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114화
감독의 말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네덜란드는 몰라도 덴마크도 이기기 힘들다고?
그건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다.
비록 상대 전적은 1무 1패로 뒤쳐지긴 하지만, 지금의 덴마크는 특별히 내세울 선수가 없는 팀 아닌가?
그리고 사실 네덜란드도 마찬가지다.
언젯적 오렌지 구단인가?
무엇보다 이번에 붙게 될 네덜란드 팀은 1군으로 분류되는 핵심 선수가 대부분 빠진 상태로 국내파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내심 어려운 상대지만,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의 말은 전혀 달랐다.
이길 수 없다니?
왜?
“월드컵처럼 안일한 너희라면 절대 덴마크도 이길 수 없다. 선수들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팀 자체의 문제지.”
감독의 말에 선수들은 서로를 둘러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는 대부분 월드컵 경험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난 2034년 월드컵의 처참한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역습 같지 않은 역습, 앞으로 가지 못하는 빌드업, 막지 못하는 수비, 아무 의미 없는 전술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몇 선수들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선수들도 바보가 아니고 보는 눈이 있다. 지난 월드컵에 그 의미 없는 전술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었다.
“최영범 그 개새끼…….”
그중에 한 명은 작은 목소리로 지난 월드컵의 감독을 욕하기도 했다.
뭔가 있는 척 폼은 다 잡지만,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력 그 자체인 감독이었다.
“그때와는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고. 덴마크와 네덜란드와 경기가 있기 전까지 우리는 전술에 집중한다.”
감독은 그리 말하고 선수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그와 별개로 나는 너희들의 잠재력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 팀의 감독이 된 거기도 하고. 부디 내 기대에 부응해 주길 바란다.”
감독은 그리 말하고 일일이 선수들 한 명, 한 명 악수를 나눴다.
* * *
회의가 끝나고 숙소를 배정받아 캐리어를 챙겨서 걸어갔다.
아, 누구랑 같이 쓰는 거지?
박민규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나름대로 떨리는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린다.
뒤를 돌아보니 한 사내가 나를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네가 내 룸메이트구나.”
새하얀 이가 가지런히 드러나는 사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조동호였다.
사우디아라비아 프로페셔널 리그 알 샤바브에서 현재 15경기 10골을 기록하며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는 선수였다.
지난 삶에서는 내가 28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같이 뛰어본 적은 없었다.
그저 TV 너머에서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해 뛰는 그의 모습을 봤을 뿐이다.
“안녕하세요.”
“응, 그래. 들어가자, 들어가.”
그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호텔은 호텔답게 정갈했다.
그는 두 개의 침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너 어느 쪽이 편하냐?”
글쎄?
“저는 아무 곳이나 괜찮아요.”
“그래? 그럼 내가 창가 쪽 침대를 쓸게.”
“네.”
“그래, 그래. 아, 올해… 17살? 고1?”
“고2요.”
“아, 맞다. 한국식으로 하면 18살이구나. 이야, 내가 고딩이랑 같이 축구를 할 줄이야.”
“하하…….”
지영수 라인이 꽉 잡고 있을 시기에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뭐, 나는 인정. 프리미어 리그에서 그런 짓을 하는데 국대 안 오면 축협이나 감독이나 미친놈이지.”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까지야. 나야말로 감사하다. 너 하는 거 보고 내가 다 짜릿했다니까. 국뽕이 이런 건가 했지.”
처음으로 직접 만난 조동호는 말이 많은 것 같지만, 사람은 좋아보였다.
하긴, 예전에 뉴스 기사 같은 걸 보면 누구랑도 잘 어울리는 인싸기질이 보이긴 했었지.
“오늘은 그냥 휴식인 거 알지? 편하게 침대서 쉬든가 가볍게 운동을 하든가 아니면 잠깐 외출도 괜찮다고 하더라.”
음….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으니 뒹굴거려 볼까?
