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127화
“다들 PSG 놈들이 우리 동네에 들어온 거 알고 있나?”
피터의 펍으로 들어선 한 사내가 펍 안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그는 당당하게 PSG 유니폼을 꺼내 들어올리며 말했다.
“가서 그라디나루와 칠리기리스의 싸인을 받아왔지! 어때? 대단하지 않나?”
그가 싸인을 자랑하기 무섭게 펍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야유와 함께 먹던 안주를 그에게 던졌다.
“아이씨! 왜 그래, 이 자식들아!”
“저 미친놈이 상대팀 싸인을 자랑하고 있네.”
“넌 이 새끼야 펍에 올 생각 하지 마라!”
“펍이 뭐야, 너 우리 가게 오면 뒤질 줄 알아라!”
“너 혹시 니 마누라한테도 유니폼 자랑했냐? 니 마누라한테 싸대기 맞기 싫으면 그거 태워 버려라!”
사람들의 엄청난 야유에 그는 슬그머니 유니폼을 내려놓았다.
“아니, 그… 싸인 좀 받을 수 있지! 이런 애들이 우리 동네 오는 게 흔한 줄 알아?!”
“흔한 곳으로 꺼져 이 새끼야! 툰의 수치 같은 새끼!”
다시 쏟아지는 야유, 그것도 모자라 피터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는 사색이 되어 펍을 나가려 들었다.
그때 펍 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얘들아! 이것 봐라! 태양이가 나한테 낚싯대 줬다! 그것도 싸인해서!”
그 말이 무섭게 펍 안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태양이한테 낚싯대를 받았다고?”
“아니, 태양이가 싸인은 잘해줘도 뭐 주는 성격이 아닌데?”
그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평소 태양은 싸인은 아낌없이 하는 편이지만, 자신의 물건, 예를 들면 신던 축구화나 유니폼을 팬에게 주는 일이 드물었다.
처음에는 이에 대해서 말이 나왔지만, 태양이 그런 물건들을 할아버지나 가족들에게 주고 싶은 사람 주라며 나눠준다는 걸 알고 난 뒤에는 특별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랜 툰인 그들은 태양이 누구보다 가족을 끔찍하게 여기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사내는 승리자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낚싯대를 보여주며 말했다.
“태양이가 우리 낚시가게 단골이라는 걸 몰랐나보지? 요번에 실한 지렁이를 한가득 구해줬더니 고맙다고 주더라고.”
“아니, 낚시가 취미야? 어디서 한데? 가서 같이 낚시 좀 해야겠네!”
“자기 집에서 한다던데? 집에 연못이 꽤 큰가봐. 아, 그거 아나? 영감님들이 같이 낚시하자고 집으로 초대했다고!”
“오오오!”
“이건 영감님들 심복인 피터도 못해본 일일걸? 그지?”
낚시가게 아저씨의 물음에 PSG 유니폼을 휘날리던 친구를 내쫓고 들어오던 피터가 훗, 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모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피터를 바라봤다.
“뭐야, 그 승리자 같은 웃음은?”
“난 이미 몇 번이나 초대받았지.”
그 말에 모두가 부럽다는 얼굴로 피터를 바라봤다.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우리 할머니한테 브라운 에일 만드는 법이나 배울 걸.”
“네 할머니 브라운 에일은 생강을 넣어서 맛없다고 하지 않았냐?”
“에이씨! 아무튼, 부럽다!”
펍 안의 사람들은 부러운 얼굴로 피터와 낚시가게 아저씨를 바라봤다.
“피터, 이제 그만 스크린이나 내리라고! 경기 시작하겠다!”
“그래야지.”
잠시 떠들썩하던 사람들은 이내 피터가 스크린을 내리자 모두 그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잠시 후 뉴캐슬과 PSG의 경기 생중계가 스크린을 통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일제히 태양의 응원가 프린스 태양을 부르짖었다.
경기장 티켓을 구하지 못한 툰들의 흔한 일상이었다.
* * *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의 날이 밝았습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파리 생제르맹의 대결입니다. 지난 경기에서는 파리의 홈에서 2대2 무승부로 끝났죠?]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뉴캐슬에게 유리한 상황입니다만, PSG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홈경기보다 오히려 원정경기에서 강한 팀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양 팀 모두에게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거란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오늘의 선발 라인업부터 보고 가실까요? 우선 홈팀인 뉴캐슬 유나이티드입니다.]
