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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198화 (198/202)

장남은 축구가 간절하다 198화

“태양.”

일리뉴가 나를 부른다.

일리뉴 가족은 얼마 전에 별채에서 나가 본래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초보 부부가 쌍둥이 셋을 어떻게 돌보나 걱정했지만, 사람을 만나며 부대낀 덕분인지 몰라도 더 이상 예전처럼 사람을 피하지 않는 아나가 베이비시터를 고용한다는 말에 안도했다.

뭐, 아나는 잘 지내겠지.

이 녀석이 아나 걱정을 안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것 봐라.”

나는 나에게 스마트폰을 내미는 일리뉴를 보고 발을 들어올려 발끝으로 스마트폰을 차올렸다.

일리뉴가 앗, 하고 외치는 사이 나는 차올린 스마트폰을 손으로 낚아채 꺼버리고는 말했다.

“야, 지겹지도 않냐? 자식 자랑 좀 그만해.”

“너무한다, 태양. 그래도 네가 대부인데. 우리 아이들이 수시로 크는 걸 보고 싶지 않나?”

일리뉴의 말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보고 싶긴 하지. 근데 이 자식아, 일주일, 아니, 하다못해 하루 한 번도 아니고 한 시간마다 보여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애가 무슨 30분 만에 크는 것도 아니고 아직도 세쌍둥이랑 같이 사는 기분이 들 정도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이 자식아 그럴 시간에 애들 젖병 물리는 연습이나 해!”

“아, 알았다.”

겁은 많아서 애들 씻기기는커녕 젖병도 못 물리는 자식이 지 자식 자랑만 해가지고는, 쯧.

그렇게 귀찮은 일리뉴를 내쫓고 나니 이번에는 늙은 너구리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어이, 왕.”

“왜요.”

“오랜만에 너네 집에서 삼겹살이나 먹을까?”

“왜 하필 우리 집이에요. 마티네 집에서 먹는다고 하면 갈게요.”

“이상하게 내 집에서 하면 그 맛이 안 나.”

나는 실바를 바라봤다.

“삼겹살에 샤프란을 그렇게 처뿌리고 에스파냐에서나 날 법한 향신료를 곁들이는데 우리 집에서 먹던 맛이 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아, 그런가. 그럼 우리 집에서 먹자. 대신 너네 집에서 쌈장 좀 가져와라. 그 뭐냐, 참기름 하고.”

“오늘은 됐고, 다음 주쯤에 먹어요.”

“아, 오늘 땡기는데.”

“술이 땡기시는 거겠지.”

실바는 정곡을 찔린 듯 움찔하다가 나를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너… 내가 엊그제 브라운 에일 한잔한 거 네가 일렀지?”

“저번 주에 피터네 펍에서 위스키 마신 건 일렀는데, 그건 처음 듣는데요?”

아무래도 누군가 나 말고 피터를 감시하며 리브한테 고발하는 사람이 또 있는 것 같다.

“하나같이 죄다 간첩들 투성이군. 제길.”

실바는 툴툴거리면서 어디론가 향했다.

아니, 이제 곧 훈련 시작인데 어딜 가는 거야?

뭐, 알아서 하겠지.

실바를 뒤로하고 훈련장으로 나섰다.

새해가 된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솔직히 감흥이 없었다.

아, 한 살 더 먹었구나.

얼른 법적 성인이 되고 싶다.

뭐 이 정도?

미성년이라는 게 은근히 제약이 많더라고.

나도 비시즌에는 가볍게 맥주나 와인 한잔 정도는 마시고 싶단 말이지.

그렇게 온갖 잡생각을 하면서 잔디 위를 어슬렁거리면서 가볍게 몸을 푸는데, 선수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해 모든 선수들이 모였다.

보통 이쯤이면 코칭스탭이 나와 있고 감독님이 오실 때가 됐는데 평소와 다르게 안 오신다.

“왜 안 오시지?”

“글쎄?”

“이 멍청이들아, 이적생 오는 날이잖아.”

“아, 벌써? 워크퍼밋은? 발급도 안 받고 일단 오는 건가?”

“걔 영국인이잖아.”

“러시아 사람 아니었어?”

아, 그 사람이 오늘 오는 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프리델 마이어 이 아저씨 일 잘하는 것 같다.

왜 그러냐고?

드미트리 이바노프.