그리 생각하는데 조동호가 말했다.
“나는 다른 방에 좀 갔다오려고. 넌 뭐할래?”
“전 침대에서 쉬겠습니다.”
“그래, 그래.”
조동호가 나가고 나서 나는 셀카를 찍어 SNS에다가 올렸다.
@CHOOLTAEYANG
[(사진)누워서 찍은 셀카]
[국대 합류. 잘하고 오겠습니다.]
* * *
다음 날 이른 시간에 조동호와 함께 훈련장으로 나왔다.
훈련장에는 벌써 몇몇 선수들이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조동호는 그런 그들을 보며 말했다.
“대부분 성격이 모난 구석 없어. 선배라고 꼰대질하는 새끼들도 없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네, 걱정 안 해요.”
“하긴, 누가 미쳤다고 너한테 선배라고 갑질하겠냐. 아.”
하긴, 지금 입지를 생각하면 누가 함부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갑질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누가 미쳤다고 프리미어리거를 건드린단 말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은 조심해.”
“누구… 아.”
조동호가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박민규였다.
이미 박민규가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걸 팀 내부에서는 알고 있었나?
“아? 너도 뭔가 눈치챘냐? 다들 모르던데. 저 사람이 하는 거 보면 뭔가 이상해. 저 형이랑은 충돌할 생각하지 마.”
그래,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닌데 그걸 느낀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다는 게 말도 안 되지.
“네, 조심할게요.”
굳이 상관없을 거 같다만, 여기서 말이 길어지면 피곤하니까.
그나저나 잠깐.
“니가 왜 여기 있누?”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는 괜히 머쓱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왜, 뭐, 인마. 내가 못 올 데 왔냐?”
“아니, 명단에 없었는디?”
내 앞에 있는 건 배상현이었다.
올해 한국나이로 스무 살, 올해 들어서 수비 구멍이 생긴 아인트라흐트에서 급하게 콜업하며 1군에 합류한 상태였다.
실력만 보면 다음 월드컵을 고려해 합류할 만하지만, 중요한 건 이번 명단에 없었단 말이지.
“김주성 선배님이 부상으로 못 와서 대신 합류했어.”
“오, 땜빵?”
“말을 해도 새끼…….”
“땜빵을 땜빵이라 하지 뭐라 하냐.”
“어휴, 그래, 잘났다. 잘난 새끼.”
“내가 좀 잘났지.”
“겸손 좀 배워라.”
“넌 축구 좀 배워.”
“내가 살다 살다 나보다 어린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원래 인생은 모르는 법이지.”
나도 내가 우리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아질 줄은 몰랐어.
“이야, 어린 친구 둘이 떠드느라 바쁘네?”
배상현이란 티격태격하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뭐야?
스탭인가?
옷을 보면 아닌 거 같은데 처음 보는 선수가 아니꼬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그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뭐야, 이 새끼는 선배를 보면 인사를 해야지. 인사 안 해?”
대충 봐도 배상현이랑 또래로 보이는데.
“저기… 누구?”
내가 의아한 얼굴로 누구냐고 묻자 놈의 얼굴이 붉어진다.
부끄러워하는 건 아닐 테고, 화가 나나보다.
“뭐? 누구?”
“누구냐고 묻잖아. 뭐 얼굴을 알아야 선배 대접을 하든지 하지.”
“이 새끼가 미쳤나,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그 말에 배상현은 가만히 바라보다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아, 나 얘 알아. 유정원. 서울에서 뛰는 애야.”
“아, 그래?”
그 말에 놈, 유정원이 끼어들었다.
“야, 나 서울이라고, 서울. 네 선배라고. 인사 안 하냐?”
“그래, 내가 서울 유스에 있긴 했지. 님도 서울 유스에서 뜀?”
“…그건 아니지만.”
“근데 뭘 선배야, 미쳤나 이게.”
유정원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나이로 봐도 당연히 내가 선배 아니냐?”