뉴캐슬
FW 샬렛/윤태양/일리뉴
MF 실바/메넨데즈/고메즈
DF 린데만/무리시/아놀드/산체스
GK 리첼라
PSG
FW 그라디나루/칠리기리스
MF 카싸마
주드/알비론
DF 멘데스/알론소/욘베리/달리왈
GK 란돌
[이상입니다. 뉴캐슬은 독감에 걸린 메넨데즈가 복귀하며 중원의 무게감이 돌아온 느낌입니다만, PSG는 주전인 마옐레와 왈모르, 돈나룸마가 부상으로 빠지게 됐습니다.]
[세 선수 모두 PSG의 핵심 선수인 것 맞습니다만, 오늘 출전한 알비론과 욘베리, 란돌도 대단한 선수들입니다.]
-맞지맞지
-솔직히 돈만 보고 들어와 후보로 만족하는 비응신들 아님?
-ㄹㅇ ㅋㅋㅋㅋ
-태양이로 유입된 축팬인데 쟤들 그냥 후보 아님?
-알비론=맨시티, 욘베리=뮌헨, 란돌=리버풀 주전이었음 ㅋㅋ
-맨시티 뮌헨 리버풀 ㄷㄷ 쩌네
-ㅋㅋㅋㅋ 반대로 PSG는 천억 넘게 주고 영입해서 후보로 썩히고 있음 ㅋㅋㅋㅋ
-ㅋㅋㅋ PSG 낭비 쩌네
후보로 뛰는 선수들조차 퀄리티가 빅클럽 주전 선수급인 PSG를 상대로 아르텔리는 선수들에게 절대 방심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선수들도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PSG는 유난히 원정 경기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홈에서 패배하고 원정 경기에서 대승을 거두며 상위 라운드로 진출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게 어떤 팀이든 말이다.
오죽하면 원정의 악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일까.
-원정의 악마? ㅋㅋㅋ 뉴캐슬에는 축태양이 있다ㅋㅋㅋ
-축태양은 홈에서도 쩔지 ㅋ
-원래 홈에서 빼앗는 게 짜릿한 거지
-4강은 축태양 껍니다 ㅎㅎㅎ
-오늘은 안 웃어주나 세자 저하? ㅠㅠㅠㅠ
-웃어주는 거 찍어줘요 카메라 아죠씨 ㅠㅠㅠ
카메라가 태양을 비추긴 했지만, 태양은 웃어주지 않았다.
경건한 수도승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크게 심호흡하고는 가볍게 발목을 풀었다.
-경기 입장 전에 몸 푸는 모습 완전 프로 같아 ㅠㅠㅠㅠㅠ
-일하는 세자저하 모습도 멋지네요 ㅠㅠㅠㅠ
-내 꺼 하자 ㅠㅠㅠㅠ
-아… 궁년들 라이브 중계 채팅창에도 기웃거리는 거 짜증 나네
-심지어 화력도 밀림
-축덕들 뭐하냐 채팅창에서 궁녀들밖에 안 보인다!!
-망할 궁년들
-세자 저하ㅠㅠㅠㅠㅠㅠ
-날 가져요ㅠㅠㅠㅠㅠ
-경기 시작한다!
-우리 세자저하만 보여주면 안 되나? ㅠ 전용 카메라 준비해서 세자 저하만 앵글 잡아줬음 조케따 ㅠㅠㅠㅠ
-근데 우리 세자 저하 한국 사람 아냐? 왜 잉글랜드? 에서 뛰는 거야?
-궁녀궁녀야…….
-아 언제부터 축구판이 여초가 된 거냐 말세다 말세
PSG 선수들은 원정 경기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마치 이곳이 자신들의 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수다를 떨고 웃으며 가볍게 몸을 푼다.
반대로 뉴캐슬 선수들은 하나같이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랄까.
뉴캐슬 선수들 중에 여유로워 보이는 건 세 사람밖에 없었다.
리첼라와 실바, 그리고 태양이었다.
심지어 실바는 태양의 뒤에 가서 태양의 무릎 오금에 자신의 무릎을 들이대 굽히게 하는 장난까지 쳤다.
“아, 거참… 노인네 진짜.”
“후후후. 네놈 무릎이 하도 튼튼해서 실험해 봤는데 이런 장난에 넘어가는 걸 보면 너도 사람이었군?”
“오금이랑 무릎이 튼튼한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흐흐흐흐.”
“어휴, 철 좀 드세요, 철 좀.”