잉글랜드의 이반 뇌제라 불리기도 하고 필드 위의 카렐린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대충 바이스티거나 에제크웸 같은 선수들과 함께 수비수들의 황금세대라 불리며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는 선수였다.

그를 눈앞에서 볼 줄이야.

“어, 온다.”

옆에서 들리는 샬렛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한눈에 드미트리가 눈에 들어온다.

키는 바이스티거 보다 조금 작은 느낌이다. 하긴 바이스티거가 무식하게 큰 거긴 하지.

하지만 덩치는 바이스티거를 압도하고 있었다.

마치 그리즐리 베어가 인간으로 변신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워우.”

“바이스티거가 몸싸움에서 지겠다는 생각은 처음 드네.”

“저게 사람 몸이냐?”

다들 혀를 내두른다.

지난 삶에서 한번 본 나조차도 저 덩치를 보니 혀가 내둘러진다.

저 몸으로 축구를 할 수 있을까 생각되지만, 놀랍게도 그는 센터백 치고 달리기도 무난하고 반응속도도 느리지 않은 편이다.

그야말로 괴물 피지컬 그 자체다.

“자, 다들 모였구나.”

아르텔리 감독이 흐뭇하게 웃으며 우리를 보고는 뒤돌아 드미트리 이바노프를 가리킨다.

“자, 이 친구는 이번에 새롭게 툰이 된 드미트리 이바노프라고 한다. 음… 리첼… 아니, 윤태양. 자네가 이 친구에게 팀과 선수들을 소개시켜 주게나.”

이건 원래 주장이 해야하는 거 아냐? 왜 부주장인 나를 시키는 건데?

그나저나 쟤는 뭐 저리 눈이 맑아?

순정만화 주인공인 줄 알았네.

“잘 챙겨주게. 이 세상에서 자네를 제일 존경한다더군.”

아르텔리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한다.

뭐? 나를 존경한다고?

수비수가? 왜?

의아한 얼굴로 드미트리를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초롱초롱한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부담스러운 눈이다.

그 시선을 피해 몸을 마저 풀고 본격적으로 훈련이 시작된다.

그는 훈련 내내 나를 쳐다봤다.

훈련이 끝나고 이번에는 전술 회의에 들어간다.

…그는 회의 내내 나를 쳐다봤다.

무슨 생체 CCTV가 있는 기분이다.

뭐, 그래도 우리 선수가 됐으니까.

팀에 빨리 녹아들게 해줘야지.

“안녕, 편하게 드미트리라 불러도 되지?”

“그, 그렇게 불러주신다면 영광입니다.”

“…말 편하게 해. 내가 더 어리기까지 한걸?”

“그, 그럴 수 없습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한테 그럴 수 없습니다.”

못하면 동생이고 잘하면 형이 되는 타입인가?

“그건 나랑 비슷하네.”

“여, 영광, 영광입니다.”

말을 좀 더듬는구나.

낯을 가리는 걸까?

이런 친구들이 의외로 내성적인 면이 있지.

“야! 삼겹살 먹자! 쌈장 챙겨와! 어? 인마! 좀 먹자!!”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 등을 주먹으로 툭 치며 말을 건다. 쌈장 타령하는 게 실바였다.

“유, 윤태양을 때린다! 무례하다!”

그 순간 드미트리가 버럭 소리를 치더니 실바에게 달려들어 실바를 번쩍 들어올린다.

다행히 멱살을 잡아 올리진 않… 이게 아니고!

“드미트리! 그만해! 우리 팀 코치야, 코치!”

“예.”

내 말에 드미트리가 멱살을 내려놓는다.

“뭐, 뭐야! 이 비겁한 자식! 이젠 하다못해 개인 경호원까지 고용한 거냐?”

“윤태양은 비겁하지 않다!”

드미트리가 다시 실바를 들어올렸다. 실바의 안색이 사색이 된다.

“태, 태양아, 네 경호원 좀 어떻게 해봐!”

“드미트리 괜찮아, 그만해.”

“알겠습니다.”

와, 말 잘 듣네.

아니, 이게 아니라 왜 말을 잘 듣는데?

“도대체 얘는 누구야? 진짜 경호원이야?”

“보면 몰라요? 우리 팀 이적생이잖아요. 코치나 되면서 그런 걸 몰라?”

“설마, 드미트리?”

“맞다. 난 드미트리. 하지만 넌 드미트리라 부르지 마라. 이바노프다.”

“드미트리가 왜 안 돼?”

