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100화
‘윈드’는 모 대기업에서 런칭한 의류 브랜드였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아니지만, 10대, 20대를 노리는 개성적인 옷을 모토로 삼은 그들은 빠르게 젊은 세대를 공략하고 있었다.
모 기업 회장의 손녀이자 윈드의 사장은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
입소문을 타면서 그녀의 브랜드를 입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아직은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더 많이 알려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홍보를 해야했다.
의류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델을 내세워야 했고, 그녀를 포함한 마케팅 팀, 디자이너 팀 모두가 나서서 윈드와 어울리는 사람을 찾았다.
연예인부터 모델, 일반인까지.
하지만, 그녀의 눈에 차는 사람이 없었다.
윈드는 10대, 20대 젊은 층을 위한 옷이었다.
하나같이 개성적이고 다채로운 그들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그때였다.
새벽까지 밀린 일을 하고서 우연히 인터넷 뉴스를 봤을 때.
그녀는 보고야 말았다.
윤태양을.
“쟤야.”
그녀는 사진 너머 그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그리 말했다.
그리고 홀린 듯 태양의 모든 것을 찾아 헤맸다.
“이 남자야.”
그녀는 확신했다.
윤태양은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사춘기 소년처럼 적극적이지 않고 시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해야할 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는 열정적으로 불타오른다.
그렇게 뜨겁게 타오르다가도 다시 골을 넣으면 시큰둥해지는 모습은 묘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외모는 어떤가.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으면서, 경기를 뛰며 땀을 흘리는 그 모습은 섹시하기까지 하다.
어디 여성에게만 어필되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는 한국 축구 역사상, 아니, 어쩌면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천재적인 재능에 남자들은 열광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는 10대, 20대에게 남녀를 초월해 동경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그 재능과 반듯한 외모, 그리고 알려진 가정환경으로 인해 부모님 세대에게도 긍정적인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었다.
이런 치트키 같은 모델이 또 어디 있는가.
“그에게 맞는 조건에 조금 더 얹어서 그를 잡으세요.”
그녀의 지시에 따라 그와 접촉해 전속모델로 계약하게 된 뒤, 그의 윈터 브레이크 휴식에 맞춰 윈드에서 고용한 광고 기획사가 홍보팀과 함께 영국으로 향하게 됐다.
* * *
최악이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촤라라라락.
연속으로 셔터가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도저도 못하고 가만히 셔터를 응시하는데 사진을 찍던 사진작가가 멈칫한다.
“저기, 태양 씨?”
“네?”
“좀 더 자연스럽게 있어주시겠어요? 그렇게 정자세로 경직되는 건 좀…….”
응, 그런가.
나 지금 경직되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진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굳어 있었네.
“그… 사진 촬영이 쉬운 건 아니네요.”
“처음이니까요. 카메라를 의식하지 말고 평소 모습 그대로 있어주면 됩니다.”
그게 쉬웠으면 벌써 촬영이 끝났겠지.
이런 식으로 두 시간째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스튜디오 한켠에는 옷이 잔뜩 걸려있었는데, 내가 입은 옷이 이제 겨우 두 벌째였다.
내가 암담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다시 렌즈를 들이밀던 작가가 멈칫하고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스탭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시킨다.
뭘까?
축구공이었다.
“축구 선수들이 촬영하는 걸 어려워할 때 이걸 드리면 자연스러워지더라구요.”
그의 말대로였다.
공이 발아래 있으니까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됐다.
공을 따라 움직이는 나를 작가는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사진을 단 하나의 컷으로 끝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셔터가 수십, 수백 번 움직이고 그중에 괜찮은 한 장을 쓰는 거더라고.
“한 번 보실래요?”
감독은 한 의상의 촬영을 끝낼 때마다 나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음…….”
셔터 너머에는 낯선 내가 있었다.
화장까지 하고 평소 입지 않는 옷을 입어서 그런 모양이다.
“어떠세요?”
“오글거리는데요?”
“하하하.”
작가는 그저 웃었다.
“왜요?”
“아마 이 사진들이 광고로 잡지 같은 곳에 게재되면 난리가 날 겁니다.”
“네? 에이, 설마요.”
“요즘도 이런 말을 쓰나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러고 보니 그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에이, 설마.
내가 뭐 된다고.
아, 조금은 되긴 하네.
