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추측하건대 계기는 어제 있었던 그 일이 분명했다.
집에서 시간을 낭비하던 중,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을 즐겨 주신 여러분께 공지 드립니다. 저희 개발진은 후속작 개발을 위해 클로즈드 베타 테스터를 모집 중입니다. 참여를 원하신다면 하단의 참여 수락 버튼을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스페이스 서바이벌.
드넓은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족 중 하나를 선택해서 생존, 탐험, 진화해가는 서바이벌 RPG 게임이다.
여기서 내가 꽂힌 부분은 ‘다양한 종족’.
어렸을 때부터 외계인, 괴수, 이종족 등을 좋아했던 나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은 내 환상을 그대로 구현한 게임이었다.
때로는 메탈릭 그렘린이 되어 인간들의 함선을 뜯어먹거나, 때로는 돌연변이 괴물이 되어 지상전에서 적들을 학살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집단지성을 가진 군체 우두머리가 되어 행성을 공략하기도 했다.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우주 생물들을 다 플레이해봤지만, 내가 가장 오래 즐겼던 종족은 하나였다.
‘미확인 적대적 우주생물(Unidentified Aggressive Space Morph)’, 약칭 UASM.
나는 어그레시브의 A랑 뒤의 모프를 합쳐서 에이모프라고 불렀다.
에이모프는 고전영화 X일X언에 등장하는 크리처를 모티프로 한 우주 괴물로, 희생자들의 유전 정보를 습득해 자신을 강화하는 종족이다.
강해지는데 한계가 없어서 얼핏 보기에는 사기 종족으로 보이지만, 미칠 듯이 어려운 생존 난이도, 종족 특유의 선천적인 리스크 때문에 악명이 높았다.
무슨 말이냐면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것은 맞지만 초반에 너무 약해서 뭘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생존게임에서는 오래 살아남아 자원과 기술을 축적해 스노우볼을 굴리는 것이 중요한데, 에이모프는 이러한 흐름을 역행하는 메커니즘을 가진 종족이다. 초반에 자꾸 죽으니까 강해질 기회는 줄어들고, 강해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하고 계속 죽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래도 노력해서 잘 생존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에이모프에게는 이를 어렵게 만드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바로 타 종족과 대화, 협력이 불가능하다는 것.
설정상 에이모프는 다른 종족을 살아 있는 먹이, 혹은 수집해야 하는 유전자 덩어리로만 여긴다.
정신 나간 게임사는 이걸 게임에 그대로 구현해 놓았다.
수많은 유저가 참여하는 멀티플레이 게임에서 대화나 협동 플레이가 안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리스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초반에는 약해, 그렇다고 다른 유저와 협동도 불가능해.
두 가지 단점이 안 좋은 쪽으로 시너지를 내서 에이모프는 스페이스 서바이벌에서 최악의 비주류 종족이었다.
오죽하면 UASM의 뒷부분 SM이 사디스트(게임사), 마조히스트(유저)의 약자가 아닐까 라는 루머가 커뮤니티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일까.
그런 쓰레기 종족이 왜 나의 최애 종족이 됐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선택과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진화하고 강해질 수 있는 종족이라는 점이 나를 매료시켰기 때문이다.
‘뭐 그것 말고도 내가 에X리X을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역시 즐기는 자가 강하다고 하듯, 나는 에이모프로 게임 내 최고 난이도 업적인 은하 정복자를 달성한 고인물 유저 중 하나였다.
커뮤니티에서 나보고 명예 에이모프, 외계생물성애자, 모프박이라고 부를 정도니 말 다 했지.
그래도 역시 영원한 왕은 없는 법.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게임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도 학고를 받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2회 연속으로 말이다.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게임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졸업은 해야 했기에 한동안 게임을 떠나 공부에 전념했었다. 그 탓에 후속작이 개발 중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아무튼 스페이스 서바이벌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게임. 인생픽이나 다름없는 게임의 후속편이 나온다는데 좋아하지 않을 게이머가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나는 수락을 눌렀다.
‘그 결과가 이 꼴이지.’
나는 오른쪽 ‘두 번째’ 다리를 들어 ‘외피가 덮인 이마’를 벅벅 긁었다.
긁다 보니 등도 또 근질거려서 이번에는 왼쪽 ‘네 번째’ 다리를 쓰기로 했다. 등 쪽을 벅벅 긁으니까 발톱 끝에 반투명한 허물이 딸려왔다.
사람인데 어떻게 다리가 4쌍이나 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 줄 수 있다.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답니다.’
손으로 쓰고 있는 첫 번째 앞다리를 내려다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 한숨에 맞춰 턱에 달린 감각보조기관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내 손의 형태는 사람이나 포유류에게 달린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길고 얇은 형태에 3마디로 나눠져 있는 다리의 모습은 마치 거미나 절지동물의 다리를 연상케 했고, 다리 끝에는 손가락 역할을 하는 발톱 2개가 앙증맞게 달렸다.
내 손이 아니길 바랐지만, 발톱은 자신을 외면하지 말라는 듯 내 의지에 맞춰 까딱거렸다.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옮겨보면 몸은 뱀이나 도마뱀처럼 길쭉한 형태였다. 등과 배는 딱딱한 외피로 덮여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유연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옆구리는 단단한 등갑과 달리 부드러운 살로 이루어져 있었고, 앞다리와 똑같은 형태의 다리 3쌍이 솟아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엉덩이 부분에는 두껍고 유연한 꼬리가 뻗어 있었다. 꼬리 끝에 있는 날카로운 침이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나는 이 작고 기괴한 생물의 정체를 안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최애 종족 에이모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자 날 은하의 지배자로 만들어 준 종족.
…의 해츨링.
「종족: 미확인 적대적 우주생물
상태: 해츨링
목표: 생존하라
보유 특성: 초감각」
드넓은 우주, 온갖 괴수와 초월자들이 판을 치는 세계관에서 나는 최약체 생물에 빙의한 것이다.