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90화
입장을 앞두고 펠리시아노는 윤태양을 흘끔 바라봤다.
자신과 같은 등번호 7번을 달고 있는 소년.
소년이라고 하지만, 키는 자기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커보였다.
체격도 거의 비슷하고.
어린 나이에 이미 몸이 완성된 듯하다.
하긴 저런 피지컬이니 성인 무대에서 말도 안 되게 활약하는 거겠지.
저 녀석이… 15골이던가?
고작 두 골 차이밖에 안 난다.
그것도 세 경기나 덜 뛰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거기에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자신이 고작 4골을 넣었는데 이 녀석은 벌써 8골이나 넣고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괴물 같은 놈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윤태양은 자신을 발전시켜 줄 수 있는 최고의 라이벌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이봐.”
“응?”
“잘 해보자고.”
펠리시아노의 말에 태양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사춘기인가?
꽤나 퉁명스러운 친구군.
펠리시아노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 선수들의 입장 시간이 찾아왔다.
필드로 들어서는 순간 관중석에서 태양의 응원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툰아미라 불릴 정도로 열정적인 뉴캐슬 팬들의 응원을 바라보며 펠리시아노는 올드 트래포트가 그리워졌다.
홈구장에서 윤태양을 이겼으면 팬들의 환호성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펠리시아노는 원정 경기에서 상대팀 팬들이 슬퍼하는 표정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승부욕을 제외하면 펠리시아노는 건실하기 그지없는 청년이었다.
순수한 청년 펠리시아노는 모르고 있었다.
건너편 겉과 달리 속은 수십 년 먹은 요괴는 그와 달리 남이 좌절하는 걸 즐기는 악당이라는 걸 말이다.
* * *
경기는 뜨거웠던 열기와 다르게 차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전반 20분이 지나가도록 양 팀 모두 이렇다 할 공격을 하지 않고 상대의 간을 보며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먼저 치러진 경기에서 첼시가 뉴캐슬 전 패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한 건지 몰라도 프레스턴과 무승부를 거두며 제자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오늘 경기 하나로 1위가 바뀔 수도 있다는 거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박싱데이를 고려한다면 1위를 가져가는 건 의미가 크다.
신중하게 대치하던 상황을 바꾼 건 맨유의 에거튼이었다.
산체스가 중원에 가세하기 위해 올라온 틈을 타서 에거튼이 사이드라인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고, 비엥베뉴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에거튼에게 공을 찔러줬다.
공을 받은 에거튼은 텅텅 비어버린 측면을 쭉 타고 올라가다 골대 쪽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상황을 보던 펠리시아노가 아놀드와 제나스 사이를 가르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타이밍에 맞춰서 다가온 공을 향해 펠리시아노가 달리던 그대로 뛰어올라 공을 향해 허리를 뒤로 젖혔다 힘껏 헤딩했다.
힘이 실린 헤딩은 리첼라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들어가며 그대로 골망을 갈랐다.
[골! 골입니다! 역시 펠리시아노!]
[저 높이에 공을 점프해서 헤딩으로 때려넣을 줄이야! 놀라운 피지컬입니다!]
[저게 펠리시아노죠!]
득점한 펠리시아노는 헐크 포즈를 취하며 포효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세리머니였다.
원정석에 맨유 팬들을 향해 세리머니를 한 그는 뒤돌아 태양을 찾았다.
태양은 실점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냐, 그 표정은. 내 득점 따위는 언제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 이거냐?”
사실, 태양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아니, 당연하다 여겼다.
펠리시아노 정도면 오늘 경기에서 득점 하나쯤은 당연히 할 거라 생각했달까?
하지만 툰들의 생각은 달랐다.
팀이 실점하자 행여 선수들이 좌절할까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불렀다.
[역시 툰은 달라도 다르네요. 아미라는 별명이 붙을 만합니다. 선수들이 아니라 홈팬들이 기세를 뺏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자, 어쨌든 상황은 맨 유나이티드가 앞서가고 있습니다.]
재개된 상황에서 뉴캐슬은 신중한 태도를 바꿔서 공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사실, 양 팀은 스타일이 비슷했다.
아쉬운 수비력을 갖춘 대신에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부분 말이다.
이 부분은 상대에게 치명적인 비수를 꽂을 수 있지만, 반대로 상대의 비수에 치명상을 당할 수 있다는 거다.