팬카페 회원도 많고 팔로워도 많고.
아무튼, 지루한 사진 촬영이 끝나고 이제 좀 쉬어볼까 싶었지만, 4일에 걸쳐서 다른 광고도 찍어야 했다.
패션에 이어서 축구게임 광고, 화장품 광고까지 말이다.
내 황금 같은 윈터 브레이크가 무려 4일이나 지났다.
첫날 동생들이랑 놀아준 것까지 포함하면 무려 5일.
이제 9일밖에 못 쉬네.
아니지, 훈련 합류까지 생각하면 6일이다.
6일 동안 뭐하지.
“여행이라도 갈까?”
하지만 쉽지 않았다.
영국은 우리나라랑 제도가 완전히 달라서 설명하기 복잡한데, 일단 지금 학기 중이라는 거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현장체험학습이라는 게 있지만, 영국은 그런 게 없다.
정해진 수업을 다 들어야 한다는 거다.
다 그런지는 나도 제대로 안 다녀서 모르겠고, 적어도 사립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은 그렇다.
나 혼자 가기엔 너무 어리고, 할아버지 두 분을 모시고 가기에는 뭐랄까… 휴식이 아니라 효도관광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역시 최고의 휴식은 방콕이지.”
아침에 일어나서 가볍게 조깅을 하고 애들이 학교 가는 걸 배웅해 주고 난 뒤 종일 컴퓨터 게임을 했다.
어린 몸이란 참 대단하다.
지난 삶에서는 늙어서 게임에 재미를 들린 탓에 열심히 해도 오르지 않던 실력이 어린 몸으로 하니까 쭉쭉 늘어난다.
그만큼 랭크도 올라가 단숨에 플래티넘까지 오를 수 있었다.
와… 만년 골딱이가 플래라니.
이 정도라면 좀만 더 하면 다이아도 가능할 거 같은데? …는 얼어죽을.
하마터면 다시 골딱이가 될 뻔했다.
“롤 말고 축구 게임이나 해볼까.”
광고촬영 기념으로 카드도 많이 줬는데 그거 가지고 팀 꾸려서 게임이나 해봐야지.
“와… 아무리 국뽕이라지만, 내 카드 너무 사기 아니냐.”
내가 게임 속에 나를 플레이한다.
축구 게임도 몇 번 해본 적이 있어서 실력이 금방 늘었는데, 아니, 늘은 건가?
이거 내 카드 빨인 거 같은데.
그 가운데 한 녀석이 계속 나에게 도전해 온다.
첫판에 4대0으로 지더니 재대결을 몇 번이나 요청하네.
어느덧 여덟 번째.
이번에는 8대0으로 이겼다.
상대편은 맨시티로 팀을 맞췄는데, 하필이면 8대0이라니.
다른 점이라면 게임 속에 나는 6골이 아니라 8골을 모두 혼자 넣었다는 거지만, 아무튼, 그렇게 이기고 있으니 상대편이 채팅을 쳤다.
-ㅅㅂ 현질 ㅈㄴ 하네 ㄱㅅㄲ 개사기 카드로 이기니까 좋냐?
-이기면 좋지
-에이 더러운 ㅅㄲ 퉤 뒤져라 쓰레기 같은 ㅅㅋ야
그래, 여덟 번이 넘게 지면 화가 날 법도 하지.
무시하고 다른 사람과 매칭을 잡았다.
-에이 현질 개 쓰레기 ㅅㅋ
…또 다른 사람.
-좋겠다 돈 많아서 현질 쓰레기 놈아
“안 해.”
현질한 것도 죄인가.
졌다고 욕 드럽게 많이 하네.
“게임도 질린다.”
가만히 누워있으니 메시지가 왔다.
“누구지?”
샬렛이었다.
-태양, 같이 낚시하러 갈래?
“낚시?”
생각해 보니 예전에는 낚시도 종종 했었지.
어릴 때는 천렵이나 낚시를 참 많이 했다.
그때는 그런 거 아니면 할 게 없었거든.
솔직히 고아원에 컴퓨터가 있어 뭐 있어? 원장님이 낚시를 좋아해서 낚싯대가 많았기에 동네 저수지에서 많이 했던 거 같다.
오랜만에 낚시 한 번 해볼까?
-간다. 몇 시?
-오후 5시. 낚시하고 일식집에서 초밥 먹는 코스.
