티에게서 멀어졌다.
* * *
마리오 메넨데즈는 28살이 되도록 오로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새하얀 유니폼만 입고 뛰어왔다.
그런 그가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적어도 재계약 협상 때까지는 그랬다.
아무리 라 파브리카 출신으로 충신이라고 하더라도 명색이 발롱도르 월드 베스트에도 선정되는 월드 클래스 선수인 자신에게 그렇게 박한 대접이라니.
거액의 이적료로 데려온 선수와 비교해서 형편없는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는 걸 안 순간 그는 더 이상 레알 마드리드에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민 건 뉴캐슬 유나이티드였다.
부자구단이지만, 스쿼드만 보면 부자구단이라고 보기 힘든 곳.
챔피언스 리그 단골 진출팀이지만, 우승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곳.
우승이 당연한 곳에 있었던 그가 굳이 가고 싶어할 곳은 아니었다.
그런 그를 움직인 건 유스팀에서 자신을 지도한 최고의 스승, 로쏘 아르텔리가 뉴캐슬의 사령탑이 된 것과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최고의 대우를 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뉴캐슬을 선택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최고의 시설을 자랑했고 로쏘 아르텔리와 그를 따르는 그의 사단으로 구성되어 레알 마드리드와 다름없는 최고의 훈련 시스템을 갖췄다.
무엇보다 뉴캐슬은 모든 선수에게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가족이 있다면 한 명의 경호원과 운전기사를 제공했으며, 선수 관리를 위해 요리사와 개인 트레이닝 코치도 붙여준다.
그리고 매일같이 의료진이 선수의 컨디션을 관리해 준다.
이 정도로 선수 케어를 해주는 곳이 또 있을까?
이런 환경에서 고작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두고 싸우는 게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그 탓인지 몰라도 조금은 선수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이곳의 리더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어리숙한 선수들을 이끌고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한다면?
크으,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우선 미스터 툰이라 불리는 사나이.
당장 오늘 은퇴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는 팀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기침이라도 하면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그가 공을 잡으면 그의 중심으로 뭉쳤다.
그래, 팀의 레전드는 리스펙해야지.
무엇보다 그는 로쏘 아르텔리와 성향이 비슷한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뒤에서 흐뭇하게 선수를 지켜볼 뿐 리더로서 선수를 이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 주장은?
“크르르르… 이놈들! 똑바로 안 해!”
거대한 덩치가 마치 헐크처럼 괴성을 지르며 선수들을 다그친다.
“음.”
저건 아무리 축구를 잘해도 못 건드린다.
게다가 그는 이탈리아 주전 골키퍼였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골키퍼였다.
절대 주먹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의 실력을 리스펙해 줘야 했다.
그럼 팀의 넘버 3 정도로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겠지?
일단 만만한 이젤 저 애부터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둬볼까?
“이봐, 이젤. 패스란 말이야…….”
뭔가 신박한 기술 하나 가르쳐 주고 자신을 따르게 해야지, 하고 다가갔는데 이젤은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공을 들고 냅다 어디론가 달려간다.
공을 가져간 곳에는 팀에서 가장 어린 소년이 있었다.
이제 겨우 16살.
지난 시즌 말미에 팀을 구원한 차세대 스타라든가 뭐라나.
그래 봤자 뉴캐슬의 유망주 아닌가?
그런데 희한할 정도로 이젤은 그 소년을 따랐다.
“저건… 개 아닌가?”
지금 보이는 이젤의 모습은 공을 차면 물어다 바치는 개 그 자체였다.
“둘이 친한가보군.”
그럼 타깃을 바꿔야 하나?
그때였다.
“마티! 뭐하는 거야! 애 그만 데리고 놀고 훈련하게 냅둬!”
리첼라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미스터 툰은 그런 리첼라의 모습에 움찔하면서 눈치를 본다.
천하의 미스터 툰도 리첼라의 무력(?) 앞에서는 한 수 물러주는 모양이다.
“태양, 도망치자. 고릴라가 우릴 죽이려고 해!”
…아닌 모양이다.
리첼라가 제일 싫어하는 고릴라라는 별명을 서슴없이 부르는 걸 보면.
“마티! 이 망할 영감탱이!”
리첼라가 씩식거리면서 마테오 실바에게 달려들려 하자 모두가 질린 표정으로 멀어진다.
“어휴, 또 시작이네.”
“괜히 옆에 있다가 마티 대신 잡혀서 헤드락이라도 당할라.”
“실바가 리첼라랑 이간질시켜서 우릴 괴롭히게 할지도 몰라.”
상황을 보니 두 사람-정확히는 실바-의 장난에 다른 선수들이 걸핏하면 호되게 당하는 모양이다.
선수들끼리 장난은 흔하지만, 장난의 중심이 리더들인지라 말려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모양이다.
장난을 당하는 입장이 아니라, 저 사이에 껴들 수 있는 위치가 돼야 하는데.
메넨데즈가 사실상 쓸모없는 권력욕에 휩싸일 때였다.
두 사람 사이에 팀의 꼬맹이가 끼어든다.
“아니, 두 사람 다 나이 먹고 창피하게 뭐하는 거예요.”
“…저 영감탱이가 놀리잖아.”
“놀린다고 휘둘릴 입장이에요, 리첼라가? 주장이면 주장답게 굴어야지!”
“그래, 이 자식아. 주장이 그렇게 쉽게 흔들려서야, 쯧쯧.”
“그러는 영감이야말로 좀 나이값 좀 하시죠? 당장 지금 은퇴해도 이상할 거 없는 양반이 장난이나 치고 그러면 어째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태양아. 저 양반이 문제라니까. 내가 주장 노릇하기가 저 양반 때문에 힘든 거야.”
“들었죠? 애먼 사람 귀찮게 말고 리첼라나 도와주라구요!”
태양이라 불리는 저 소년은 막내인 주제에 다른 선수들도 피하는 팀의 최고 권력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을 걸고 심지어 잔소리를 하며 우위에 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놈 도대체 뭐야?”
메넨데즈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태양을 바라봤다.
태양이 그의 관찰대상 1호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