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130화
PSG를 격파하고 4강에 진출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역사에 없던 일이 벌어져서 그런지 며칠 내내 펍이든 골목길이든 뉴캐슬의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술취한 동네 아저씨가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짖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응원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사람들이 합류해 다 같이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가장 많이 들리는 건 윤태양의 응원가인 프린스 태양이었다.
모두 합심해서 최선을 다해 4강까지 가긴 했지만, 누가 뭐래도 1등 공신은 태양이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챔피언스 리그 16골 8도움.
단 한 골만 넣으면 메시도, 그 천하의 홀란드도 넘어서지 못한 크리스티아누의 챔피언스 리그 17골이란 대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록이었다.
게다가 약팀을 상대로 영양가 없는 득점도 아니었으며, 하나같이 강팀을 상대로 넣은 골이었다.
이 선수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뉴캐슬이 PSG라는 거함을 침몰시키고 4강, 준결승의 한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 밀란은 첼시를 상대로 기적 같은 역전골을 만들며 4강에 진출했고, 맨유는 세비야를 상대로 종합 스코어 3대0을 만들며 진출했으며, 레알 마드리드는 유벤투스를 압도해 종합 스코어 5대1로 4강에 진출했다.
그 결과에 따라 4강 대진이 나왔다.
AC밀란 VS 맨체스터 UTD
뉴캐슬 UTD VS 레알 마드리드
-ㅋㅋㅋㅋㅋ 미친 뉴캐슬 ㄹㅇ 도장깨기네 ㅋㅋㅋ
-레파뮌에서 뮌이랑 파를 이겼더니 레가 기다리고 있는 이 ㅈ같은 대진은 뭐죠?
-그냥 대놓고 떨어져라 기도를 해라 ㅅㅂ ㅡㅡ
-결승은 맨유와 레알이 하게 됐습니다 ㅅㄱ
-아직 모른다 파리도 이겼는데 레알 못 이기란 법 있냐
-반대로 밀란이 결승 못 가란 법도 없음 ㅇㅇ
-밀란 VS 뉴캐슬이 성사될 수도 있지
-만약 그렇게 되면 태양이 해트트릭 박고 뉴캐슬 이기겠네
-밀란이 ㅈ으로 보이냐?
-윤태양 밀란 상대전적 2경기 5골 1도움 ㅅㄱ
-ㅋㅋㅋㅋ 근데 이번 결승 경기장 산시로잖아 밀란 결승 가면 개꿀 아님?
-윤태양 이미 산시로에 다섯 골 넣고 NTR함
-ㅋㅋㅋㅋ 일단 레알이나 이기고 말하자
-레알… ㅅㅂ 진짜
뉴캐슬의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가 됐다.
레파뮌을 16강부터 차례대로 만나는 말도 안 되는 대진이 나오자 말들이 많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나온 대진인 것을.
* * *
-챔스 나오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함? ㅋㅋㅋ 악깡버해야지 뭐
누군가의 댓글이었는데, 마음에 콕 하고 박혔다.
그래, 누가 챔스 출전하라고 협박한 건 아니니까.
대진이 뭐 같기는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여기가 맞나?”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뉴캐슬어폰타인에서 조금 떨어진 곳, 온통 밭과 숲밖에 없는 한적한 동네였다.
살아봤자 나이 드신 노부부 정도나 살 것 같은 뉴캐슬 외곽에 일리뉴가 살고 있었다.
이 자식 여기서 구단까지 출퇴근을 한 거야?
어림잡아도 한 시간은 더 걸리는 것 같은데.
오직 나만 오라고 해서 택시 타고 오느라고 돈이 제법 나갔다.
얼른 시즌 끝나면 운전면허부터 따야겠다.
언제나 부모님에게 부탁할 수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여기서 어디로 가야하는 거야?
저기인가?
오래된 도로를 걸어서 걷다보니 집이 높은 담장을 두른 집이 보였다.
일리뉴가 알려준 주소에 집이라고는 저거 하나뿐이니 저 집이 분명 일리뉴 집이겠지.
가까이 다가가니 높은 담장에 덩쿨이 빼곡하게 자라 있었다.
뭔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나고, 솔직히 말하면 귀신 나올 것 같이 생겼다.