뭐지 왠지 뜬금없는데 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은 조합은?
“엄마, 애들이랑 낚시하고 올게요!”
“그래, 재미있게 놀다오렴!”
나갈 준비를 하고 엄마에게 말하고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시티센터를 지나 타인강 너머에 도착했다.
낚시 센터가 있었다.
요 동네에 이런 것도 있구나 싶어 둘러보는데 샬렛과 린데만, 그리고 일리뉴가 보였다.
“여어!”
“뭐야, 많이도 모였네.”
“낚시는 혼자 하면 재미없잖아. 내가 다 부르라고 했지.”
그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소비올라가 있었다.
“저기로 가면 낚시터가 있대.”
그는 낚싯대와 미끼 같은 것들을 빌려온 거였다.
아무튼, 우리 다섯 명은 낚시터에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런데 여기 물고기가 잡히긴 하냐?”
내 물음에 소비올라가 말했다.
“물고기가 잡히니까 낚시터가 있는 거 아니겠냐?”
“그건 그러네.”
잔잔한 강가에 둥실둥실 떠오르는 루어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건 이거대로 힐링인가.
“물고기, 왜 안 잡혀?”
적어도 한 놈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낚싯대를 드리운 지 30분도 안 됐는데 일리뉴가 좀이 쑤신다는 듯 말했다.
앞으로 이런 건 이 녀석이랑 하면 안 되겠… 응?
“오.”
입질이 왔다.
냉큼 낚싯대를 들어 올리니 붕어가 한 마리 잡혔다.
영국에도 붕어가 잡히는구나.
“에이, 붕어네. 버려.”
영국에서는 붕어를 안 먹나보다.
이거 요리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잘 해먹으면 괜찮은 생선인데.
아, 그 정도 조리법이 있었으면 장어젤리 같은 게 생길 리가 없지.
깜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거 먹어.”
잡아서 할아버지한테 보여드리면 좋아하겠다.
생각해 보니 친할아버지가 낚시를 좋아했던 것 같다. 영국 와서 낚시하는 걸 못 봤다.
다음에는 할아버지랑 같이 와야겠네.
“그건 그거고…….”
나는 붕어를 한 손에 들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어 셀카를 찍었다.
@CHOOKTAEYANG
[(사진) 붕어를 들고 셀카]
[동료들과 함께 낚시 옴
#윈터브레이크#힐링#낚시]
* * *
꿀 같은 윈터 브레이크가 끝났다.
선수들은 훈련에 복귀했다.
훈련장에는 새로운 친구가 와있었다.
취업비자를 발급받고 이제 막 입성한 브라질산 수비수 무리시였다.
23살 무리시를 가장 반긴 건 디다였다.
같은 포지션이어서 경쟁심을 느끼고 견제할 법도 하지만, 디다는 자신이 은퇴가 임박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온 무리시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 정도로 느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리시는 전성기의 디다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발이 빠르고 공격적인 성향의 수비수인 점이 비슷했다.
아니, 가만히 보면 시야가 넓고 타이밍을 잘 잡아 가로채는 걸 보면 아놀드와도 비슷해 보였다.
디다는 아놀드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우리 둘의 아이야, 아놀드.”
“닥쳐, 미친놈아.”
졸지에 자신을 게이로 만들 뻔한 디다의 머리를 때리고 아놀드는 웃으며 무리시를 반겼다.
왠지 무리시는 아놀드와 악수를 하면서도 몸을 사리는 것 같았다.
“오! 얘가 무리시인가?”
무리시는 자신이 지켜줘야 할 골키퍼도 만났다.
TV에서나 보던 이탈리아의 수호신이 눈앞에 있어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마치 한 마리 고릴라와 같았다.
악수를 하는데 손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하하하, 보기보단 약한 친구네.”
리첼라는 껄껄 웃으며 무리시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깨가 떨어질 것처럼 아팠다.
“여긴 뭔가 좀 이상해.”
무리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라커룸 안 자기 자리에 어색하게 앉았다.
그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망할 노인네. 내 바나나 어디다 숨겼어요? 요즘 뭘 자꾸 숨겨요. 관심이 필요한 나이도 아닌데?”
“낄낄낄, 찾아봐라. 그곳에 내 모든 바나나를 숨겨두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대화인가 저게.
아무래도 여긴 진짜 이상한 친구들이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