“철이 들었다가도 아이들이랑 같이 있다보면 다시 내려놓게 되지. 너도 언젠가 느낄걸?”
“지금은 그걸 느낄 때가 아니거든요.”
두 사람이 투닥거리고 있을 때 문득 일리뉴가 말했다.
“나도 느낄 것 같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리뉴를 향한다. 두 사람 뒤에서 멀대같이 서있던 일리뉴는 평소 바보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뭐야?”
“뭔 소리여?”
두 사람의 물음에 일리뉴는 두 사람을 또렷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 아빠가 됐다.”
“…갑자기?”
태양과 실바가 놀란 얼굴로 일리뉴를 바라봤다.
“여자친구, 임신했다.”
두 사람은 더욱더 놀랐다.
“여자친구가…….”
“있었어?!”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다.
그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뉴캐슬 선수단이 술렁였다.
“아니, 여자친구를 언제 만든 건데?”
“영어도 못하는 놈이 도대체 언제?”
“아니, 그보다 데이트 하는 걸 못 봤는데?”
뉴캐슬어폰타인은 굉장히 좁다.
물론, 아무리 좁아도 인구 수십만이 사는 동네이니 무시할 순 없지만, 적어도 뉴캐슬 선수들이 뭘 하는지는 작정하고 알아내면 모를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인스타에서든 뉴캐슬 팬포럼에든 어디서 이 선수가 뭘 했다, 라고 올리는 놈들이 꼭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의 연애사이지 않은가? 남의 연애사를 좋아하는 건 만국 공통이었다.
누가 어떤 여자랑 같이 길을 가더라, 라는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상대는 일리뉴.
둔하디 둔한 일리뉴가 뉴캐슬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비밀 연애를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여자친구… 영어 못한다… 영어 싫어서 안 나온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우리 집 크다. 집 안에서 다 할 수 있다.”
“심각한 집순이라 이건가. 그나저나 같은 나라 사람?”
“응.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이적할 때 같이 영국 왔다.”
그 말에 태양은 충격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일리뉴를 집에 데려올 생각을 했지, 일리뉴 집에 가서 놀아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일리뉴 가정사에 대해서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래도 나름 친한 사이인데 너무 몰랐나 싶어 미안해진 태양은 일리뉴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새 생명이 잉태된 기념으로 내가 너한테 무조건 어시한다.”
“잉태가 뭐냐.”
“임신.”
“아, 그렇군. 진짜인가?”
“그래, 패스하면 무조건 때려넣어. 할 수 있지?”
그 말에 일리뉴는 고개를 끄덕였다. 2세를 임신한 것 때문인지 일리뉴는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고 어른같이 느껴졌다.
일리뉴는 가만히 태양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골 넣으면, 같이 세리머니, 하자.”
“세리머니?”
“아기 요람 세리머니.”
아기 요람 세리머니는 브라질의 전설적인 선수 베베투를 시작으로 자신의 2세가 태어난 걸 축하하기 위해 많은 선수들이 하던 세리머니였다.
“그건 애가 태어난 다음에 하는 게 국룰이야.”
“그래도 하고 싶다. 미리 하면 아기가 잘못될 일 없겠지.”
“에이, 애가 왜 잘못되냐!”
“우리 엄마는 내 위로 둘, 내 밑으로 하나를 잃었다. 조금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 말에 태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걱정할 만하구나.
태양은 그리 생각하고 일리뉴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래, 까짓거 하자. 나랑 너랑 실바랑.”
“나? 나도?”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니지 다 같이 할까?”
태양의 말에 선수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새 생명이 부디 무사히 잘 태어나길 바라는 세리머니를 마다할 동료는 없었다.
“좋아, 그럼 이겨야겠구만.”
실바는 그리 말하며 앞장서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태양도 그런 실바를 따라가려다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새 생명의 잉태를 축하하는 날을 초상집 분위기로 만드는 것도 재밌겠네.”
고개를 돌리니 칠리기리스가 비실비실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원정 경기에서 좌절하는 선수들을 지켜보는 게 가장 즐겁다.
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악동 기질이 다분한 그는, 원정의 악마라 불리는 PSG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원정에서 날뛰는 사나이였다.
태양은 다시 시선을 돌리며 칠리기리스가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을 했다.
“오늘 그리스 애새끼 한 명 초상나서 질질 짜는 날이겠네.”
“흐…….”
그 말을 들은 칠리기리스의 두 눈에도 불똥이 튄다.
여러모로 오늘 경기는 치열하기 그지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