뉴캐슬의 입장에서는 지난 첼시와 경기와는 양상이 달라진 샘이다.
그걸 몸으로 느끼고 있는 건 오늘 처진 스트라이커가 아닌 최전방에 원톱처럼 움직여야 하는 태양이 가장 많이 느끼고 있었다.
분명 빈약한 센터백을 보완하기 위해 비엥베뉴와 마르셀로가 처진 위치에 있는데도 맨유의 수비 진영은 움직일 때마다 공간이 보였다.
‘이걸 가만히 둘 수는 없잖아?’
태양은 뒤를 돌아봤다.
수비라인이 약하다고 해서 1선 2선이 약한 게 아니어서 그런지 쉽게 공을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공격 원툴인 팀이 뭐 이리 신중하게 굴고 있어?”
행여 공을 뺏겨 실점할까 걱정된 건지 공을 계속 돌리고만 있었다.
“여기야! 여기라고!”
태양은 손을 들어 버럭 소리쳤다.
로씨는 그런 태양을 보고 고민하는 듯하다가 메넨데즈에게 공을 패스했다.
“야! 메니!”
메넨데즈는 공을 받자마자 들려오는 태양의 목소리에 본능처럼 공을 찼다.
그 특유의 대지를 가르는 패스.
목적지는 아까부터 봐왔던 장소.
태양이라면 메넨데즈의 의중을 읽고 쫓아갈 거다.
“저것 봐.”
역시나.
태양은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메넨데즈가 찔러준 공간을 쫓아 달려 나간다.
그전에 상대 선수를 가벼운 상체 무빙으로 속이며 한 명을 미리 벗겨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차지한 공.
하지만 앞에는 맨유의 센터백 세겔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양은 멈추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라 크로케타를 시전한다.
세겔은 뒤로 주춤 물러나며 라 크로케타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태양은 그대로 반대발로 라 크로케타를 한 번 더 시도했다.
양발의 드리블러는 이게 무섭다.
양발로 기술을 쓸 수 있으니 스탭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어느 스탭이든 양발을 모두 써서 드리블 스킬을 구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상대를 맞이하는 게 흔할 리 없는 센터백은 2연속 라 크로케타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겔을 제치자 보이는 건 골대를 향하는 넓은 길이었다.
이녜시오가 부랴부랴 달려오지만, 상관없었다.
워낙 넓어 피해서 달려가면 되니까.
그렇게 이녜시오를 피해 돌아간 태양은 골대를 향해 왼발을 휘둘렀다.
골키퍼 스토일리코비치가 왼발 각을 확인하며 미리 몸을 날렸다.
“Fxck!”
그리고 곧 바로 거친 욕을 뱉었다.
슈팅 페인트였다.
꼼짝없이 속을 수밖에 없는 슈팅 페인트로 골키퍼를 속인 태양은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오른발을 휘둘렀다.
와아아아아아!
불과 7분 만에 경기 양상을 바꾼 태양은 태연하게 공을 들고 하프라인으로 걸어갔다.
펠리시아노는 그 모습을 보고 이를 갈았다.
“내 득점도 모자라 네가 골 넣은 것도 별것 아니라 이거냐?”
득점을 하는 게 별것 아니라니.
당연하게 여긴다니.
오만하다.
오만하기 그지없다.
“골은 소중한 거야.”
골에 미친 펠리시아노는 골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태양을 향해 더욱더 승부욕을 불태웠다.
재개된 경기.
몇 번의 공수가 전환되고 다시 맨유의 찬스가 찾아왔다.
에거튼이 공을 가지고 선수들을 끌어모으고 비어버린 반대쪽으로 공을 보낸 거다.
공을 차지한 브라이언은 공을 가지고 중앙으로 파고들어 달려갔다.
다급하게 뉴캐슬의 진영이 움직이며 브라이언의 길을 막는 사이, 브라이언은 반디아와 아놀드의 사이로 파고들어 골대를 바라봤다.
리첼라가 브라이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브라이언의 다리가 앞을 짚으며 뒷발을 옆으로 휘둘러 라보나로 패스를 보냈다.
부지런히 달려온 펠리시아노가 브라이언이 보낸 패스를 다이렉트로 슈팅했다.
뻑!
