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73화
번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단숨에 14위에서 9위까지 순위를 올릴 수 있었다.
반대로 뉴캐슬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은 번리는 17위로 떨어지며 시작부터 기나긴 강등권 싸움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뉴캐슬이 잠시 동안 위기를 겪다가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사이, 프리미어 리그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첼시였다.
4승 1무를 거두며 승점 13으로 앞서간 첼시의 뒤를 4승 1패를 거둔 아스날이 1점 차이로 바짝 쫓고 있었다.
3위는 매 시즌마다 시작이 좋은 레스터 시티가 아스날과 같은 승점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아래 순위로는 단 한 경기만으로 순위가 바뀔 수 있는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최하위권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갖춘 팀인지라 시즌 말미까지 순위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 가운데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기다리고 있는 건 바로 챔피언스 리그였다.
매 시즌마다 경기 규정이 바뀐다는 말이 많았지만, 챔피언스 리그는 교체 선수를 다섯 명으로 두는 것을 제외하곤 십수 년 전과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몇 번 바꿨다가 재미를 못 봐서 다시 돌려놨다가 맞다.
어쨌든, 조별단계부터 시작하는 뉴캐슬은 B조에 속해 있었는데, 같은 조에 속해 있는 팀이 바르셀로나, 밀란, LASK 린츠였다.
빅리그 우승권 팀이 둘이나 같은 조에 속해있는, 이번 시즌 유일무이한 죽음의 조였다.
뉴캐슬의 첫 상대는 바르셀로나.
기나긴 재정난을 겪으며 예전과는 위상이 다르긴 하지만, 프리메라리가에서 독주하는 레알 마드리드를 막아서는 두 팀 중 한 팀이기도 했다.
아무리 이번 시즌 팀을 강화한 뉴캐슬이라 하더라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팀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십수 년 전 과거처럼 절대 못 이기는 그런 팀은 아니었다.
전력면으로만 보면 의외로 해볼 만한데?
이런 생각이 드는 팀이랄까.
“어쩌다가 바르샤가 이렇게 됐을까?”
저녁을 먹으면서 챔피언스 리그 같은 조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나도 바르샤? 그건 들어본 것 같아. 자기가 젊을 때 많이 이야기하던 팀 아냐?”
“그렇지. 메시 한참 뛸 때는 진짜 무적이었는데. 세 얼간이랑 해서.”
세 얼간이는 뭐지.
“나 젊을 때만 해도 레.바.뮌이라고 해서 레알이랑 뮌헨이랑 같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세 팀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레파뮌이잖아요.”
레알, 파리, 뮌헨.
“맨시티도 끼지 않나?”
“챔스 우승이 없어서 안 되죠.”
맨시티는 참 희한한 팀이다.
레알 마드리드가 와도 우승을 장담할 수 없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밥 먹듯이 우승을 하는 팀이 챔피언스 리그만 가면 죽을 쑤니 말이다.
아, 이번 시즌은 리그도 죽 쑤고 있구나.
맨시티는 지금 리그 12위에 있었다. 예전이라면 당연히 1위로 가뿐하게 시즌을 시작했을 팀이 12위까지 내려가다니.
뉴캐슬도 말이 많았지만, 맨시티는 더 말이 많은 상황이었다.
아무튼.
“스페인에 갈 거예요.”
“스페인이라.”
유소년 시절에 레알 마드리드에 갔었을 때 이후 처음인가?
아, 스페인 음식 먹고 싶어지네.
소꼬리 스튜랑 홍합 먹고 싶다.
바르셀로나에는 뭐가 있더라?
아, 먹을 시간도 없겠지.
“그러고 보니 아들, 이번에 챔스 나가면 최연소 출전 기록 아니냐?”
“아마도요?”
누구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맞을 거다.
어린 나이에 프로 선수가 된다는 것부터 대단한 일이지만, 가장 대단한 건 모든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거다.
바르셀로나를 상대하면서 깰 수 있는 기록은 뭐가 있으려나?
물론, 쉽진 않겠지.
바르셀로나가 만만한 팀도 아니고.
저녁을 다 먹고 난 뒤에는 겨울이와 놀아줬다.
가을이는 공부를 하고 있고, 여름이는 잠이 많아서 일찍 잠들거든.
이 시간이 온전히 나와 막내 겨울이의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겨울이는 요즘 그림 그리는 데 재미가 들려 있었다.