왜 있잖아.
미국 영화에서 나오는 아무도 안 사는 외곽에 오래된 저택 같은 거.
이유 없이 저렴하고, 그런데도 오랜 시간 아무도 안 산 것 같은데 주인공은 멍청하게 마음에 든다면서 살기 시작하니,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그런 집 같은 느낌이랄까?
십자가라도 챙겨올 걸 그랬나?
“야, 일리뉴?!”
그런데 얘는 초대해 놓고 뭐 마중도 안 나오냐.
문자로 분명 도착했다고 했는데.
심지어 대문에 초인종도 없네.
“일리뉴? 일리뉴!!”
불러도 대답이 없어 대문을 슬쩍 열었는데.
끼이이익.
하고 듣기에 소름 돋는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뭐여, 위험하게 대문도 열어놓고.”
한국도 아니고 영국에서 이렇게 대문을 열어놓고 다니는 건 위험하다.
여기가 일리뉴 집입니다, 여러분! 하고 입소문이 타기 시작하면 열린 대문으로 너도 나도 강도짓을 하러 올 거다.
위험하기로는 영국보다 더 한 브라질에서 온 애가 왜 이리 칠칠맞은 거야.
“아니, 아무래도 집을 잘못 찾아왔나?”
마당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잔디도 인조잔디로 푹신하게 깔려 있는데, 휑하니 그지없다.
그때였다.
“누구시죠?”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
그곳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누가 봐도 그녀는 브라질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는 남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왼쪽 이마에서부터 눈을 지나 턱까지 내려오는 긴 흉터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흉터가 몇 개 더 나있었다.
그리고 눈은 가로지른 긴 흉터 때문인지 하얗게 빛을 잃고 실명된 상태였다.
솔직히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혹시… 일리뉴 여자친구?”
“태양……! 태양이군요?”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던 그녀의 얼굴이 대번 밝아진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다급하게 자신의 한쪽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옆으로 비스듬히 선다.
“아, 죄송해요. 흉한 모습을 보였네요.”
“네? 뭐가요?”
“일리뉴가 당신이 온다고 말해서 허락을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제 얼굴이 이렇다 보니…….”
그녀의 모습과 말을 들어보니 지금까지 일리뉴가 왜 여자친구를 공개하지 않았는지, 그녀를 노출시키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하니 바보같이 착한 일리뉴가 여자친구가 부끄러워서 숨긴 건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여자친구가 자신의 얼굴이 노출되는 걸 꺼리는 것 같았다.
나를 보고 얼굴을 숨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일리뉴가 나를 초대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던 거 아닐까?
“뭐야, 왜 집에 있냐?”
그때 대문을 열고 일리뉴가 들어왔다.
“그러는 너야말로 어디 갔다 온 거냐? 대문도 열어놓고.”
“너 도착할 때 돼서 마중 나갔다.”
“길이 엇갈린 것 같네.”
나는 웃으며 일리뉴의 어깨를 툭 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다가갈수록 주춤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준비한 것을 내밀었다.
“임신 축하드려요. 임신한 친구에게 선물해 본 적이 없어서 엄마랑 고민하다가 산 거예요.”
“아…….”
“이건 튼살 없애주는 크림이고, 이건 아가 신발이에요. 이건 태어날 아기들 옷이고, 이건 뭐더라? 아무튼, 아기 관련 용품 이것저것 다 사봤어요. 많을수록 좋다고 하더라고요. 세쌍둥이잖아요?”
나답지 않게 말이 많아졌다.
그런 나를 일리뉴의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하고 선물부터 드렸네. 나는 윤태양이에요. 그쪽은?”
* * *
“…아나, 아나 올리베이라.”
아나는 백금발 머리의 동양인을 바라봤다.
자신의 얼굴을 정면에서 봤는데도 그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보통 흉측한 자신의 왼쪽 얼굴을 보면 놀라는 건 기본이요, 욕하는 사람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자신을 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남자친구인 일리뉴 외에 처음이었다.
아나는 시선을 돌려 일리뉴를 바라봤다.
일리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마치 “거봐, 내 말이 맞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나는 그런 일리뉴의 모습에 얕게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음식을 준비했어요. 브라질 음식인데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난 음식 안 가려요.”