간발의 차이로 누군가의 허벅지가 펠리시아노의 강슛을 막아냈다.
허벅지가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서 공을 막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제나스였다.
[아니! 제나스! 이 타이밍에 놀라운 수비를 보여줍니다!]
[제나스가 이걸 막아냅니다!]
제나스가 막아 떠오른 공은 곧 바로 달려온 리첼라가 잡아챘다.
리첼라는 펠리시아노를 지나치며 전방을 향해 킥을 했다.
[뉴캐슬! 리첼라의 킥으로 역습 시작합니다!]
[샬렛이 공 잡고 달립니다!]
[빨라요, 샬렛! 빠릅니다!]
수비수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온 샬렛은 스토일리코비치를 바라보며 슈팅했다.
일직선으로 쭉 뻗어나가는 공.
하지만 스토일리코비치가 긴 팔을 쭉 뻗어 펀칭으로 공을 쳐냈다.
너무 정직한 슈팅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는 그 공을 펀칭하지 말았어야 했다.
예측했다면 한발 앞서서 정면에서 막거나 골대 뒤로 넘겼어야 했다.
골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골대를 향해 달려온 윤태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은 스토일리코비치가 펀칭으로 쳐낸 공을 발리로 슈팅했다.
[골! 윤태양의 멀티골입니다!]
[공을 향한 그의 무시무시한 집중력이 만들어낸 골입니다!]
[역시 윤태양이네요!]
득점한 윤태양은 관중석을 둘러봤다.
수많은 팬들이 그를 바라보며 환호한다.
이어서 태양은 펠리시아노를 바라봤다.
“…이곳의 주인은 너라는 거냐?”
태양이 별다른 표정도 제스처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혼자 넘겨짚은 펠리시아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뉴캐슬의 성주는 저 오만한 어린 왕자다.
“그럼 나는 침략자로군.”
뉴캐슬은 애초에 스코틀랜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성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 곳.
그렇다면 자신은 뉴캐슬을 침략하는 적군의 기사인가?
“크큭, 재미있군.”
“야, 혼자 그만 떠들고 얼른 와.”
지나가던 동료의 말에도 펠리시아노는 크큭,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브라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저 새끼 아니메를 너무 많이 봤어.”
그렇다.
승부욕의 화신이자 건실한 청년인 펠리시아노는 클럽이나 수영장에서 화려한 파티를 하는 것보다는 집에서 OTT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걸로 여가를 즐기는 오타… 아니, 집돌이였다.
태양도 멀찍이서 혼자 똥폼을 잡으며 이상한 웃음을 짓고 있는 펠리시아노를 바라보며 그 사실을 떠올렸다.
펠리시아노는 34살, 말년에 자신이 즐겨보던 애니메이션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 마지막 선수 생활을 한 걸로도 유명했다.
“갑자기 옛 동료가 생각나네.”
항상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언제든지 자기 안에 흑염룡을 뿜어내려던 최지우가 생각났다.
지금쯤 수원에서 잘 하고 있으려나?
“경기 끝나면 연락해 봐야지.”
모처럼 친구를 떠올린 태양은 전광판을 바라봤다.
어느덧 전반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마 경기 재개 휘슬이 불고 2, 3분이면 휘슬이 울리겠지.
그런데 뭔가 찜찜하다.
육감이라거나 예감 같은 걸 그다지 신봉하지 않는 태양이었지만, 이상하게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뭔가 터질 것 같다는 느낌.
그리고 이 느낌은 항상 틀리는 법이 없었다.
휘슬이 울림과 동시에 맨유는 마치 럭비를 하듯 공을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 있는 문티누에게 돌리고 하나 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문티누가 달리다가 브라이언에게 패스하고, 브라이언이 펠리시아노에게 공을 보낸다.
공을 받은 펠리시아노는 로씨를 제치고 그대로 직진하다가 길을 막는 아놀드를 피해 횡으로 달리다 골대를 향해 공을 감아찼다.
마치 리베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슈팅은 아놀드로 인해 시야가 가려진 리첼라가 반응하기도 전에 골망을 갈랐다.
경기 종료 전에 생각지도 못한 동점골과 함께 원점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태양은 선 채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것 봐. 느낌이 이상했다니까.”
아무래도 후반전은 더 빡세게 뛰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