우리나라 나이로 이제 8살, 그 나이 치고는 그림을 제법 잘 그렸다.
“아기네. 웬 아기?”
“응, 이건 보미야.”
보미는 우리 엄마 뱃속에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막내였다.
계획을 한 건지 모르겠다만, 보미는 따듯한 봄에 태어날 예정이었다.
이름은 우리 남매 중에 유일하게 없는 계절인 봄, 태명부터 이름을 그대로 부르고 있었는데 이게 은근 발음하다 보니 보미라는 이름이 입에 붙어서 보미로 이름을 짓기로 했다.
“보미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
“동생 생기는 게 그렇게 좋아?”
“응. 막내는 싫어.”
가끔은 막내가 좋을 때도 있는데, 막내인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
“그래, 오빠도 얼른 보미가 나왔으면 좋겠네.”
“응! 보미 나오면 내가 잘해줄 거야! 작은 오빠랑 다르게!”
나는 나이 차이가 좀 있다 보니 가을이랑은 싸울 일이 없고, 가을이가 워낙 차분한 타입이라 여름이와는 싸울 일이 없는데, 여름이와 겨울이는 자라면서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
둘이 성향이 비슷해서 그런가?
아니면 얘들이야말로 남들이 흔히 말하는 찐 남매인가.
“너도 여름이한테 잘해. 네가 자꾸 대들고 싸우면 보미가 너 따라서 너한테 대들걸?”
“징짜?”
“어. 아마도?”
“아냐, 보미는 착해서 안 그럴 거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가 착한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
이름이랑 다르게 엄청난 왈가닥일 수도 있다.
겨울이처럼 말이다.
이름만 보면 겨울이는 겨울처럼 차가울 것 같잖아?
보미라고 안 그러라는 법 없지.
“오빠, 스페인은 언제 가?”
“내일모레.”
“힝… 오빠 보고싶으면 어쩌지?”
…겨울이란 이름과 다르게 애교도 철철 넘쳐 흐르지.
나는 귀여운 셋째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양치하고 잘 시간입니다, 공주님.”
“으엑, 귀차나!”
* * *
캄 노우.
이름 자체가 카탈루냐어로 새로운 경기장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들일 수 있는 곳이었다.
예전 같은 위상을 잃어버리고 우승을 하지 못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캄 노우에는 ‘꾸레’들이 관중석에서 서로의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만석을 이루고 있었다.
원정석에 앉은 소수의 툰을 제외하면 거의 10만에 달하는 꾸레가 부르짖은 응원가는 선수들을 위축되게 만들기 충분했다.
“와, 살 떨려.”
몸을 풀면서 소비올라가 잔뜩 굳은 얼굴로 관중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10만에 육박하는 관중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긴장할 만하지. 그거 아냐? 바르셀로나는 벌서 13년이나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관중이 줄지 않고 있다.”
“그만 거기까지. 샬렛 너는 말이 너무 많아.”
“내가 말이 많다고? 나는 너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그러는 거다.”
“전혀 유익하지 않고 알고 싶지 않으니 그만해. 네가 말이 너무 많으니까 태양이가 너만 보면 피하지.”
“태양은 날 피한 적이 없다.”
얘는 도대체 무슨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걸까?
태양이 자기만 보면 이어폰을 낀다는 걸 모르다니.
말도 많은데 눈치도 없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비올라는 시선을 돌려 태양을 바라봤다.
그는 오늘 모처럼 출전하게 된 마테오 실바와 공을 주고받으며 몸을 풀고 있었다.
그는 전혀 긴장하지 않는 듯 보였다.
“나보다 어린데 어떻게 저러지?”
천재라는 존속들은 원래 다 저러는 걸까?
“난 언제 선발로 쟤랑 뛰어보나.”
16살 꼬맹이인 태양이는 어느새 팀에서 에이스 취급받는데, 벤치나 달구는 자신의 신세가 가련해 보인다.
그래도 뭐, 챔피언스 리그에서 벤치에라도 앉는 게 어디인가.
주전 선수들이 하나같이 만만치 않아서 이것만으로도 영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부럽다.”
태양은 오늘도 선발이었다.
* * *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 B조! 바르셀로나와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경기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오늘의 선발 라인업입니다. 먼저 바르셀로나입니다.]