“야, 그만해. 뭘 나이까지 들고 와. 너 나랑 동갑이잖아?”
유정원의 앞을 배상현이 막아서고 말했다.
유정원은 그런 배상현도 아니꼽다는 듯 말했다.
“나 빠른이야, 새꺄! 너보다 한 학년 선배라고!”
“학교를 빨리 갔나보네. 그래서 너 몇 월 생인데?”
“1월.”
“며칠?”
“28일이다.”
“씨벌놈아 난 1월 1일이야, 어디서 선배 타령이야. 나보다 27일이나 밥을 덜 처먹은 새끼가.”
오우, 좀처럼 거친 욕을 안 하는 배상현의 입에서 욕이 나온다.
나올 만해.
“뭐야, 둘이 친구네. 그럼 나 하고도 친구잖아. 무슨 선배 취급을 받으려고 하는 거야?”
“친구?”
“어, 나 얘랑 친구야.”
배상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정원은 어이없음과 당황, 분노, 황당 등등 온갖 감정이 섞인 얼굴로 나와 배상현을 바라봤다.
나는 그런 유정원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난 내 또래에다가 나보다 축구 못하면 형 대접 안 해줘. 분데스리가 밑으로는 사람 취급도 안 해. 같은 국대니까 말이라도 섞는 줄 알아, 친구야.”
물론, 나이 많은 사람이랑 맞먹으려드는 건 사실이지만, 실력으로 급을 나누진 않는다.
나한테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왜, 뭐, 꼽아? 꼽으면 프리미어리거 하든가.”
하지만,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소속팀이 완장과도 같은 곳이 국대다.
정확히는 소속팀을 결정지은 실력이 완장이란 소리지.
아무리 친하게 화목하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실력 있는 놈 중심으로 뭉치게 되고, 실력 있는 사람이 발언권이 더 큰 법이다.
내가 그러기엔 너무 어리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그 가운데 드디어 훈련이 시작된다.
* * *
“좋군.”
이비카 마르코비치는 태양의 움직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을 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기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볍게 공을 다루는데 그것만으로도 태양의 클래스가 느껴진다.
태양은 이 팀의 루카 모드리치 같은 존재가 될 거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생각 외로 이 팀에는 잠재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많다.
박민규는 그가 선호하지 않는 타입이지만, 분명 이 팀에 또 하나의 플랜이 되어줄 거고, 그 외에도 공격진은 합격점을 줄 만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조동호를 제외하고 하나같이 이타적인 선수이지 득점을 책임질 선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거야 뭐, 윤태양이 있으니까.
공격은 어떻게든 된다.
그가 마지막으로 주목한 점, 사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수비였다.
영상을 통해 봤을 때 놀라울 정도의 선방 능력을 지닌 골키퍼 신호성과 그 앞을 지킬 유성재와 박동근은 당장 유럽에서 뛰어도 될 수준이었다.
대한민국 특유의 멀티플레이어 능력을 탑재한 풀백도 준수하다.
이것을 미루어 보아 이 팀은 가능성이 있다.
좋은 감독과 함께 긴 시간 팀워크를 잘 갈고닦는다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낼 가능성이 보였다.
물론, 좋은 감독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감독님. 덴마크를 못 이긴다는 건 진심으로 한 소리인가요?”
한참 선수들을 살피고 있는데, 한국 대표팀 취임 이후 항상 자신의 곁에 붙어있는 통역가가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감독은 그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쉽지 않소. 선수들의 수준과 달리 대표팀 자체적인 조직력은 2034년 최악의 감독이 만들어놓은 그대로이니까.”
“그렇군요.”
“물론, 윤태양이 빠진다는 가정 하에 말이오.”
이비카는 다시 한번 윤태양을 바라봤다.
그가 윤태양을 처음 본 경기는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여섯 골을 넣을 때였다.
그때 그 충격은 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