“안 친하니까. 드미트리 말고 이바노프.”

“그래… 이바노프.”

실바가 나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이 새끼 정상 아니지?’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아요, 라고 시선을 보냈는데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자, 자, 라커룸으로 가자.”

“예.”

드미트리를 데리고 라커룸으로 들어가자 퇴근을 준비하는 동료들이 보인다.

“자, 다들 봐봐. 우리의 새로운 동료, 드미트리야. 다들 친하게 지내자고.”

라고 말하는 순간, 메넨데즈가 내 팔을 툭하고 친다.

“마티한테 들었는데 삼겹살 먹는다며으아아아악!”

“윤태양 때렸다! 나쁘다!!”

기다렸다는 듯 드미트리가 메넨데즈를 들어올리며 마구 흔들었다.

메넨데즈가 마냥 작은 키가 아닌데 마치 인형이 들려진 채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쁘다!!”

“으아아악! 뭐, 뭐야!!”

…아니, 제발.

“드미트리, 그만.”

“아, 알겠습니다.”

드미트리는 내 말에 순순히 메넨데즈를 내려놓고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이렇게 맑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다.

뭐야, 얘… 좀 무서워.

* * *

뉴캐슬의 21번째 라운드의 상대는 번리였다.

전반기, 홈으로 불러들여 4대0으로 대승을 거뒀던 번리를 상대로 이번 원정경기에서 뉴캐슬은 로테이션을 돌렸다.

윤태양과 메넨데즈, 무리시, 샬렛, 산체스, 린데만이 빠지고 다른 선수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치열한 주전 경쟁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려는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뛰었지만, 오늘 경기에서 가장 눈에 뛰는 건 단연 이 선수.

[드미트리! 코너킥 상황에서 번리 선수 세 명을 밀쳐내고 공을 따냅니다!]

[그냥 점프만 하는데 선수 세 명이 나뒹구네요! 엄청난 힘, 엄청난 피지컬입니다!]

[오늘 드미트리가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사이드에서 크로스와 코너킥, 세트피스를 계속해서 노리는 번리지만, 드미트리 앞에서 그들의 작전이 모두 무용지물이 됩니다!]

필드의 카렐린은 피지컬을 요구하고 거친 플레이가 많은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여실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분데스리가에서 뛰다 온 바이스티거도 초반에는 약간 힘겨워한 부분이 있었는데, 드미트리는 그런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심리전이나 보이지 않는 반칙이 먹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사자가 파리를 신경 쓰는 걸 본 적 있는가?

그런 거다.

드미트리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파리(?)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골대 앞을 지키고 공을 빼앗는 것뿐이다.

[아, 드미트리 또 막아냅니다! 그냥 몸만 들이밀어도 선수들이 튕겨 나가요! 저 몸 자체가 반칙인 수준입니다!]

[뉴캐슬은 선수가 아니라 전차를 사들였군요. 무섭습니다.]

[말씀드리는 와중에 드미트리! 전방으로 롱킥! 저게 로, 롱킥이 맞나요?]

드미트리가 찬 공은 일직선으로 대포알같이 쏘아져 나갔다.

직진으로 뻗어나간 공은 이내 번리의 미드필더 허벅지에 막혔는데, 허벅지로 공을 막아낸 번리의 미드필더는 고통에 튕겨 나간 공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잔디 위에 무릎을 꿇었다.

이 정도면 전방으로 패스를 하려는 건지 선수를 맞춰서 못 움직이게 하고 공간을 만드는 건지 모를 수준이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공을 잡은 다미아노가 일리뉴에게 다이렉트로패스해 골로 연결된다.

[골입니다! 경기 막바지, 일리뉴가 두 번째 골을 넣으면서 뉴캐슬이 3대0으로 앞서갑니다!]

[경기 재개되는데요, 아, 곧 바로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 뉴캐슬이 승리를 가져갑니다!]

[뉴캐슬은 한 명을 영입했을 뿐인데 어쩐지 더 강해진 느낌입니다. 무리시나 바이스티거를 빼도 수비라인 걱정은 더 이상 없을 듯하군요!]

승리를 가져가며 기쁨을 나누는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보며 번리의 팬들이 풀죽은 얼굴로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 경기장은 오늘 승리를 가져간 원정팀 뉴캐슬과 원정팬 툰들의 것이 되었다.

새해.

그리고 후반기.

뉴캐슬은 한층 더 단단해졌고, 강해진 걸 확인한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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