FW 코르테스/세르게예프/반디
MF 코카/우가르테/페드리
DF 발데/가르시아/엔조/로페즈
GK 발토로메우
[이어서 뉴캐슬입니다.]
FW 일리뉴/윤태양/실바
MF 박스올/메넨데즈/고메즈
DF 반디아/제나스/아놀드/산체즈
GK 리첼라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포지션이 위치가 조금 다르군요?]
[이 포지션만 보면 윤태양이 조금 처진 위치에서 뛸 것 같습니다. 평소의 433이 아니라 4312라고 볼 수도 있겠죠.]
태양은 필드로 나서기 위해 입구에 섰다.
그의 앞에는 등번호 77번 마테오 실바가 선 채로 무릎을 접었다 피며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거, 가만히 좀 있어요, 아저씨.”
“뭐?”
“자꾸 뒤로 무릎을 접으니까 저한테 닿잖아요.”
“아? 그래? 미안.”
이라고 말하면서 실바는 일부러 뒤로 발을 쭉 내밀어 태양의 신가드를 때린다.
“아이고, 진짜네?”
“거참. 노인네 진짜.”
“크헤헤, 야, 안 떨리냐?”
태양은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했다.
“이야, 난 처음 챔피언스 리그 나갈 때 떨리다 못해서 오줌도 찔끔 지렸는데. 그때 첫 상대가 어디였는지 알아?”
“낸들 알아요?”
“쾨벤하운.”
“이야…….”
쾨벤하운은 덴마크 슈퍼리가의 강팀이긴 하지만, 긴장하기에는 너무나도 수준이 낮은 팀이었다.
태양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지만, 실바는 개의치 않았다.
“그때는 그냥 챔피언스 리그라는 거에 쫄아서 그랬지. 그때가 24살이었나? 와, 넌 그때 나보다도 한참 어린데 안 떠냐? 심장이 뭐 강철로 만들었나?”
“글쎄요.”
“그러고 보니 너 오늘 출전하는 게 최연소 출전기록이지?”
“그럴 걸요?”
“흐흐흐, 그 전에 최연소 기록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아냐?”
태양이 고개를 젓자 실바는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바라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수 파티.”
“오.”
안수 파티는 올해 32살로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반열에 오른 선수였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 예전 같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선수이기도 했다.
“안수 파티가 널 보면 무슨 생각을 하려나?”
“글쎄요. 모르죠. 자기 어릴 때 생각하려나?”
“아마도. 아, 그것도 있다. 최연소 득점 기록도 걔가 가지고 있어.”
“그래요?”
실바는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그 자식 아마 분명 챔피언스 리그 최연소 기록 가지고 있는 걸 자부심으로 생각할 텐데, 하나는 이미 깨졌고 오늘 득점기록까지 깨지면 볼만할 것 같지 않냐?”
실실 웃는 실바를 바라보며 태양은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물었다.
“안수 파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고, 내 앞에 노인네가 좋아 죽을 것 같긴 하네요.”
“응? 그 노인네 성격 고약하네. 그런데 왠지 공감되는걸? 흐흐흐.”
“아니, 뭐, 안수 파티랑 원수졌어요?”
그 말에 실바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아니야, 인마.”
“쓰읍… 그래요. 아, 이만 나가요. 나간다.”
태양의 말에 실바는 고개를 돌려 출구로 나섰다.
사실, 실바는 안수 파티에게 유감이 있었다.
홀란드와 음바페라는 두 괴물에 묻혀서 그렇지 안수 파티는 시대를 풍미한 월드 클래스였다.
아주 오래전 바르셀로나와 붙었을 때 실바는 안수 파티를 보고 재능의 벽을 뼈저리게 느꼈다.
과거 리그를 씹어먹던 홀란드는 너무나도 아득하게 높아 보여 감히 비빌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던 안수 파티가 보여줬던 퍼포먼스는 그를 충격에 빠뜨리게 충분했다.
악착같이 뛰어서 그를 막기 위해 슬라이딩 태클을 하는 순간.
자신의 태클을 피하며 비웃음을 머금고 유유히 달려 나가던 안수 파티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뉴캐슬은 단 한 번도 바르셀로나를 이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지.”
복수라면 복수라고 할 만한 오늘의 경기에서 자신이 넘을 수 없던 벽보다 더 높은 벽을 보여줄 친구가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