그의 말대로였다.
생긴 건 동양의 왕족, 귀족같이 생긴 사람이 낯선 음식을 거침없이 먹었다.
“와, 이거 콩으로 만든 스튜? 이거 맛있네. 넌 이 자식아, 이 맛있는 걸 두고 왜 우리 집 와서 먹는 거야? 여자친구도 혼자 두고.”
한참 맛있게 먹던 그는 일리뉴의 어깨를 툭하고 때렸다.
일리뉴는 당황한 얼굴로 태양을 바라봤다.
“그, 그건……!”
“일리뉴는 내 음식이 맛없대요. 그래서 태양 집에 가서 자꾸 얻어먹는 거죠.”
“내, 내가 언제!!”
당황하는 일리뉴를 보며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은 제가 억지로 가라고 했어요. 클럽 동료들과 친해지는 게 좋으니까요.”
“그런데 왜 우리 집만 오는 거야?”
태양의 물음에 일리뉴는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아나는 그런 일리뉴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일리뉴는 바보같이 착해서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든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 일리뉴의 습성을 이용해 나쁜 친구들이 많이 붙었다.
그 친구들은 일리뉴를 놀리고 상처 주고 이용하기 바빴는데, 일리뉴는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걸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
우직한 그는 자신에게 다가와 친구라 우기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친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을 수도 없이 많이 당한 일리뉴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 일리뉴가 태양에게 다가간 거다.
신기한 마음에 왜 태양 하고만 친해지려 하는 거야, 라고 물었더니 일리뉴가 말했었다.
‘나한테 나쁜 걸 가르쳐 주고 혼내는 친구는 걔가 처음이야.’
가르쳐 주고 혼내는 친구라.
마약을 권하고 총을 건네는 친구는 많이 들어봤어도,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 유형이었다.
아나는 일리뉴가 왜 태양을 좋아하고 따르는지 알 것 같았다.
일리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식사는 아나에게도 너무 좋았다.
동정 받지도 않았고, 억지로 태연한 척하는 표정을 보지 않았으며, 가벼운 분위기에서 친구들끼리 편안하게 식사를 하는 것 같았다.
처음 봤는데 마치 10년을 본 친구처럼 말이다.
태양은 그냥 있는 그대로 그녀를 받아들였다.
남들처럼 동정하며 안타까워하거나 사연을 물어보거나 그녀의 상처를 쑤실까 두려워 조심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 아나를 대했다.
일리뉴를 대할 때도 그랬다.
뚱한 얼굴에 틱틱 쏘듯이 말을 하고 구박하고 타박하지만, 그 속에는 항상 배려와 걱정이 있었다.
자신들 보다 몇 살은 어린데 겉모습과 달리 속은 생각 깊은 어른 같았다.
“태양은 참 좋은 사람 같아.”
어느새 말을 놓게 된 아나의 말에 태양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닌데.”
“아냐,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나나 일리뉴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이렇게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게 얼마만인지 너는 모를걸?”
“그렇게 비행기 띄워줘 봤자 일리뉴한테 하는 구박이 줄진 않아. 얘는 진짜 좀 혼나야 해. 정신을 놓고 시합을 뛴다니까?”
그 말에 아나는 소리 나도록 웃었다. 더 이상 아나는 자신의 흉한 얼굴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를 이어갈 때였다.
태양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태양은 한국어로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말했다.
“일리뉴, 나 좀 태워줄 수 있냐?”
“왜?”
“막내가 태어나려고 하나봐.”
그 말에 일리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나! 갔다 올게!”
“응, 조심히 다녀와!”
“미안해, 아나. 벌써 네 번째 동생인데도 동생이 태어난다 그러면 마음이 급해지네?”
“아냐, 그 마음 이해해.”
아나는 부랴부랴 나가는 태양을 배웅해 주고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 떠난 자리는 어딘가 허전했지만, 아직도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아가들아, 정말 좋은 사람이지?”
아나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이 아이들을 품게 될 때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아무도 공유하지 못했던 아나 자신과 일리뉴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희들이 태어나면 대부가 되어달라 부탁해 볼까?”
아나는 그리 말하며 태양의 막내 동생이 무사히 태어나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